[[분류:초한쟁패기/인물]][[분류:기원전 172년 사망]][[분류:한나라의 공신]] ||||||||||<#c0c0c0><:> '''[[고조공신후자연표]](高祖功臣侯者年表第六) 후제(侯第)''' || || '''29위 하양후(河陽侯) 진연''' || {{{+1 ←}}} ||<#000000> '''{{{#white 30위 요이후(蓼夷侯) 공취}}}''' || {{{+1 →}}} || '''31위 비어후(費圉侯) [[진하]]''' || [목차] == 개요 == || '''생몰년도''' ||<(> ? ~ 기원전 172년 || || '''[[이름]]''' ||<(> 공취(孔聚) || || '''[[작위]]''' ||<(> 요이후(蓼夷侯) || [[초한쟁패기]]때 [[고제(전한)|유방]]의 휘하 장수. == 행적 == 고제 원년(기원전 206년), 탕(碭)[* 현재 [[안후이성]] [[쑤저우시(안후이성)|쑤저우시]] 탕산현과 [[허난성]] [[상추시]] 사이에 있는 곳.]에서 집순(執盾)[* 순(盾)이 방패라는 뜻이 있으므로 방패를 든 유방 직속 호위 장교 정도의 역할이다.]으로서 유방을 섬겼고 좌사마로 한나라에 들어갔다. 전쟁 기간 동안 자세한 행적은 불명이지만 나름대로 능력이 있어 [[해하전투]] 때 전군에 위치한 [[한신]]을 보좌하는 좌군을 맡았다. 전투 초반 [[한신]]이 [[항우]]군의 기세가 강해 물러나자 우군을 맡은 [[진하]]와 함께 협공하여 포위망을 형성했고 대승을 거뒀다. 이 때의 공적을 인정 받아 고제 6년(기원전 201년)에 요(蓼)[* 현재 [[허난성]] [[신양]] 고시현.] 땅을 받아 열후가 되었다. [[한문제]] 8년(기원전 172년)에 죽어 아들 공장(孔臧)이 후사를 이었다. == 기타 == [[왕숙]]이 저술한 공자가어에 따르면 [[공자]]의 11대손이라 전해진다. 단 공자가어는 왕숙이 [[정현(삼국지)|정현]] 학파를 비판하기 위해 쓴 위서라는 게 정설이라 사실인지는 불분명. 유학을 배웠던 [[사마천]]과 [[반고]] 역시 그가 공자의 자손이라 명시한 적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