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子 開方 생몰년도 미상 [목차] == 소개 == [[제환공]] 대의 [[제(춘추전국시대)|제(齊)나라]]의 [[간신]]. 원래는 학덕후로 이름난 [[위의공]]의 아들이었다. 그는 위나라를 버리고 제나라로 가서 봉직했다고 한다. == 생애 == 개방은 원래 위 의공의 태자였다. 위 의공이 제 환공과 싸워 패한 뒤 그를 시켜 예물을 보냈는데, 그 예물을 제 환공이 받아들였다. 그런데, 공자 개방은 제나라의 강성함과 부유함에 반해 눌러 앉아 봉직했다. 제 환공은 그 일로 공자 개방이 충심이 있다고 여겼으나 [[관이오|관중]](管仲)이 말했다. "[[역아]]는 자신의 아이를 사랑해야 할 부모가 임금에게 바쳤고, [[수초]]는 자신을 아끼는 게 인간의 본능인데 그렇게 하지 않았고, 공자 개방은 원래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게 인간의 도리인데, 그렇지 않았으니 믿을 수 없습니다."[* 위나라같은 강대국의 후계를 포기하고 귀순했으니 제나라로부터 얼마나 많은 것을 탐하겠냐며 간했다는 말도 있다. 사실 [[공자]]나 [[맹자]]등도 이나라 저나라 떠돌아 다니며 자신의 뜻을 펼치려 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국시대쯤 되면 타국에 자신을 PR하여 등용되는 것이 흔한 일이 되어버리므로 나라사랑 운운보다는 이쪽이 더 설득력이 있다.] 훗날 관중이 죽을 때 제 환공에게 유언으로 그들을 몰아내라고 했고, 제 환공이 그 말에 따랐으나 [[습붕]]마저 죽고 [[포숙]]이 그 뒤를 잇자 제 환공은 포숙의 조언을 무시하고 역아, 수초, 개방을 모두 불러들였다. 제 환공이 무거운 병이 들어 죽어갈 때 역아, 수초, 개방은 제 환공을 유폐시키고 권력 다툼을 했다. 그 일로 인해 제 환공은 굶어 죽고 말았다. 권력 다툼이 끝나 [[공자무휴]]와 역아, 수초의 무리는 [[송양공]]에 의해 제거되고, 제 환공의 장례를 간신히 치를 수 있었다. 개방은 공자 반(潘)을 섬겼고, [[제효공]]이 죽고 공자 반을 세워 [[제소공]]이 되게 해 무사할 수 있었다. == [[위문공]]과의 동일 인물설 == 위문공의 원래 이름은 벽강으로 알려져 있지만 최근 발견된 청화간에는 벽자와 유사한 한자를 사용한 계방이라는 이름이 나타난다. 계방이라는 이름에서 계라는 글자가 [[한경제]]의 이름과 같아서 대체된 글자가 개(開)자로 [[제환공]]의 삼간이라고 알려진 공자 개방과 같은 이름이 된다. 위나라 종실에서 가까운 두 인물이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보기 힘든 일이기 때문에 동일 인물로 보기도 한다. 이런 의견에 따르면 제환공이 왕위에서 거리가 있는 개방을 대신으로 삼았으나[* 개방은 [[위의공]]의 친자식으로 나오지만 위문공은 왕위에서 밀린 소백 완의 자식, 그것도 유명한 악녀인 제나라 공주 [[선강]]과의 자식으로 위의공의 조카이다.] 위나라가 크게 파괴되면서 그가 즉위해야 할 상황이 되자 위나라를 재건하는 것을 도와준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삼간 취급을 받은 것은 위나라를 재건시켜줬음에도 불구하고 왕위 계승 중에 정치적 영향을 끼친 개방을 제나라 입장에서 비난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중국어 위키에는 이름이 실전된 위나라의 공자를 실수로 개방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어쨌든 이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사료가 나와야 알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분류:춘추시대의 공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