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대한민국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 || '''{{{#000 고재호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역대 대한변호사협회장)]}}} || ---- ||<-2> '''[[대법관|{{{#ffffff 前 대한민국 대법관}}}]]''' || ||<-2>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000 제4대 중앙선거위원회 위원장}}}]][br]{{{+1 고재호}}}[* 창씨명은 나가사와 아리타카(長澤在鎬).][br]高在鎬 | Go Jae-ho'''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고재호.jpg|width=100%]]}}} || ||<|2> '''출생''' ||[[1913년]] [[8월 7일]] || ||[[전라남도]] [[담양군|창평군]] 군내면 삼천리[br](現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삼천리)|| ||<|2> '''사망''' ||[[1991년]] [[10월 18일]] (향년 78세) ||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안암동5가]] [[고려대학교 안암병원]]|| || '''본관''' ||[[제주 고씨]][* 장흥백파-의열공파(毅烈公派)-진위공파(振威公派) 23세 '''재(在)''' 항렬.] || || '''호''' ||취봉(翠峰)|| ||<|2> '''재임기간''' ||제4대 중앙선거위원회 위원장|| ||[[1960년]] [[6월 24일]] ~ [[1962년]] [[10월 23일]]||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부모''' ||[[아버지]] 고광희, [[어머니]] 연일 정씨 || || '''형제자매''' ||형 고재선(高在宣)[* 1910년 11월 13일생이다.][br][[남동생]] 고재량(高在亮)[* 1922년 12월 26일생이다.], [[고재청]], 고재윤(高在倫)[* 1929년 2월 29일생이다.], 고재명(高在明)[* 1934년 11월 12일 ~ 1978년 8월 24일.][br]누이 2명 || || '''배우자''' ||민효식 || || '''자녀''' ||슬하 3남 2녀 || || '''학력''' ||창평공립보통학교 {{{-2 (졸업)}}}[br][[광주고등학교(광주)|광주중학교]] {{{-2 (졸업)}}}[br][[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2 (법학 / 학사)}}} || || '''약력''' ||[[대구지방법원]]장[br][[대구고등법원]] 부장판사[br]대구고등법원장[br][[대법관]][br][[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중앙선거위원회 위원장]][br][[대한변호사협회]] 회장[br]신문윤리위원장 ||}}}}}}}}} || [목차] [clearfix] == 개요 ==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법조인]], [[친일반민족행위자]]. == 생애 == 1913년 8월 7일 [[전라남도]] [[담양군|창평군]] 군내면 삼천리(현 [[담양군]] [[창평면]] 삼천리)[* 인근의 용수리·유천리와 함께 [[제주 고씨]] 장흥백파 집성촌이다. [[고재욱(언론인)|고재욱]] 전 동아일보사 사장도 이 마을 출신이다.]에서 아버지 고광희(高光熙, 1890. 1. 1 ~ 1965. 10. 22)와 어머니 [[연일 정씨]](1890. 12. 30 ~ ?) 정운시(鄭雲始)[* [[정철]]의 후손이다.]의 딸 사이의 6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27년 3월 창평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주로 일본인들이 취학하던 [[구제중학교]]인 [[광주고등학교(광주)|광주중학교]]에 입학해 1932년 3월 졸업했다. 이어 1932년 4월 [[구제고등학교|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해 1934년 수료하고 법문학부로 진학, 1937년 3월 [[경성제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1939년 조선변호사시험과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모두 합격하였고, 일제강점기 말기 [[판사]]로 근무하였다. [[8.15 광복]] 후에도 판사로 근무하였다. [[대구지방법원]]장, 대구고등법원 부장판사, [[대구고등법원]]장을 거쳐 1954년부터 1960년까지 [[대법관]]을 지냈다. 대법관 임명 당시 '''41세'''로 이는 최연소 대법관 기록으로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대법관 퇴임 후 1961년에 [[서울특별시]]에서 [[변호사]]로 개업했으며, 1960년 6월 24일부터 1962년 10월 23일까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중앙선거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1965년 5월부터 1966년 5월까지, 1973년 5월부터 1974년 5월까지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1966년에는 신문윤리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91년 10월 18일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안암동5가]] [[고려대학교 안암병원]]에서 [[숙환]]으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1101900329114015&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1-10-19&officeId=00032&pageNo=14&printNo=14203&publishType=00010|별세했다]]. [[분류:담양군 출신 인물]][[분류:제주 고씨 장흥백파]][[분류:대한민국의 법조인]][[분류:1913년 출생]][[분류:1991년 사망]][[분류:고등문관시험 출신]][[분류:경성제국대학 출신]][[분류:서울대학교 출신/전신 학교/법학전문대학원]][[분류: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분류:대법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