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관련 문서, top1=나당연합군, top2=나당전쟁, top3=연개소문)] ||
<-7><:> '''{{{#000,#ddd 고구려-신라 관계 관련 틀}}}''' || ||<-7><:><#fff,#2d2f34>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한국의 역사)] ---- [include(틀:신라의 대외관계)] ---- [include(틀:고구려의 대외관계)]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이 항목에서는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를 말하며 고구려가 멸망한 7세기까지 관계를 이었다. == 역사 == === 성립 === [[신라]]와 [[고구려]]는 기원전부터 존속했지만, 두 나라 사이에는 [[낙랑군]], [[대방군]], [[옥저]], [[동예]] 등의 세력이 존재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직접적인 교류는 거의 없었다. 4세기에 이들이 모두 멸망, 축출로 정리되면서 비로소 두 나라의 직접 관계가 시작되었다. === 초반(우호적 관계) === 처음부터 아주 우호적이었던 건 아니었다. 고구려가 3세기 전중반 즈음 동예 및 옥저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면서 강원도 영동 지역에 영향력을 부식해나가고 있던 신라와 사소한 마찰을 빚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구려가 동천왕 때 비류수 전투에서 위나라에게 대패를 당하면서 강원도 일대 영향력을 잃게 되는 바람에 이 갈등은 뜻하지 않게 종식되었고, 그 동안에 고구려, 마한(목지국 및 신분활국 세력), 낙랑-대방군 등이 서로 싸우다 다들 사이좋게 큰 타격을 받고 세력을 잃은 이 시기에 백제가 부쩍부쩍 성장해 그 공백을 메우면서 두 나라의 관계는 우호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우선 백제 전성기 때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전사했기에 고구려와 백제는 최악의 대립 관계였다. 한편 백제가 3~4세기에 삼한 전체의 명목상 수장이었던 목지국을 비롯한 충청도 일대 옛 마한 소국들을 정리해서 직접 지배령화한 후에는, 기리영 전투 이래로 개통된 바 있었던 옛 진한 - 낙랑, 대방군 무역 경로가 다시 막혀버린 상황이었기에 신라와 백제 또한 대단히 불편한 관계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 신라와 고구려는 다툴 이유는 전혀 없을뿐더러 사이좋게 지낼 이유가 많아지게 되었다. === 중반(고구려 우위) === 그러다 [[5세기]]에 고구려의 전성기가 열리는데, 이 때 신라가 [[광개토대왕]]의 고구려와 적극적인 관계를 맺어 신라로 침입한 백제, 왜, 가야 연합군을 고구려가 격퇴하는 등 크게 도움을 받았다. 고구려가 강원도 북부, 황해도, 충북 일대를 장악하면서 옛 진한-낙랑대방 무역로가 복원된 것 또한 물론이었다. 그러나 이에는 대가가 있었다. 신라왕이 고구려 천하관을 받아들여, 대왕 고구려왕에게 신하로서 복속하고, 경북 서북부를 고구려군 주둔지로 내주며 서라벌 근처에서도 고구려군 주둔지를 두게 해주는 관계가 형성된 것. 이 기간 동안 신라는 고구려의 선진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군사적, 경제적, 행정적으로 큰 발전이 이뤄지며 문화적으로도 크게 동질화가 진행되었으나[* 이 시기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이었기에 고구려가 그 전 백제처럼 무역로를 막는 등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대립 관계라면 모를까 아예 복속된 속국의 경제적 이권이나 경로를 차단하는 종주국은 없기 때문이다.], 위와 같이 기분 나쁜 관계는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했다. 이후 4세기 중반에 신라가 백제와 우호 관계를 맺게 되자 대백제전을 크게 중시하던 고구려가 당황했으며, 이에 신라와 함께 [[충주 고구려비]]를 세우면서 둘의 관계설정을 다시 한다. 물론 고구려 우위는 변함 없었으나 이 때 신라왕은 고구려왕의 단순한 ‘신하’가 아닌 ‘동생’으로 의제되어 지위가 크게 높아졌다. === 파탄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나제동맹)]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나제관계)] 그러나 이미 국가적 역량이 크게 향상된 신라는 더이상 고구려와의 관계에서 얻을 게 없음이 분명해졌으며, 이에 경북 서북부에서 고구려군을 몰아내어 잃었던 영토를 되찾으며 고구려 적대 정책을 분명히 하면서 고구려와의 종속적 우호 관계는 완전히 끝난다. 이후로는 [[나제동맹]]의 시대가 되며, 그 결과 신라가 6세기 중반에 한강 상류를, 백제는 하류를 얻게 되며 고구려의 전성기 또한 끝난다. 하지만 신라와 백제의 동맹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신라는 백제를 상류에서 몰아내고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의 [[성왕(백제)|성왕]]도 전사시킨다. 그 이후 신라의 전성기 때는 신라가 고구려와 동맹을 맺으려고 왔지만 고구려는 경기도 중북부 일대를 반환하라고 하고, 결국 신라는 반환요구를 거절하고 당나라와 [[나당연합군|나당동맹]]을 맺게 된다. === 종결 === 신라와 당나라는 연합하여 먼저 백제를 무너뜨린다. 백제를 점령한 나당연합군은 이제 고구려를 치는데 결과적으로 고구려도 멸망하게 된다. 물론 그 뒤로 [[고구려부흥운동|고구려 부흥 운동]]이 있었지만 [[안승]]과 [[검모잠]]의 부흥운동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며 고구려는 멸망한다.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국가 멸망/사례, 앵커=고구려)] === 또 다른 시작 === 일단 신라는 고구려 유민으로 이뤄진 [[보덕국]]을 세우고 보덕국왕을 신라왕의 신하로 두는데, 이는 5세기에 있었던 신라-고구려 관계와 크게 비슷한 것이었다. 다만 서열은 완전히 뒤바뀐 것이었다. 보덕국은 오래지 않아 해체되지만 신라는 훗날 고구려를 이어받은 나라인 [[발해]] 그리고 [[고려]]와 외교 관계를 맺게 되는데, 특히 신라와 고려의 관계는 아이러니하게도 고구려와 맺었던 관계를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양상이 흥미롭다. 고구려와 신라는 보덕국까지 합하면 처음에는 고(구)려대왕의 신하 신라왕 - 고(구)려대왕의 '''동생''' 신라왕 - 신라대왕의 신하 보덕국(=고려)왕 - 보덕국(=고려) 폐지 및 신라로의 흡수 이렇게 진행이 되었다. 한편 왕건의 고려는 처음에는 신라대왕의 신하 고려왕 - 931년 신라가 고(구)려에게 순(順)하기로 하면서부터는 '''고려대왕의 신하 신라왕''' - 935년 신라국 폐지 및 고려로의 흡수 이렇게였다. 때문에 935년 신라가 고려에게 항복할 때는 이미 신라왕이 고려대왕의 신하였던지라 '선양'이 불가능하여 '귀부'형식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적어도 신라 세계관으로 봤을 때 후백제는 반란 일으킨 신라 정규군 집단이었기에 후백제와는 어떤 외교적 형식도 불가능했음이 주목할 부분이다. 경순왕이 일부러 고려에게 순하기로 한 다음 귀부를 결정한 걸 봤을 때, 경순왕을 비롯한 신라 지배층이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를 상당히 잘 알고 있었을 개연성이 높다.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고려-신라 관계)] == 관련 사건 == * [[나당연합군|나당동맹]] * [[나제동맹]] * [[삼국통일]] * [[고구려-당 전쟁]] [[분류:삼국시대]][[분류:고구려]][[분류:신라]][[분류:나무위키 한국사 프로젝트]][[분류:나무위키 외교 프로젝트]][[분류:과거의 외교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