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계훈제.jpg]] 桂勳梯 [[1921년]] [[12월 31일]] ~ [[1999년]] [[3월 14일]] (향년 77세) >변혁의 물결 속에서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다. >그것은 '''[[자유]]'''와 '''[[평등]]'''이다. >그리고 그것에 뿌리를 둔 '''[[민주주의]]'''의 완성과 '''[[남북통일|평화통일]]'''이다. >그것은 나라의 이상이며 우리의 염원이다. >'''[[조국]]'''과 '''[[민주]]'''는 고전적일 수 없으며 >낡을 수도 변할 수도 없다. >---- >자신이 남긴 메모 中 [목차] == 개요 == 대한민국의 [[사회 운동|사회운동가]]. 본관은 [[수안 계씨|수안]](遂安).[* 봉곡파 23세 훈(勳) 항렬.] [[한국독립운동]], [[한국 민주화운동]], 통일 운동 등의 [[사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 일생 == 1921년 12월 31일 [[평안북도]] [[선천군]] 심천면 부황동[* 인근의 고군영리와 함께 [[수안 계씨]] 집성촌이다.](現 [[동림군]] 부황리)에서 아버지 계봉집(桂鳳集)과 어머니 [[경주 이씨]] 이형저(李亨姐)[* 이익세(李益世)의 딸이다.] 사이에서 4형제 중 막내 아들로 [[http://www.kdemo.or.kr/notification/calendar/post/2400|태어났다]]. 16살에 민족학교였던 신성중학교에 입학했으며 그 곳에서 민족의식을 키웠다. 그는 처음에는 [[의사]]가 되고 싶어 열심히 돈을 모으고 공부하여 상경했지만 [[색맹]]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열심히 학업을 닦아 1943년 [[고려대학교 법과대학|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한다. 대학생이 된 그는 일제의 강제 징집에 저항[* 자서전에 따르면 그는 자신을 가르치던 선생님이 징용에 걸려 끌려가는 것을 보아야 했고, 한 선배가 자신에게 일본인과 똑같이 되어야 조선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을 들어야 했단다. 이 때문에 계훈제는 분노하여 징집을 거부하게 된다.] 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가고자 [[신의주]]로 떠났지만 체포되어 강제노역형을 선고받았다. 여기서 그는 독립운동 [[비밀결사]] 요원들과 접촉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8.15 광복]] 이후 계훈제는 [[경성제국대학|경성대학]] 법문학부 [[정치학과]]에 편입하였고, [[서울대학교/학부/사회과학대학/정치외교학부|서울대학교 정치학과]](경성제국대학의 후신)으로 돌아와서 [[우익]] 학생단체[* 이 당시 계훈제와 같이 [[우익]] 학생단체에 가담해서 반탁운동에 가담했던 사람으로는 계훈제와 여러모로 정치적 성향이 상극이었던 [[이철승]]이 있었는데, 훗날 [[이철승]]도 [[동아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계훈제와 같이 [[우익]] 학생단체에 가담해서 반탁운동에 가담했다고 회고했다. 사실 이 둘이 서로 상극이 된 건 70년대 이후이고 오랫동안 비슷한 정치적 노선을 걸었던 편이었다.]에서 활동하며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펼쳤다.[* 그렇지만 [[국대안 파동]] 당시에는 국대안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파동에 대해서는 항목 참고.] 1948년에는 [[김구]], [[김규식]]을 따라서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러다 1950년 [[폐결핵]]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기며 9년 간의 투병 생활을 하였다. 그는 병이 회복된 1959년 다시 사회 운동에 뛰어들어 [[4.19 혁명]]부터 사회운동가로 활동한다. 4.19 혁명 이후에는 [[교사]]들의 [[노동조합]] 결성을 도왔고, 학생운동을 조직 및 지원하였다. [[박정희]] 정권 때에는 [[한일협정 반대투쟁]], [[월남파병]] 반대운동, 삼선개헌 반대운동 등의 각종 사회 운동에 뛰어들었다.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민주수호국민위원회', '민주통일국민회의'에 참여하여 [[장준하]], [[문익환]]과 함께 반유신 민주화운동을 벌였다. 그 일로 1977년에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한편 1970년부터는 [[함석헌]]이 발행하던 <씨알의 소리>에서 편집위원을 맡았다.[* 당시 그가 편집위원으로 발표한 글 「어느 저항인의 하루」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아도 거짓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끝없이 반항했고, 그러다 보니 항쟁으로 일관하며 항자로 지칭하고 자족하는 삶."'''] 계훈제는 1980년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당시 2년 정도 도피했으며, 1985년에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의 부의장을 역임했다. 그는 80년대 벌어진 각종 사회 운동은 물론이고 1987년 [[6월 항쟁]]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민주화]] 이후에는 각종 민중운동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1999년 3월 14일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자택에서 폐병으로 쓰러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으로 후송되던 도중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9031500289101002&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9-03-15&officeId=00028&pageNo=1&printNo=3450&publishType=00010|세상을 떠났다]]. 북한이 사후에 [[조국통일상]]을 추서했다. == 저서 == * 「외로운 신화」 (2000) - 산문집 * 「흰 고무신」 (2002) - 계훈제의 [[자서전]]. 죽기 직전 투병 생활을 하면서 집필했으나 미완성으로 남았다. == 여담 == 중학교 시절 [[장준하]]와 동창이었다. 그래서 그와 친하게 지냈으며, 또한 [[함석헌]], [[문익환]], [[백기완]]과도 친분이 있었다. 계훈제까지 포함하여 이 5명은 형제와 자식처럼 지냈다는 후문이다. 본래는 [[김대중]]의 둘째 부인 [[이희호]]와 사귀던 사이었다. 이희호의 자서전에 따르면, 김대중을 알기 전 [[서울대학교]]에 다녔기에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던 계훈제를 알게 되었고 그와 가까이 지내며 [[결혼]]할 마음까지 품었단다. 하지만 그가 폐결핵에 걸렸고, 자신도 [[미국]]으로 [[유학]]을 갔기에 관계가 깨졌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계훈제와 이희호가 부부 사이였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일각에서는 [[신정아]]의 자서전의 '외할머니는 유명 재야정치 인사의 부인'이라는 구절과 연결짓기도 하는데, 참으로 터무니 없는 주장이다.] 이후 부인 [[경주 김씨]] 김진주(金眞珠)[* 2018년 10월 24일에 사망.]와 결혼하였다.[* 일각에서는 계훈제가 [[이희호]]와의 관계 때문에 [[김대중]]을 싫어했다고 보기도 하는데 실제로 계훈제와 가깝게 지내던 최기일 박사가 [[1987년 대선]]정국 당시 계훈제에게 직접 [[김대중]]에 대한 지지를 부탁했으나 계훈제는 대놓고 [[김대중]]을 싫어하면서 거절했다고 한다. 얼마 있다가 최기일은 양호민[* 잡지 [[사상계]]의 주간 중 한 명으로 [[장준하]], [[김준엽]]과 생전에 굉장히 가까웠던 사이었다. 최기일 본인도 학창시절 이 둘과 친분이 두터웠으며 이러한 인연덕분에 [[미국]]으로 유학가고나서도 가끔씩 친구 [[장준하]]의 잡지 [[사상계]]에 미국 정세에 관한 글을 개재하기도 했다.]으로부터 직접 계훈제와 [[이희호]]가 옛날에 서로 사귀었던 사이었기 때문에 계훈제가 저렇게 [[김대중]]을 싫어하는 거라고 들었다고 한다.] 둘 사이에 아들 계여곤을 두었다. 무척 간소한 성품이었다고 한다. 사시사철 옷차림은 흰 [[고무신]]에 작업복으로 늘 다녔으며, 일생 동안 단 1번 밖에 [[구두]]를 신은 적이 없다고 한다. 그날은 바로 [[장준하]]의 [[결혼식]] 주례를 선 날이었다 한다. 쉽게 말하면 본 [[문서]] 맨 위에 있는 [[사진]]의 모습처럼 옷차림을 하였다. 아들 계여곤은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에서 응급의학과 [[의사]]로 재직하고 있다.[[https://www.kosinmed.or.kr/03dept/dept01.htm?mode=do_detail&i_no=85&i_dno=490|#]] == 관련 문서 == * [[실향민/대한민국]] * KBS 인물현대사 - 어느 저항인의 긴 하루 [[http://junibaum.tistory.com/887|1편]] [[http://junibaum.tistory.com/888|2편]]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 [[분류:민주운동가]] [[분류:선천군 출신 인물]] [[분류:수안 계씨]] [[분류:1921년 출생]] [[분류:1999년 사망]] [[분류:실향민]][[분류:희귀성씨인 인물]][[분류:모란공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