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경북대학교 총장)]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DB1F26 0%, #DB1F26 20%, #DB1F26 80%, #DB1F26)" '''{{{#ffffff 제4대 경북대학교 총장}}}[br]{{{#ffffff {{{+1 계철순}}}[br] 桂哲淳}}}'''}}} || ||<-2> {{{#!wiki style="margin:-6px -10px" [[파일:계철순 총장.jpg|width=100%]]}}} || ||<|2> '''출생''' ||[[1912년]] [[12월 20일]] || ||[[평안북도]] [[선천군]] || ||<|2> '''사망''' ||[[2003년]] [[6월 11일]] (향년 90세)|| ||[[서울특별시]] || || '''창씨명''' ||가쓰라 테츠오(桂哲雄) || || '''호''' ||월파(月坡)[* 그가 재직했던 [[경북대학교]] 교내 [[경북대학교 박물관]] 앞에 그의 호를 딴 '월파원(月坡園)'이 있다.] || || '''본관''' ||[[수안 계씨]][* 정문파 21세 순(淳) 항렬.] || || '''학력''' ||신의주고등보통학교 {{{-2 (졸업)}}}[br][[경성제국대학]] {{{-2 ([[법학]] / [[학사]])}}}[br][[고려대학교]] {{{-2 ([[법학]] / [[명예박사]])}}}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법조인]], 법학 교수, [[경북대학교]] 제4대 총장. == 생애 == 1912년 12월 20일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아버지 계용전(桂龍銓)과 어머니 [[하동 정씨]][* 정상전(鄭尙銓)의 딸이다.] 사이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30년 신의주고등보통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같은 해 [[경성제국대학]] 예과 입학 시험에 합격하여 문과 A조에 [[http://db.history.go.kr/id/gb_1930_04_01_a09710_0220|배정받았다]]. 그는 입학 후 반제동맹에 관계하던 동기생 홍필선(洪必善)이 '[[독일어]] 공부를 같이 하자'는 권유를 받고 교내 독서회 예과반에 소속되어 좌익서적을 교본으로 [[https://www.aladin.co.kr/shop/ebook/wPreviewViewer.aspx?itemid=175569585|공부했는데]], 이 때문에 1931년 10월 당시 법학과 선배 [[신현중]]·[[조규찬(독립운동가)|조규찬]] 등이 관계하고 있던 [[마르크스-레닌주의|마르크스-레닌계]] [[조선공산당]] 재조직 사건에 연루되어 [[서울중부경찰서|경성부 본정경찰서]]에 검거되었으나 11일만에 [[불기소처분]]으로 [[http://db.history.go.kr/id/had_148_0770|석방되었다]]. 1932년 4월 예과를 제7회로 [[http://db.history.go.kr/id/gb_1932_04_05_a15710_00170|수료하고]] 같은 해 5월 본과 법문학부 법학과에 [[http://db.history.go.kr/id/gb_1932_05_02_a15920_00280|입학했다]]. 1934년 8월 27일 선천유학생회에서 [[동아일보]] 선천지국의 후원을 받아 학술대강연회를 열었을 때, 「法律上(법률상)으로 본 貞操(정조)」라는 논문을 [[http://db.history.go.kr/id/npda_1934_08_28_w0004_0490|발표했다]]. 1935년 3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 학사시험에 합격하여 졸업하였다.[* [[대법원]] [[대법관]]으로서 [[진보당 사건]] 당시 [[조봉암]]에게 사형을 선고한 [[김갑수(법조인)|김갑수]]와 [[권성기]] 전 [[농림부]] [[차관]] 등이 그의 동기생이다.][[http://db.history.go.kr/id/mh_001_0030_0040_2090|#]] 그는 대학 재학 중에 얻은 [[폐결핵]]을 요양하기 위해 졸업 후 [[평안남도]] [[중화군]] 상원면 상원금융조합에 이사로 취임하여 1939년까지 [[http://db.history.go.kr/id/hs_002_1939_03_32_5260|역임했으며]], 1939년 4월에는 약방을 경영하던 친구 김태봉(金泰鳳)[* 창씨명: 타케바야시 야스오(竹林泰男)]과 함께 평안북도 [[신의주시|신의주부]] 노송정에 일독약업(日獨藥業)[[합명회사]] 본점을 [[http://db.history.go.kr/id/gb_1939_06_06_a37110_00330|설립했는데]], 이후 일덕화학공업(日德化學工業)으로 상호를 변경하였다가 1940년 11월 30일 [[http://db.history.go.kr/id/gb_1941_01_13_a41900_00230|폐업했다]]. 1940년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한 그는 1941년 경성지방법원의 사법관시보로 발령받아 관료생활을 시작했고, 1943년에는 대구지방법원 판사에 발령받아 [[8.15 광복]] 직전까지 [[http://db.history.go.kr/search/searchResultList.do?sort=&dir=&limit=20&page=1&pre_page=1&setId=3&totalCount=3&kristalProtocol=&itemId=jw&synonym=off&chinessChar=on&searchTermImages=%E6%A1%82%E5%93%B2%E9%9B%84&brokerPagingInfo=SnUpYrZZuHIxMzHLMdPQRSi0k0mUUpCDsHuCGHyKLMNd0f0h&selectedTypes=&selectedSujectClass=&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6%A1%82%E5%93%B2%E9%9B%84&searchKeywordConjunction=AND|근무했다]]. 광복 직후에도 대구지방법원 판사로 근무했으며 그 해 10월 초 대구지방법원에서 열린 절도사건에 대한 재판을 담당했는데, 이 재판은 해방 이후 최초로 열린 재판으로 [[한국어]]를 사용한 최초의 재판이기도 하다. 이 재판에는 [[고재호]] 당시 대구지방법원장이 참석하여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52500289118012&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4-05-25&officeId=00028&pageNo=18&printNo=1906&publishType=00010|방청하기도 했다]]. 이후 1946년 대구고등법원 판사로 근무하다가 1946년 대구변호사회 소속 개인 변호사 사무소를 개업했다. 1948년 3월 24일 국회의원선거위원회 경상북도위원회 위원에 [[http://db.history.go.kr/id/dh_006_1948_03_24_0030|선임되었다]]. 같은 해 12월 자유신문사 후원, 조선사진예술연구회 주최의 제2회 전조선예술사진전람회에서 [[http://db.history.go.kr/id/npfp_1948_12_12_v0003_0200|입선하기도 했다]]. 1950년 [[대한민국 육군본부]] [[법무관]]으로 임관되어 1954년까지 근무하였는데, 육군 소령 법무사로 재직 중이던 1951년 [[국민방위군 사건]]의 2차 재판에 재판관으로 출석하기도 했다. 1954년 [[대한민국 육군]] 중령으로 예편한 그는 [[경북대학교 법과대학|경북대학교 법정대학]] 교수에 채용되어 1959년까지 재직했고, 재직 중에 법정대학 학장을 맡기도 했다. 1959년부터 변호사 활동을 재개했는데,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난 뒤 그 해 7월 [[혁명재판]]소 상소심 심판관에 선임되어 12월까지 재직했다. 1961년 12월 7일 경북대학교 제4대 총장에 [[http://db.history.go.kr/id/npda_1961_12_08_w0001_0080|임명되어]] 1967년까지 재임했으며, 경북대학교 총장에 재직 중이던 1963년 [[고려대학교]]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총장 재직 중 생산기술연구소를 설립하고 두 차례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 대면하여 막대한 연구비 지원을 받았고, 1966년 국내 최초로 강의계획표 제도를 도입하고, 어학연습교실을 만들었다. 입학시험 또한 기존의 [[OX퀴즈]] 중심에서 주관식 시험 및 작문 시험을 도입했다. 또한 당시 경북대학교 교정을 통과하는 도로는 포장이 채 되어 있지 않아 비만 오면 진흙탕이었는데, 당시 강원채(姜琬埰) 대구시장에 요청하여 경북대학교 정문에서 대운동장까지의 폭 5m의 포장도로를 정비했다. 이때 [[공병대대]]의 도움을 받아 벚꽃길 등과 같은 가로수길도 만들었다. 한편, 학교 조경에도 관심을 가져 원로교수의 제안을 받고 캠퍼스에 연못을 만들었는데, 이 연못이 바로 당시 기금을 지원한 하영수(河泳洙)의 호를 따서 이름한 '일청담(一淸潭)'이다. 또 원예학과와 함께 본관 앞에 꽃시계를 만들고, [[경북대학교 박물관]] 주변에 자신의 호를 따서 이름한 '월파원(月坡園)'을 [[http://www.idaegu.com/newsView/idg201806110036|조성했다]]. 은퇴 후 [[우석대학교(서울)|우석대학교]] 관선 이사에 취임했다가 1977년부터 1996년까지 [[경상북도]] [[안동시|안동군]]에서 변호사로 활동했으며, 서민 법률구조 사업을 하기도 했다. 이때 취미였던 사진촬영에 더욱 더 흥미를 가져 1986년 한국사진작가협회 초대 안동지부장 및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초대 안동지부장에 취임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1996년 노령으로 변호사업을 은퇴한 그는 가족들이 있는 [[서울]]로 가서 여생을 보내다가, 2003년 6월 11일 [[노환]]으로 [[http://news.imaeil.com/People/2003061211185067355|별세했다]]. 사후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사법 부문에 선정되었다. [[분류:선천군 출신 인물]][[분류:실향민]][[분류:수안 계씨]][[분류:대한민국의 사회과학 교수]][[분류:대한민국의 법학자]][[분류:대한민국의 교육인]][[분류:1912년 출생]][[분류:2003년 사망]][[분류:경북대학교 총장]][[분류:서울대학교 출신/전신 학교/법학전문대학원]][[분류:경북대학교 재직]][[분류:고등문관시험 출신]][[분류:희귀성씨인 인물]][[분류:대한민국의 법조인]][[분류:고려대학교 재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