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87C43FCB-0EB2-45FA-8996-C0F7491C82FA.png]] 桂鎔默 [[1904년]] [[9월 8일]] ~ [[1961년]] [[8월 9일]] (향년 56세) [목차] == 개요 == [[대한민국]]의 전 [[소설가]], [[시인(문학)|시인]], [[수필가]], [[기자]]이다. 본관은 [[계(성씨)|수안]](遂安)[* 군현파 23세 용(鎔) 항렬.], 아호는 우서(雨西), 초명은 하태용(河泰鏞). 계용묵의 외조부 박치항은 [[현상윤]] 초대 [[고려대학교]] 총장의 외조부 박치형(朴治亨)의 첫째 남동생이다. 그러므로 현상윤은 계용묵에게 외재종형(外再從兄)이 된다. == 생애 == 1904년 9월 8일 [[평안북도]] [[선천군]] 남면 삼성리 군현동(현 선천군 삼성리 군현동)에서 아버지 계항교(桂恒敎)와 어머니 [[진주 하씨]]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어머니 진주 하씨는 아버지의 옛 연인으로, 출생 직후에는 친외조부 하재천(河載玔)과 둘째 외숙부 하원(河洹)의 호적에 올라 하태용(河泰鏞)이라는 이름을 받았다가 이후 생부를 따라 귀향하면서 본 이름을 되찾았다.[[https://ridibooks.com/books/805035197|#]] 그의 조부 계창전(桂昌琠)은 1905년 종9품 [[동명왕릉]][[참봉]]에 제수되기도 했고[[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Z0_A42_04A_29A_00070|#]], 외조부 [[박(성씨)|죽산 박씨]] 박치항(朴治恒)[*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c_1883_014316|1883년 국조방목]]에는 박치항(朴致恒)으로 등재되어 있기도 하다.]은 1873년([[고종(대한제국)|고종]] 10) 식년시 진사시에 3등 46위로 입격하고[[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73_035113|#]] 1883년(고종 20) 별시 문과에 병과 4위로 급제하여[[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c_1883_014316|#]] 1891년 정6품 [[사간원]][[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Z0_A28_08A_09A_00120|정언]](正言), 종5품 [[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Z0_A28_09A_19A_00300|부사직]](副司直) 등을 역임한 인물로, 계용묵의 친가와 외가 모두 선천 지방의 양반가문이었다. 선천삼봉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몰래 상경하여 1921년 [[중동고등학교|중동학교]], 1922년 [[휘문고등학교|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잠깐 재학했으나 신교육을 반대하던 조부에 의해 모두 발각되어 강제로 귀향하였고, 곧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약 4년 동안 고향에서 홀로 외국문학서적을 탐독하다가 [[일본]]으로 유학, [[토요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였으나 집안이 파산하여 1931년에 귀국했다. 귀국 후에는 한때 [[조선일보]] 기자로 근무했다. 1920년 <새소리>라는 소년 잡지에 "글방이 깨어져"라는 습작 소설을 발표하여 소설가로 첫 등단하였다. 1925년 <생장>이라는 잡지에 <부처님 검님 봄이 왔네>라는 시를 발표하여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1961년 8월 9일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자택에서 위암으로 사망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108090032920302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1-08-09&officeId=00032&pageNo=3&printNo=4796&publishType=00020|#]].향년 56세. 사후 [[망우역사문화공원|서울 망우리 묘지]]에 안장되었다. == 기타 == 평소에 신고 다니던 구두 때문에 본의아니게 굴욕을 당한 적이 있었다. 구두 수선공이 신발 바닥에 큰 징을 박아준 것때문에 걸을 때마다 저벅거리는 소리가 거슬릴 정도로 났는데, 밤중에 [[덕수궁]] 근처를 걸어가다가 앞서 가던 여자가 그 소리에 놀라서 도망가는 바람에 불량배로 오인받았다는(...) 웃픈 해프닝인데, 이를 계용묵 본인이 아래에서 언급되는 수필인 [[구두(동음이의어)#s-4|구두]]로 [[자학개그|발표하기도 했다]]. 작품으로는 소설 '[[백치 아다다]]', [[수필]] '[[구두(동음이의어)|구두]]'가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소설은 모두 단편이며, 장편소설을 딱 하나 쓰긴 했으나 원고를 분실하는 바람에 발표하지 못했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공식 번역해서 출간하기도 했다. 당시의 제목은 <검둥이의 설움>. [[분류:선천군 출신 인물]][[분류:1904년 출생]][[분류:수안 계씨]][[분류:1961년 사망]][[분류:대한민국의 소설가]][[분류:실향민]][[분류:위암으로 죽은 인물]][[분류:희귀성씨인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