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한국의 성씨)] [include(틀:신라 6성)] ||<-2> '''{{{#710048 [[신라|{{{#710048 신라}}}]] 6성}}}''' {{{#!wiki style="margin: -15px -10px" || {{{#!wiki style="margin: -0px -5px" [[파일:경주 정씨 종문.svg|height=55&align=left]]}}} '''{{{#710048 {{{+1 慶州 鄭氏}}} (月城 鄭氏)[br]{{{+1 경주 정씨}}} (월성 정씨)}}}''' ||}}} || || '''{{{#ecd8e9 관향}}}''' ||[[경상북도]] [[경주시]] || || '''{{{#ecd8e9 시조}}}''' ||[[지백호]](智伯虎) || || '''{{{#ecd8e9 중시조}}}''' ||정진후(鄭珍厚)[* 지백호와 정진후 사이의 계대파악 손실로 인해, 경주 정씨에선 정진후를 1세조로 삼고있다.] || ||<|2> '''{{{#ecd8e9 집성촌}}}''' ||[[경기도]] [[연천군]][br][[충청남도]] [[금산군]][br][[전라북도]] [[임실군]][br][[전라남도]] [[순천시]], [[여수시]], [[고흥군]], [[신안군]], [[장성군]][br][[경상북도]] [[청송군]], [[김천시]][br][[경상남도]] [[남해군]], [[통영시]]|| ||[[함경남도]] [[영흥군]] || || '''{{{#ecd8e9 인구}}}''' ||350,587명^^(2015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경상북도]] [[경주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신라 6성의 하나. 신라 6성은 경주 이씨, 경주 최씨, 경주 정씨, 경주 손씨, 배씨, 경주 설씨[* 현재는 경주•순창 설씨이다.]를 말한다. == 시조 == <경주정씨대관>에 따르면 "경주 정씨는 우리나라 성씨의 대종으로서 가장 오랜 유래를 지닌 씨족의 하나로 [[신라]]를 구성한 진한국(辰韓國) 사로(斯盧) 6촌의 하나인 자산진지촌(觜山珍支村)[* 후에 6촌을 6부로 개편하면서 본피부(本彼部)가 된다.] 촌장인 [[지백호|지백호공]](智伯虎公)를 시조로 받들고 있다."고 하였고, 또 "지백호공이 {{{#red 서기전 117년(원수 6년)}}}[* 원수(元狩)는 전한(前漢) 무제(武帝)의 연호 중 하나로 기원전 222년부터 기원전 117년까지 사용됐다.] 경주 화산(花山)에 강림하여 부족국가이던 사로의 여섯 고을 중 자산진지촌을 다스렸으며, 그 뒤 서기전 69년 3월 초하루 다른 다섯 촌장과 함께 자제들을 거느리고 알천(閼川) 언덕 위에 모여 임금을 세울 것을 논의하다가 나정(蘿井) 곁에서 알에서 태어난 아이인 [[혁거세]](赫居世)를 얻어 기원전 57년 거서간(居西干)으로 추대하였다"라고 한다. 그러나 <경주정씨대관>의 이 이야기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동경지> 등에 나오는 '신라건국설화'와 '진신전기'(縉紳傳記)를 인용한 것이다. 이들 문헌은 고려 중기 이후에 저술되었고, 또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 정사의 기록에서 전혀 확인되지 않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기에 그 진의의 신빙성이 매우 떨어진다. 따라서 이는 실제적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단군신화]]처럼 하나의 설화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교차검증이 불가능하여 실제 역사로 보기 어려운 부분은 빨간색 글씨로 표시하였으며, 이하 같다. 지백호의 '강림설(降臨說;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설)'이나 박혁거세의 '난생설(卵生說)'은 모두 그들의 탄생을 일반사람들의 '태생(胎生)'과 달리하여 [[신격화]]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즉, 후대 어느 씨족이 지백호를 시조로 추대하고 그 계통을 이루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 씨족이 바로 경주 정씨이다. 그런데 경주 정씨뿐만 아니라 영일, 동래, 온양, 하동, 진주 등 30여 성씨도 그들 씨족의 시조로 지백호를 추대하고 성을 정(鄭)으로 하였다. 이는 제일 먼저 경주 정씨가 성을 가지면서 지백호를 시조로 옹립했고, 그 뒤에 영일, 동래, 온양 등의 본관이 발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처음에는 모두 자산진지촌(경주 지역)과 그 인근에 살면서 그 지역 촌장인 지백호를 시조로 삼으며 살다가, 시간이 흐르며 지역을 옮겨 다른 곳에 살게 되면서 각자 자기 지역을 본관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유래 == 그러면 경주정씨가 '성씨(姓氏)'를 가진 것은 언제일까? 역시 <경주정씨대관>에 보면, "서기 32년([[유리 이사금]] 9) 봄에 {{{#red 그의 현손 대(玄孫代; 東沖)에 와서}}} 사로 6촌의 촌장들과 사성(賜姓)할 때, 자산진지촌(觜山珍支村)을 본피부(本彼部)로 개칭하면서 {{{#red 낙랑후(樂浪侯) 봉훈(封勳)과 함께}}} 정씨(鄭氏)로 사성(賜姓)되었다."라고 하였다. {{{#red '동충(東沖)'은 시조 지백호의 현손이며 대장군 빈(彬)의 아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사성제도가 씨족사회에서 부족사회로 넘어가면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씨가 처음으로 성을 가지게 된 때는 신라 유리왕 9년, 서기 32년이다. 그 뒤 지백호는 신라를 세운 공훈으로 {{{#red 서기 516년([[법흥왕]] 3)에 문화(文和)로 [[시호]](諡號)를 받았고, 이어 656년([[태종무열왕]] 3)에 감문왕(甘文王)으로 추봉되었다.}}}[* 사로 6촌장들이 시호를 얻었다거나 무열왕 때 왕으로 추봉되었다거나 하는 기록은 당대에는 전혀 확인되지 않는 거짓으로, 후대에 조상을 미화하기 위해 지어낸 것이다.] 그 뒤 시조를 지백호로 추대하고 성을 정씨, 본관을 경주로 한 경주 정씨는 고려 때 문정공(文正公) 매포(梅圃) 정진후(鄭珍厚)를 중시조(中始祖)로 하고, 현재 문헌공파(文獻公派), 양경공파(良景公派), 월성위파(月城尉派), 평장공파(平章公派) 등 4파로 분파되어 있으며, 시조를 지백호로 하고 성을 정씨로 하였으나 본관이 다른 정씨로는 영일(迎日), 동래(東萊), 온양(溫陽), 초계(草溪), 하동(河東), 진주(晉州) 등 30여 성씨로 우리나라 모든 정씨의 대종(大宗)을 이루고 있다. 현재 경주정씨 중앙종친회에서는 1996년 지금의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 '''백운대'''를 지백호의 강림지라 여기고 이곳에 강림기적비를 세워 경주정씨의 발원지로 정하였으며, 또한 예로부터 전해내려오는 그곳의 산소를 지백호 시조 산소라 보고 주위에 추경사(追敬祠)를 짓고, 매년 음력 10월 1일 시제를 모시고 있다. == 항렬 == || || '''문헌공파'''|| '''양경공파''' || '''월성위공파''' || '''평장공파''' || ||'''66세'''||영(永)○||○해(海)||○식植||○순淳 / ○영永|| ||'''67세'''||○조(朝)||동(東)○||헌憲○||상相○ / 조朝○|| ||'''68세'''||병(炳)○||○훈(薰)||○수壽||○열烈 / ○병炳|| ||'''69세'''||○균(均)||지(址)○||용鎔○||재載○ / 균均○|| ||'''70세'''||종(鍾)○||○호(鎬)||○준準||○흠欽 / ○용鎔|| ||'''71세'''||○수(洙)||택(澤)○||병秉○||수洙○ / 홍洪○|| ||'''72세'''||낙(樂)○||○(稙)직||○환煥||○식植 / ○주柱|| ||'''73세'''||○섭(燮)||원(愿)○||○훈薰||연然○ / 훈薰○|| ||'''74세'''||경(坰)○||○채(埰)||규奎○||○봉琫 || ||'''75세'''||○옥(鈺)||일(鎰)○||○석錫||호鎬○ / 용鏞○|| ||'''76세'''||순(淳)○||○구(求)||문汶○|| || ||'''77세'''||○권(權)||락(樂)○|| || || ||'''78세'''||경(炅)○||○욱(煜)|| || || ||'''79세'''||○기(基)||준(埈)○|| || || [[분류:경주 정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