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중국 관련 문서)] ||[[파일:경서빈관.jpg]]|| || [[징시호텔]]의 2010년 모습, 현재도 영업 중이지만 아무나 들어갈 순 없다. || [목차] == 개요 == 大闹京西宾馆 1967년 1월 19일부터 1월 20일까지 [[장칭]]을 선두로 한 문혁주도파와 [[예젠잉]] 등의 [[인민해방군]] 원로들간에 벌어진 싸움. 당시 [[경서빈관]]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 도중에 벌어졌기 때문에 경서빈관 대소동이라고 한다. [[문화대혁명]] 당시 군부와 문혁소조의 사이가 얼마나 나빴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사건의 장소인 경서빈관(京西宾馆)은 [[1959년]]에 지어진 고급 [[호텔]]로, 징시호텔, 캐피털 웨스트 호텔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중국 인민해방군]] 후근부 산하 호텔[* 2017년 대개편 이후 중앙군사위원회 기관사무관리총국]로서 매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가 개최되는 곳이다. 호텔이지만 '''군사시설'''로 지정돼있기에 당연히 일반인들은 이용하기 힘들며 중국공산당 및 중국군 고위 간부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이다. == 배경 == 당시 중국은 [[장춘차오]]가 주도한 [[상하이 1월 폭풍 사건]]의 영향으로 전국 각지에서 '탈권 현상'이 만연한 상태였다. 학생들은 전국각지의 정부기관과 군부대를 공격하고 있었고 지휘관들을 납치하여 불법적으로 비판대회를 열었다. 난징군구 사령관 [[쉬스유]]도 납치되어 베이징에 압송되었는데 경서빈관에 끌려온 쉬스유는 다음과 같이 분통을 터트렸다. >"오늘 조반파들이 나, 쉬스유를 찾아왔다. 나는 한평생 혁명을 해왔다. 전쟁터에서 총칼이 숲을 이루고 총탄이 빗발쳐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늘 나를 잡아왔지만 나는 추호도 겁내지 않는다. 누가 감히 나를 잡으려 한다면 나는 누구를 막론하고 총을 쏘겠다!" 이에 베이징 위수군구사령관 푸충비, [[쉬샹첸]]이 파견되어 쉬스유를 위로하였고 [[마오쩌둥]]도 문혁소조의 [[관펑]]을 보내 경서빈관을 포위한 조반파 홍위병을 설득하게 했다. 쉬스유는 쉬샹첸을 보고 울부짖었다. >"나는 혁명을 위해 생사를 넘어들었다. 나, 쉬스유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나? 중앙이 나를 비판하면 바꿀 수 있다. 왜, 나를 잡아오나? 왜, 나를 욕보이는가?" 그런가 하면 구회작 사건이 발생, [[총후근부]] 부장 구회작이 홍위병들에게 납치되어 머리가 빡빡 깎이고 갈비뼈가 부러질 때까지 폭행당한 후 조리돌림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구회작은 마오쩌둥과 린뱌오에게 살려달라는 메시지를 버려진 담뱃갑에 써서 몰래 내보낸 덕분에 겨우 구출될 수 있었고 원수들이 차례로 그를 찾아와 위로했으며 장님이 되었던 [[류보청]]이 구회작을 껴안고 고생했다고 오열할 정도였다. 사태가 이러하니 군부의 문화대혁명에 대한 분노는 극에 달한 상태였다. 1월 1일, 중앙 군사위원회 부주석 겸 비서장, 당 정치국원 [[예젠잉]]에게는 홍위병들이 심양군구 사령부로 난입하여 군구 지도부를 조리돌리고 부사령관을 마구 구타하여 중태에 빠뜨렸다는 보고가 들어왔고 [[펑더화이]]와 [[허룽]]을 비롯한 원수들까지 비투회에 끌려다니는 판국이었다. 예젠잉은 홍위병들이 심양군구를 습격한 사건에 대해 당 부주석 겸 국방부장 [[린뱌오]]에게 보고했으나 린뱌오는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논평을 거부하며 원로들을 모아 부대에서 문화대혁명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달라는 주문을 할 뿐이었다. == 전개 == === 전군문혁소조 개조 === 한편 당시 군에서의 문화대혁명을 지휘하는 전국문혁소조는 1966년 6월 창설된 이래로 류즈젠이 소조장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장칭]]은 류즈젠이 군 원로와 결탁하여 문혁의 군대 침투를 막고 있다고 마구 비난했다. 1월 4일, 장칭은 군사학교의 조반파들을 모아놓고 "군부 내에서 부르주아 반동 노선을 실행하고 있는 것이 류즈젠의 전국문혁소조다!"라고 비판하고 전국문혁소조를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월 6일 열린 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에서 [[린뱌오]]도 장칭의 의견에 동조하여 "류즈젠은 사실상 부르주아 반동 노선을 걷는 군부 내 대리인이다. 그는 좌파가 아닌 것을 지지하고, 좌파를 공격했다."고 비난했다. 사태가 이러니 류즈젠은 전국문혁소조장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1월 6일, 총참모장 대리 [[양청우]]가 쉬샹첸에게 전국문혁소조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쉬샹첸은 "나는 오랫동안 병을 달고 살아 간부들도 잘 모른다. 아무래도 이 공작은 내가 감당할 수 없다."고 거절했지만 양청우는 "안됩니다. 이것은 장칭이 제의하고 주석이 비준한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쉬샹첸은 마오쩌둥을 만나 "주석, 이런 중요한 자리를 실제적으로 떠맡을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다른 유능한 사람을 선발하십시오."라고 청했으나 마오쩌둥은 미소를 지으며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다. 당신이 하라!"라고 강권하였다. 이로 인하여 1월 11일, 전국문혁소조가 개조되고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겸 정치국원 [[쉬샹첸]]이 소조장에 올랐다. 소조장이 된 쉬샹첸은 1월 11일 마오쩌둥이 참석한 정치국 회의에서 군대의 안정을 강조하며 "군대는 반드시 안정을 확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방의 경우, 한꺼번에 무너져 통제할 방법이 없다."라고 발언했고 [[예젠잉]]도 동조하여 "군대는 안정을 유지해야 한다. 지방이 혼란하면 혼란할수록 군대는 더욱 안정을 기해야 한다."라고 발언했다. [[주더]]도 군 내부의 혼란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이에 중앙, 국무원, 군사위원회는 연명으로 통지를 발송해 각 지역 중요시설에 대해 군사관제를 실시하고 은행은 인민해방군과 공안기관이 보호하도록 조치했다. 이어 1월 12일, 정식으로 전국문혁소조가 설립되어 쉬샹첸이 소조장, 장칭이 고문, 샤오화, 양청우, 왕신팅, 쉬리칭, 관펑 등이 부조장을 맡았으며 예췬 등 9명이 소조원이 되었다. 하지만 해군사령관 [[샤오징광]]이 조반파들에게 납치되어 톈진으로 압송되는 사건이 발생하는가 하면 [[장칭]]은 "군부 내에 있는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몇 안되는 실권파를 철저하게 폭로하라."라면서 군 원로들을 계속 공격하였다. === 1월 19일 회의 === ==== 쫓겨난 콰이다푸 ==== 그러다가 1967년 1월 19일, 경서빈관에서 군사위원회 확대회의가 개최되어 대명, 대방, 대자보, 대변론이라 하는 4대 문제를 논하게 되었다. 군부에서는 쉬샹첸, 예젠잉, 녜룽전, 천이 원수 등이 배석했고 문혁소조에서는 [[장칭]], [[천보다]], 예췬, [[캉성]], [[야오원위안]] 등이 배석했다. 회의 시작에 앞서 장칭이 시비를 걸었다. >"한가지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콰이다푸]]를 회장에 넣지 말라고 명령한 것이 누구지요?" 콰이다푸는 과거 [[류사오치]]와 투쟁했던 [[칭화대학]]의 조반파 홍위병 조직인 정강산 병단의 우두머리로 장칭과 밀접한 사이였다. 이날 장칭은 콰이다푸를 군사위원회 회의에 참석시키려 했으나 당연히 민간인인 콰이다푸는 출입을 허락받지 못하고 쫓겨난 것이었다.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겸 외교부장 [[천이]]가 자신이 했다고 나서자 장칭은 "왜 들어오도록 허락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다시 물었다. 이에 천이가 반문했다. >"장칭 동지, 나도 당신에게 묻고 싶소. 콰이다푸는 도대체 어떤 자격으로 군사위원회 회의에 참석하려는 거요?" 반박할 말이 없던 장칭이 입을 다물자 [[천보다]]가 나서 장칭을 거들었다. >"회의를 보여주고 홍위병에게 문혁경험을 쌓게 하려고 장칭 동지가 초대했소. 우리는 그를 환영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자 [[예젠잉]]이 껄껄 웃었다. >"오늘 군사위원회 확대 회의에는 군구사령, 해군사령, 공군사령은 있소. 하지만 학생사령 같은 것은 없소." ==== 샤오화를 공격하는 장칭 ==== 시작부터 망신을 당한 장칭은 회의가 시작되자 즉시 이빨을 드러냈다. 장칭은 군대라고 특수화해서는 안되며 지방과 마찬가지로 군대에서 운동을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군 원로들은 군대가 프롤레타리아 계급 독재의 초석으로 군대의 문혁과 지방은 구별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내세웠고 예젠잉은 "군대에는 군대의 규율이 있다. 지휘에 따르고, 보조를 맞추어야만 승리를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다른 원수들도 동조하여 "군대가 혼란하면 대란이 오게 된다."고 했다. 그러자 장칭은 뜬금없이 해방군 총정치부 주임 겸 전국문혁소조 부조장 샤오화를 공격했다. >"샤오화는 류즈젠의 막후인물이다. 샤오화는 총정치부 주임으로서 문건을 발송하는 데 총정치부와 군사위원회를 연결시키고 있다. 무슨 뜻인가?" 이에 예췬이 준비해둔 원고를 호주머니에서 꺼내더니 샤오화를 가리키며 비난했다. >"당신은 왜 장칭 동지를 반대하는가? 당신은 린 부주석을 반대하고 문화대혁명을 파괴하고 있다. 오늘 밤에 반드시 전군 군사학교 선생과 학생들 앞에 나아가 당신의 엄중한 잘못을 비판받아야 한다." 그러자 예젠잉이 "예췬 동지에 묻겠소. 린 부주석의 어떤 새로운 지시가 있소?"라고 빈정대자 예췬은 "누구든지 장칭 동지에 반대하면 나는 그 사람을 반대할 것이다. [[린뱌오|수장]]도 견결하게 장칭 동지를 지지한다. 장칭 동지를 학습하고, 장칭 동지에 대해 경의를 표하자!"라고 외쳤다. 모두들 일어나 구호를 따라 외쳤고 샤오화도 따라 외쳤는데 예췬이 샤오화에게 "당신은 자격이 없다."라고 제지했다. 이어 천보다가 샤오화를 공격했다. >"샤오화, 당신은 대단히 교만하다. 당신 눈에는 장칭 동지도 안중에 없다. 당신은 토호고, 전사가 아니다. 마오 주석과 린 부주석의 전사가 아니다. 당신은 해방군을 개인 군대로 바꾸고 자산계급 군대로 바꾸어버렸다. 당신의 과오는 대단히 엄중하다." 장칭이 바로 뒤이어 공격했다. >"오늘 밤 노동자 체육관에서 열리는 10만인 대회에 당신 안갈거요?" 샤오화는 "당신들 말 다했소? 내가 발언해도 괜찮겠소?"라고 한 후에 "나는 수십년간 혁명에 참가했다. 나는 공산주의를 최고의 신앙으로 여겨왔다. 마오 주석은 항상 내가 열렬하게 사랑하는 영수다. 만약 공작 중에 결점이 있고, 잘못이 있다면 나는 인정한다."라고 말했지만 장칭은 즉시 그의 말을 끊었다. >"헛소리하지 마라! 밤에 노동자 체육관에 가 10만명의 군중 앞에서 말하라!" 예젠잉은 상황이 좋지 않다고 여겨 회의장을 빠져나가 저우언라이에게 회의장의 상황을 알렸다. 저우언라이가 마오쩌둥에게 이를 보고하자 마오쩌둥은 크게 화를 내며 "이렇게 큰 일을 왜 보고하지 않았나? 빨리 제지하라. 총정치부 주임을 멋대로 비판해도 되는 일인가?"라고 했다. 저우언라이는 이를 예젠잉에게 전달하여 샤오화에 대한 공격을 중지시켰고 쉬샹첸은 회의를 끝낸 후 회의 내용을 철저히 보안에 부칠 것을 지시했다. === 1월 20일 회의 === 하지만 베이징군구 사령관 양융이 간부회의에서 회의내용을 발설하였고 총정치부 부주임 위안쯔친이 회의 내용을 기록한 필기장을 가지고 있다가 홍위병의 공격으로 필기장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에 전우문공단 홍위병들이 샤오화의 집에 쳐들어가서 난동을 부렸고 샤오화는 집을 빠져나가 서산에 있는 예젠잉의 집으로 달려가 도움을 청했다. 예젠잉은 샤오화를 집에 숨겨주었으나 이런 꼴을 당한 샤오화는 다음날인 1월 20일 회의에 지각하고 말았다. 1월 20일 오전, 전날에 이어 경서빈관에서 군사위원회 확대회의가 속개되었다. 샤오화가 보이지 않자 장칭이 "총정치부 주임이 어째서 보이지 않지? 어디로 도망갔나?"라고 낄낄댔다. 샤오화가 늦게 회의장에 나타나자 쉬샹첸이 "어젯밤 어디 갔었나?"라고 물었다. 샤오화가 자신의 집이 홍위병들의 습격을 받아 가택수색당했다는 말을 하자 쉬샹첸은 크게 화를 냈다. >"겁쟁이 같으니라고! 뭐가 겁나는가? 그들이 당신을 잡아먹기라도 하는가?" 쉬샹첸이 세게 책상을 후려쳤기 때문에 책상 위의 찻잔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쉬샹첸의 분노는 당연히 샤오화가 아니라 샤오화의 집을 습격할 것을 지시한 장칭에게 향해 있었다. 이때 천보다가 "당신, 어떻게 도망쳤소? 보아하니 어떤 사람이 보호해주었구먼. 누구요?"라고 물어왔다. 이때 예젠잉이 나서 책상을 후려치며 외쳤다. >"그가 어제 한밤중에 내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습디다. 내가 그를 거두어주었소. 샤오화는 내가 보증해온 인물입니다. 숨겨준 죄가 있으면 내가 책임지겠소!" 원수들이 이렇게 강하게 나오는 것을 보고 장칭은 기가 꺾여 더 이상 샤오화를 공격하지 않았다. 이틀 후인 1월 22일, 마오쩌둥이 군사위원회 확대 간담회를 열어 고위장령들을 접견했다. 장령들은 조반파 홍위병들에게 당한 수모에 대해 울분을 터트렸다. >난징군구 총사령관 쉬스유:"큰 모자를 씌우려고 한다. 우리는 수십년 노간부들을 이렇게 대하는 것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가?" >---- >제2포병사령부 정치위원 리톈환:"우리는 현재 근본적으로 일을 할 수 없다. 주석께서 우리가 공작을 할 수 있도록 해주시고, 잘못이 있다면 자아비판을 할 수 있게 해달라." 마오쩌둥은 여러 장령들이 조리돌림당한 것은 인격 모욕이자 비문명적 행위라고 비판하면서도 장령들에게 조반파를 지지할 것을 주문했다. == 결과 == 결국 군부의 분노가 폭발, 1월 24일 쉬샹첸은 린뱌오의 집을 찾아와 '군대는 전투대 건립을 불허한다', '군대의 혼란을 방치하지 않는다', '이른 시일 안에 조항과 규정을 만든다' 등의 8조 명령에 동의할 것을 요구했다. 린뱌오도 군부의 불만이 위험수위라는 것을 알았으며 홍위병들이 자신의 권력기반인 군부에서 너무 분탕을 친다고 여겨 쉬샹첸의 요구에 동의했다. 원수들은 마오쩌둥을 찾아가 8조 명령을 비준할 것을 청했고, 마오쩌둥은 군부에 질서를 회복할 수 있는 권한을 줌에 따라 1967년 [[3월 흑풍]] 사건이 일어난다. 이어 원수들은 마오쩌둥이 [[천보다]], [[장칭]], [[캉성]] 등을 비판했다는 것을 알고 2월 11일 회의에서 문혁파를 맹렬히 공격하는 [[2월 역류]]를 일으켰으나 마오쩌둥이 문혁파를 지지함에 따라 패배하고 실각한다. == 참고문헌 == * 산케이신문 특별취재반, 모택동 비록 上(서울: 문학사상사, 2001). * 바르바라 바르누앙, 위창건, 저우언라이 평전(서울: 베리타스북스, 2007) *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중국 공산당 역사 2권 하(서울: 서교출판사, 2014). * 현이섭, 중국지 : 마오쩌둥과 중국 혁명 평석 下, 대란대치편(서울: 인물과사상사, 2017). == 문화대혁명 중의 사건 == * [[해서파관 사건]] * [[5.16 사건]] * [[베이징 8월 폭풍 사건]] * [[경험 대교류 운동]] * [[상하이 1월 폭풍 사건]] * [[2월 역류]] * [[3월 흑풍]] * [[7.20 사건]] * [[67폭동]] * [[주중 영국 대표부 점령 사건]] * [[키신저-저우언라이 회담]] * [[571 공정]] * [[9.13 사건]] * [[닉슨-마오쩌둥 회담]] * [[비림비공운동]] * [[정돈사업]] * [[천안문 사태]] [[분류:문화대혁명]][[분류:1967년/사건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