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일본 덴노)]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AF001F 0%, #BE0026 20%, #BE0026 80%, #AF001F)" {{{#dca600 '''겐쇼 덴노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역대 일본 상황)] ----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AF001F 0%, #BE0026 20%, #BE0026 80%, #AF001F); color: #dca600" '''일본 제44대 천황[br]{{{+1 겐쇼 덴노}}}[br]元正天皇'''}}}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겐쇼 천황.jpg|width=100%]]}}} || || '''출생''' ||[[680년]] || ||<|2> '''사망''' ||[[748년]] [[5월 2일]] (향년 68세) || ||[[일본]] [[나라현]] [[헤이조쿄]][br](現 [[일본]] [[나라현]] [[나라시]]) || || '''능묘''' ||나호야마서릉([ruby(奈保山西陵, ruby=내보산서릉)])[* [[나라현]] [[나라시]] 소재] || ||<|4> '''재위기간''' ||'''{{{#dca600 제44대 천황}}}''' || ||[[715년]] [[10월 3일]] ~ [[724년]] [[3월 3일]] || ||'''{{{#dca600 일본 상황}}}''' || ||[[724년]] [[3월 3일]] ~ [[748년]] [[5월 2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휘''' ||히타카([ruby(日高, ruby=일고)], [ruby(氷高, ruby=빙고)]) || || '''부모''' ||부황 [[구사카베 황자]][br]모황 [[겐메이 덴노]] || || '''형제자매''' ||1남 2녀 중 장녀 || || '''관저''' ||헤이조쿄([ruby(平城京, ruby=평성경)]) || || '''한풍 시호''' ||'''겐쇼 덴노([ruby(元正天皇, ruby=원정천황)])''' || || '''화풍 시호''' ||일본근자고단정족희천황[br](日本根子高瑞淨足姬天皇)[* 야마토네코타마미즈키요타라시히메노스메라미코토] || || '''연호''' ||레이키([ruby(靈龜, ruby=영귀)], [[715년]] ~ [[717년]])[br]요로([ruby(養老, ruby=양로)], [[717년]] ~ [[724년]])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일본의 제44대 천황. 나라 시대 두 번째 군주이자, 여섯 번째 여성 천황이기도 하며, 어머니 [[겐메이 덴노]] 바로 뒤에 여성 천황으로 즉위했다. 이름은 히타카(日高, 氷高)였다. == 행적 == 어머니인 [[겐메이 덴노]]로부터 양위를 받아 즉위했다. [[몬무 덴노]][* 겐쇼 덴노에게는 남동생이 된다.] 사후 황위는 본래 그의 아들 오비토 황자([[쇼무 덴노]])가 이어야 했지만 황자의 나이가 너무 어려 오비토의 할머니인 [[겐메이 덴노]]가 대신 즉위했다. 그리고 오비토는 겐쇼 덴노가 즉위한 후 황태자로 봉해졌다. 천황 재위 도중인 717년 '요로'(養老)로 개원했으며, 어머니 겐메이 상황의 마음에 따라 [[나가야 왕]]을 우대신으로 임명하고, 717년 10월에는 후지와라노 후사사키(후히토의 차남, 북가)를 내신으로 삼아 후사사키 체제를 구축했다. 또한 [[후지와라노 후히토]]에 의한 '''《요로 율령》''' 편찬과 [[토네리 친왕]] 등에 의한 '''《[[일본서기]]》'''의 완성도 보았으며, 토지 확보 계획을 발표하고 구체적인 실행을 위해 '''<삼세일신법>'''을 시행하기도 했다. 《[[만요슈]]》에는 겐쇼 덴노가 직접 지은 노래가 실려 있다. 겐쇼 덴노는 747년 병에 걸려 투병 생활을 하다가 748년 60대의 나이로 붕어했다. == [[신라]]와의 공방전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 《[[삼국사기]]》와 《[[해동제국기]]》에는 이 당시 신라 왕인 [[성덕왕]]과 서로 공수를 주고 받았다는 기록이 각각의 입장에서 실려있다. >겐쇼 덴노(元正天皇) 4년(서기 720년, 신라 [[성덕왕]] 14년) > >4년 경신에 신라가 서쪽 변방을 와서 쳤다. (四年庚申。新羅來伐西鄙) > >- 《[[해동제국기]]》 《[[해동제국기]]》에 따르면 720년, 신라가 서일본 변방을 공격했다고 전하고 있으나 《[[삼국사기]]》에는 관련 내용이 안나온다. >[[성덕왕]](聖德王) 30년(서기 731년) > >일본국 병선 300척이 바다를 건너 우리의 동쪽 변경을 습격했는데, 왕이 장수를 시켜 군사를 내어 이를 크게 깨뜨렸다. (日本國兵船三百?, 越海襲我東邊, 王命將出兵, 大破之.) > >- 《[[삼국사기]]》 731년, [[일본]]에서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지휘하에 300척의 군함이 쳐들어왔으나 곧바로 신라군이 격퇴했다.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의 원인이 된 '''왕성국 사건'''도 734년에 벌어졌는데, 일본에 보낸 신라 사신이 스스로 '''왕성국'''(王城國)에서 왔다고 말한 것이다. 《[[상서|서경]]》, 《[[주례]]》 등 옛 유교 경전에서 말한 세계관에 따르면 >'''왕성(수도 궁성) - 왕기(수도 근처) - 6복(지방 = [[9주 5소경]]) - 번국(외부 이민족 제후국)의 순서로 주종관계의 체계가 있다''' 고 했는데 여기서 '''신라가 왕성국이라면 일본은 [[번국]]이라는 뜻'''으로 해석될 여지가 컸다. 이에 분노한 일본은 무례하다고 하며 사신을 쫓아 버렸다. 왕성국 사건은 앞서 신라가 일본의 침공을 손쉽게 격퇴했다는 자부심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규슈]](九州) [[미야자키 현]](宮崎県) 난고손(南鄕村)에 있는 미카도 신사(神門神社)에 전해 내려오는 《능백묵서》(綾布墨書)에 따르면, 백제 왕 [[부여풍]](扶餘豊)[* [[의자왕]]의 아들로 백제부흥운동 주도자 중 한 사람]의 아들 부여사(扶餘絲)를 비롯한 일가가 [[나라 현]]에 정착했으나, 일본 내 정쟁에 휘말려 부여사의 손자로 추정되는 [[정가왕]](禎嘉王)이 나라 현에서 규슈 미야자키 현 일대로 이주한 뒤, '''[[백제]][[왕]]'''을 칭하며, [[연호]]를 '정거'(定居)라 했다고 한다. 당시 정가왕은 미야자키에 정착한 뒤 지역민들에게 불교 신앙과 건축술, 농업 등을 전파했다. 그러나 718년경에 '''나당연합군 또는 신라군이 미야자키 현을 침공'''하여, 정가왕과 둘째 아들 화지왕은 백제 유민들 및 토착 지역민들과 함께 힘을 합쳐 저항했으나 결국 패배하여 전사했다고 한다. 이 전투가 《[[해동제국기]]》에서 언급된 신라의 720년 일본 서쪽 변방 공격과 연관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만약 718년과 720년의 신라에 의한 일본 침공이 사실이라면 731년의 일본군 병선 300척의 공격은 그에 대한 보복 공격일 수도 있다. == 가족관계 == * 아버지 : [[구사카베 황자]](草壁皇子, 662~689) - 존호는 오카노미야 어우 덴노(岡宮御宇天皇) * 어머니 : [[겐메이 덴노|아헤노 황녀]](阿陪皇女) * 남동생 : [[몬무 덴노]](文武天皇) * 조카 : [[쇼무 덴노]](聖武天皇) * 여동생 : 키비 내친왕(吉備内親王, ?~729) - [[나가야 왕]](長屋王)의 비妃 [각주] [[분류:여성 천황]][[분류:일본 상황]][[분류:680년 출생]][[분류:748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