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 게오르크 칸토어}}}[br]Georg Cantor'''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568px-Georg_Cantor_(Porträt).jpg|width=100%]]}}} || || '''본명''' ||게오르크 페르디난트 루트비히 필리프 칸토어[br]Georg Ferdinand Ludwig Philipp Cantor|| ||<|2> '''출생''' ||[[1845년]] [[3월 3일]][* [[율리우스력]]으론 2월 19일.]|| ||[include(틀:국기, 국명=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2> '''사망''' ||[[1918년]] [[1월 6일]] (향년 72세)|| ||[include(틀:국기, 국명=독일 제국)] [[할레]]||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독일)]|| || '''직업''' ||수학자|| || '''학력'''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br][[베를린 훔볼트 대학교]]|| || '''소속''' ||할레 대학교|| || '''수상''' ||실베스터 메달 {{{-2 (1904)}}}|| || '''가족''' ||배우자 ^^(1874년 결혼)^^|| || '''종교''' ||[[기독교]]([[개신교]], [[루터회]])||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Georg_Cantor3.jpg|width=300&height=463]]|| || 젊은 시절의 모습. || [목차] [clearfix] == 개요 == > '''수학의 본질은 그 자유로움에 있다''' > ''Das Wesen der Mathematik liegt in ihrer Freiheit'' >---- >그의 묘비명 19세기에 활동한 [[독일계 러시아인]] 출신의 독일 [[수학자]]. [[집합론]]의 창시자이자, [[무한]] 개념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의 선구자로 유명하다. == 생애 == 칸토어는 [[1845년]] [[3월 3일]] (율리우스력 2월 19일)에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살던 독일인 부모 밑에서 6형제 중 첫째로 태어났다. 그 후, 독일에서 칸토어는 수학자 레오폴트 크로네커(Leopold Kronecker) 등의 지도를 받으며 수학 연구에 전념하게 되었고 1867년 [[베를린대]]에서 [[정수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또한 크로네커[* [[크로네커 델타]]의 그 크로네커다!] 등의 도움으로 독일 [[할레 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된다. 1874년에 발리 구트만과 결혼하여 슬하에 6명의 자녀를 두게 된다. 곧 그의 흥미는 집합과 무한에 관한 내용으로 돌아갔는데, 특히 무한에 관한 주장 때문에 여러 수학자들에게 비판을 받은 바 있다. 철저한 유한주의를 고수하던 지도교수 크로네커는 그를 고깝게 여겼는지 칸토어가 [[베를린대]]에서 교수직을 얻는 것을 막았다고 하며, 이외에도 [[앙리 푸앵카레]] 등 직관주의자[* 원자 개념에도 극도의 반대입장이었다. 그들의 공격에 칸토어는 정신병에 시달리고, 볼츠만은 자살할 정도였다.]들은 칸토어의 무한집합론을 '''수학적 질병'''이라며 강하게 비판하였다. 이러한 상황 탓인지 칸토어가 앓던 정신질환은 나날이 심해졌다. 할레 대학에서 교수로 있던 동안 칸토어는 [[우울증]] 비슷한 증세를 보이며 수년 주기로 입원, 복귀를 반복했다. 급기야 [[윌리엄 셰익스피어|셰익스피어]]의 정체가 [[프랜시스 베이컨]]이었다는 설에 집착하여 강의에서 이런 소리만 주구장창 늘어놓는다든지, 중상모략을 당하고 있다며 대학에 이상한 편지를 보낸다든지 등의 이상행동을 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할레 대학측은 [[대인배]]스럽게 칸토어가 교수직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래서 이런 와중에도 칸토어는 [[대각선 논법]]을 발표하고 집합론을 정립하는 등 여러 업적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칸토어는 궁핍과 영양 부족에 시달렸고, [[1918년]] [[1월 6일]] 정신병원에서 사망했다.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는 병원에서 내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 주요 업적 == 칸토어의 주요 업적으로는 수학에 [[집합]] 개념을 도입한 것과 동시대 수학자 리하르트 데데킨트(Richard Dedekind)와 더불어 [[실수(수학)|실수]] 개념의 엄밀한 정의, 그리고 당대 수학자들이 기피하던 무한에 대한 적극적인 탐구로 볼 수 있다. 칸토어는 일대일 대응의 개념을 통해 집합의 크기, 즉 원소의 개수를 정의했고, 이에 따라 무한집합도 그 크기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실제로 그는 자연수와 짝수, 유리수는 그 개수가 같지만, 실수는 자연수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 증명에서 그는 유명한 [[대각선 논법]]을 개발했다. 말년에 그는 [[연속체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독일의 수학자 [[힐베르트]]는 칸토어를 존경하여, "우리를 위해 칸토어가 만들어 준 이 낙원에서 그 누구도 우리를 내쫓을 수는 없다."라고 말하며, 1900년에 열린 국제수학자회의에서 앞으로 해결해야 할 [[힐베르트의 23가지 문제|중요한 문제 23개]] 중에서 첫 번째로 이 [[연속체 가설]]을 제시할 정도였다. 그 뒤 이 문제는 1938년에 [[쿠르트 괴델]]이 연속체 가설은 ZFC와 무모순임(즉, 반증 불가능)을 증명하고, 1963년에 [[폴 코언]]이 가설의 부정이 ZFC와 무모순임(즉, 증명 불가능)을 증명했다. == 관련 문서 == * [[집합론]] * [[해석학(수학)|해석학]] * [[연속체 가설]] [각주] [[분류:독일의 수학자]][[분류: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 인물]][[분류:1845년 출생]][[분류:1918년 사망]][[분류:ETH 출신]][[분류:베를린 훔볼트 대학교 출신]][[분류:독일의 루터교회 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