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회원수정2)] ||<-3> {{{#d7d700 {{{+1 '''가즈니 왕조'''}}}[* '가즈나 왕조'라고도 칭한다.] [br]'''غزنویان'''[br]''Ghaznaviyān''}}} || ||<-3> [[파일:가즈니 왕조 국기.svg|width=60%]] || ||<-3> '''{{{#d7d700 국기}}}''' || ||<-3> '''위치''' || ||<-3>{{{#!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220px-Ghaznavids1028.png|width=100%]]}}}|| ||<-3> '''977 ~ 1168''' || ||<-2>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2> '''[[사만 왕조|{{{#ffffff 사만 왕조}}}]]''' || '''[[셀주크 제국|{{{#00bbf2 셀주크 제국}}}]]''' || ||<-2> '''[[사파르 왕조|{{{#ffffff 사파르 왕조}}}]]''' || '''[[고르 왕조|{{{#ffffff 고르 왕조}}}]]''' || || '''수도''' ||<-2>[[가즈니]](977년 ~ 1163년)[br][[라호르]](1163년 ~ 1186년) || || '''정치 체제''' ||<-2>[[전제군주제]] || || '''국가원수''' ||<-2>[[술탄]] || || '''주요 술탄''' ||<-2>[[술탄 마흐무드]](998~1030) || || '''언어''' ||<-2>[[페르시아어]], [[튀르크어족|튀르크어]] || || '''민족''' ||<-2>[[페르시아인]], [[튀르크인]] || || '''종교''' ||<-2>[[이슬람]] [[수니파]] || [목차] [clearfix] == 개요 == ||[[파일:one-of-two-early-12th-century-minarets-built-1128240.jpg|width=100%]]|| || 수도 가즈니에 남아있는 탑의 장식부 || [[아프가니스탄]]을 기반으로 [[북인도]]를 지배한 첫번째 [[이슬람]] 왕조. == 역사 == 아프간 지역의 가즈니를 수도로 하여 A.D.977년에 건국되었다. 창건자 사부크티긴의 치세에 카불 샤히[* [[아프간]] 계통 토착 세력.]와 힌두 연합군을 격파하고 [[페샤와르]]를 점령하여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대부분을 점령했다. 그는 이후 자신의 명목상의 주군인 이란계 제국 [[사만 왕조]]의 내전 진압 요청에 응해 이에 참여하며 힘을 길렀고, 일시적이나마 호라산을 장악했다.[* 이후 가즈니 왕조와 사부크티긴, 그의 후계자 마흐무드는 모두 북인도 공략에 집중했기에 피폐해진 이란 고원 본토를 대신하여 이란 전체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된 호라산을 장기간 유지하지는 못했다. 호라산은 이란계 제국인 [[부와이 왕조]]에게 공략되었다가 뒤이어 중동으로 진압한 튀르크계 제국 [[셀주크 제국]]의 손에 떨어졌으며 이후 장기간 셀주크 제국의 영역이 되었다.] 가즈니군은 사부크티긴의 아들인 술탄 마흐무드의 지휘하에 1010년부터 1025년까지 북인도에 대해 쉼없이 17차례의 원정을 감행하여 700년이 넘게 지속되는 북인도에 대한 이슬람 왕조의 지배의 초석을 다졌다. === [[술탄 마흐무드]]의 인도 원정 === [[파일:Mahmud_in_robe_from_the_caliph.jpg|width=400]] 1010~1012년, 1014년, 1018~1019년, 1024년에 대규모 원정이 이루어졌고 수많은 [[힌두교]] 유적이 파괴되었다. 1018년부터 [[힌두스탄]]을 파고든 마흐무드의 파죽지세 앞에 [[바르다나 왕조]](하르샤 제국) 이후로 8~10세기 동안 북인도의 패권을 쥐고 있었던 [[프라티하라 왕조]]가 1019년에 멸망했고, 가즈니 왕조는 벵골의 불교왕국인 [[팔라 왕조]]와 대치하게 되었다. 특히 1024년의 원정에서는 서북 인도의 힌두교 중심지인 솜나스가 파괴되었으며, 50,000여 명의 인도인들이 학살되었고, 마흐무드는 엄청난 양의 보물을 손에 넣었다. 술탄 마흐무드는 점령지의 주민들에게 높은 세금을 매기고 주민들의 재산을 강탈하며 군대의 봉급을 거의 약탈로 조달하고 무역로를 봉쇄한 사악한 파괴자로 악명높았다. 그가 칭기즈칸보다 나은 점이라고는 칭기즈칸의 몽골 군대가 점령지의 저수지와 관개시설까지 모조리 파괴해 비옥한 땅들을 사막으로 만들어버린 것과 다르게 술탄 마흐무드는 점령지의 농민들에게 중과세를 매기느라, 혹은 점령을 포기한 지역에서는 다시 도시를 건설하면 약탈하러 오겠다며 관개시설을 파괴하지 않고 유지시켰다는 점이다. 술탄 마흐무드는 400여 명에 달하는 어용 시인들을 고용하여 자신을 찬양하는 시 등을 짓게 했지만 소용없었다.[* 술탄 마흐무드가 고용한 시인 중에서 후대에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인물은 아첨시를 쓰던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술탄 마흐무드에게 이런저런 비판과 불평을 남겼던 [[피르다우시]]였다.] 그에게 봉급을 받던 역사학자 [[https://en.wikipedia.org/wiki/Abu%27l-Fadl_Bayhaqi|아볼 파즐 베이하키]]라는 페르시아인은 술탄 마흐무드가 사망한 후에 쓴 역사서에 마흐무드가 남성 노예 애인을 둔 [[양성애자]]로 주변 관료들이 그의 애인을 변태라고 무시한 사실이나, 니샤푸르에서 마흐무드가 세금을 지나치게 많이 수취하여 주민 수만여 명이 굶어죽은 일, 그리고 [[호라즘]] [[우르겐치|구르간지]]의 도서관을 약탈하고 학회를 박살냈다는 사실을 기록한 후 다음과 같은 첨언을 남겼다. >"이러한 말들을 쓰는 것이 내게도 편치 않지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역사를 쓸 때 편파성을 보여서는 안 된다." === 마흐무드 사후 === 1030년, 마흐무드의 죽음 이후 가즈니 왕조는 급속도로 쇠퇴했다. 가즈니 왕조의 군대와 궁전, 대학을 유지하는데는 엄청난 비용이 들었고 이 돈은 술탄 마흐무드의 군대가 외국에 원정나가 있는 동안 약탈한 보물들로 충당되었다. 마흐무드의 아들 마수드는 사냥을 할 때 음악가들을 대동하고, 자신이 말을 타고 가젤을 사냥할 때는 음악가들에게 [[배경음악]]을 연주하라 시켰다고 한다. 현대 비디오게임 배경음악을 중세시대 때 재현하는 등등의 행동을 보면 그의 궁전에서 상당한 규모의 지출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트란스옥시아나]]의 신흥 세력인 [[셀주크 제국]]에게 [[단다나칸 전투]]에서 대패하고(1043) 호라산의 패권을 잃었다. 그래도 11세기 동안은 셀주크의 서진에서 비껴난 채로 인도 내에서는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였다. 특히 [[가즈니의 이브라힘]] 시기에는 나름 셀주크 제국과 한판 겨루어 보기도 하였고 지속적으로 북인도를 침공하여 말와의 파라마라, 카나우지의 가하드발라 등과 대적하였다. 그러나 12세기 바흐람 샤의 치세에 가즈니 조는 셀주크 제국에 복속하는 등 약화되었고, 1152년 기존의 속국 [[고르 왕조]]에게 수도 가즈니를 점령당한 후에는 아프간을 포기하고 펀자브의 [[라호르]]로 천도하였다. 라호르로 이전한 후 힌두 세력들을 공격하여 북인도에서 제국을 재건하려 했으나, (이는 [[금나라]]가 몽골에게 화북을 잃고 [[남송]]을 공격한 것과 유사하다) 약화된 국력으로는 제한된 성과만을 얻을 수 있었다. 최후의 군주 쿠스라우 말리크는 갖은 노력에도 1186년 [[무함마드 고리]]에게 라호르를 넘기고 항복하였고, 고르에 감금되었다가 1191년 처형되었다. == 여담 == 가즈니 왕조의 전성기는 벵골의 [[팔라 왕조]]와 남인도의 [[촐라 제국]]의 전성기와 다소 겹친다. == 역대 군주 == [include(틀:역대 가즈니 군주)] == 둘러보기 == [include(틀:인도의 역사)] [include(틀:이란의 역사)] [include(틀:아프가니스탄의 역사)] [[분류:아프가니스탄의 역사]][[분류:이란의 역사]][[분류:인도의 역사]][[분류:역사적 이슬람 국가]][[분류:아시아의 술탄국]][[분류:튀르크]][[분류:12세기 멸망]][[분류:인도-아프가니스탄 관계]][[분류:이란-인도 관계]][[분류:이란-아프가니스탄 관계]][[분류:옛 페르시아어권 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