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기원전 1세기 집정관]][[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1세기)] ||||<#800080> {{{#ffffff {{{+3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br]{{{-1 [[라틴어]]: Gaius Cassius Longin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미상 || ||<#800080> {{{#ffffff '''지위''' }}} ||[[노빌레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국]] || ||<#800080> {{{#ffffff '''가족''' }}}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조부)[br][[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기원전 107년 집정관)|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아버지)[br]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형제)[br][[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아들?)[br][[퀸투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아들?)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73년 || ||<#800080> {{{#ffffff '''전임''' }}} ||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br][[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기원전 74년 집정관)|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 ||<#800080> {{{#ffffff '''동기''' }}} ||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 루쿨루스]] || ||<#800080> {{{#ffffff '''후임''' }}} || [[루키우스 겔리우스]][br][[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클로디아누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생애 == 기원전 2세기부터 로마 정계에서 활동한 [[노빌레스]] 가문인 카시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루키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학자들은 기원전 107년 집정관으로 [[킴브리 전쟁]]에서 전사한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기원전 107년 집정관)|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그의 아버지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형제로 기원전 89년 [[호민관]]을 역임한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있었다. 기원전 83년 화폐 주조관을 맡았으며, 기원전 76년 이전에 [[법무관]]을 역임한 뒤 기원전 73년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 루쿨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두 집정관은 국가에서 빵을 구매하고 빈민들에게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하는 <테렌티우스와 카시우스의 법(Lex Terentia et Cassia)>을 반포했다. 연말에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의 총독으로 부임했으나, 곧 심각한 위협에 직면했다. 이탈리아 남부에서 시작된 [[제3차 노예 전쟁]]이 그곳까지 확대된 것이다. 기원전 72년 봄, [[스파르타쿠스]]가 이끄는 노예 반란군이 아이밀리아 가도를 따라 포 강 계곡에 침입했다. 그는 2개 군단을 이끌고 이들을 막았지만 패배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완전히 패배해 대다수 병력을 잃고 간신히 탈출했다고 한다. [[파울루스 오로시우스]]는 그가 전사했다고 기술했지만, 학계에서는 신빙성이 없다고 본다. 스파르타쿠스는 갈리아 키살피나 전역을 휩쓸며 신병을 확보하고 물자를 수집한 뒤 이탈리아 남부로 이동했다. 기원전 70년, 그는 가이우스 베레스의 재판에 증인으로 참석했다. 기원전 66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수행하게 하자는 호민관 가이우스 마닐리우스의 법안을 지지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일부 학자들은 그의 아들이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의 주동자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라고 주장하며, 또다른 학자들은 [[카이사르의 내전]] 때 카이사르를 지지하며 함께 싸웠던 [[퀸투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그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기록이 미비하기 때문에 두 사람 중 누가 그의 아들인지, 아니면 둘 다 그의 아들인지는 분명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