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기원전 1세기 집정관]][[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1세기)] ||||<#800080> {{{#ffffff {{{+3 '''가이우스 카리나스''' }}}[br]{{{-1 [[라틴어]]: Gaius Carrina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국]] || ||<#800080> {{{#ffffff '''가족''' }}} ||가이우스 카리나스(아버지)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43년 || ||<#800080> {{{#ffffff '''전임''' }}} || [[옥타비아누스]][br][[퀸투스 페디우스]] || ||<#800080> {{{#ffffff '''동기''' }}} ||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 || ||<#800080> {{{#ffffff '''후임''' }}}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br][[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생애 == 아버지는 [[플레브스]] 출신으로 기원전 82년 [[법무관]]을 역임한 가이우스 카리나스였다. 그는 [[술라의 내전]] 시기 술라를 대적하는 군대를 이끌었으나 콜리네 성문 전투에서 패배한 뒤 생포된 후 참수되어 수급이 [[소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술라군에게 포위된 채 항전 중이던 프라이네스테로 보내지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 후 술라에 의해 정치 참여가 금지된 채 근근히 살아가던 그는 술라가 사망한 후 모종의 시기에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네포스(기원전 57년 집정관)|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네포스]]와 친분을 맺었다. 기원전 54년 네포스가 숨을 거두었다. 그는 자녀가 없었기에 친척들이 재산을 물려받을 듯했지만, 유언장에서 다른 친척을 제쳐놓고 카리나스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주겠다고 밝혔다. 그 후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하자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편에 섰고, 기원전 46년 법무관을 맡아 카이사르의 히스파니아 원정에 참여했으며, [[문다 전투]] 이후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잔여 세력을 규합해 게릴라 전을 벌이는 것을 제대로 막지 못했고, 카이사르에 의해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로 교체되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졌다. 그 후 그는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지명된 [[옥타비아누스]]의 후원자가 되었다. 기원전 43년 11월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군대가 로마를 점령한 후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와 함께 보결 집정관으로 선임되어 삼두의 이익을 대변했다. 기원전 41년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부임했고 아프리카 [[마우레타니아 왕국]]의 [[보구드]]가 [[페루시아 내전]]에서 옥타비아누스를 대적하ㅓ고 있떤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의 부추김에 따라 히스파니아를 쳐들어오자 이에 맞섰다. 기원전 39년 로마로 돌아왔고, 기원전 36년 옥타비아누스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토벌하기 위해 단행한 [[시칠리아 내전]]에 참여했다. 그는 함대와 수송선을 이끌고 시칠리아 해안으로 향하다가 타우로메니아에서 적 함대의 기습을 받고 크게 패했지만, 함대를 수습한 뒤 3개 군단을 리파리 섬으로 수송했다. 기원전 30년 갈리아 코마타("장발의 갈리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을 통해 정복한 갈리아 일대) 총독에 부임해 모리니 족의 봉기를 진압하고 로마령 갈리아를 공격한 수에비족을 라인 강 너머로 몰아냈다. 기원전 28년 로마로 귀환하여 [[개선식]]을 거행했지만,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