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기원전 2세기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2세기)] ||||<#800080> {{{#ffffff {{{+3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루스''' }}}[br]{{{-1 [[라틴어]]: Gaius Sulpicius Gall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파트리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정]] || ||<#800080> {{{#ffffff '''가족''' }}}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루스(기원전 243년 집정관)|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루스]](조부)[br]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루스(아버지)[br]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루스(아들)[br]퀸투스 술피키우스 갈루스(아들)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166년 || ||<#800080> {{{#ffffff '''전임''' }}} || [[퀸투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br][[마르쿠스 유니우스 펜누스]] || ||<#800080> {{{#ffffff '''동기''' }}}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기원전 166년 집정관)|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 ||<#800080> {{{#ffffff '''후임''' }}} ||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기원전 165년 집정관)|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br][[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기원전 165년 집정관)|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생애 == [[파트리키]] 가문인 술피키우스 씨족의 일원으로, 조부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루스(기원전 243년 집정관)|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루스]]는 기원전 243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아버지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루스는 기원전 211년 [[법무관]]을 역임했다. 그는 기원전 191년~190년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 휘하 군대에 들어가 먼 히스파니아 속주에서 활동했고, 그 과정에서 파울루스와 친분을 맺었다. 기원전 182년 파울루스는 리구리아인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원로원에 승리를 알리는 역할을 그에게 맡겼다. 기원전 169년 로마 시의 사법 재판을 관장하는 [[법무관]]에 선임되었고, [[아폴로]]를 기리는 경기를 조직했다. 당시엔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는 동료 법무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기원전 166년 집정관)|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함께 당해 집정관 [[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기원전 186년 집정관)|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와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기원전 169년 집정관)|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가 군대를 부정직하게 관리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자신들에게 군대 소집권을 달라고 요청했다. 원로원은 이를 받아들여 두 사람이 병력을 모집하게 했다. 기원전 168년, 그는 파울루스 휘하 [[트리부누스 밀리툼]]을 맡아 마케도니아 원정에 착수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에 따르면, 결정적인 전투인 [[피드나 전투]] 전날 [[월식]]이 발생해 로마 병사들이 겁에 질렸을 때, 그는 파울루스의 지시를 받고 병사들에게 월식이 자연 현상일 뿐 불길한 징조가 절대로 아니라고 설명해 안심시켰다고 한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갈루스는 일식을 예측하고 군대에 미리 알려줬다고 한다. 병사들은 이에 용기를 얻어 피드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기원전 167년, 그는 그리스를 순행하는 파울루스를 호위하는 군대를 이끌었다. 기원전 166년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기원전 166년 집정관)|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동료 집정관 마르켈루스가 알프스 산맥에 거주하는 [[켈트족]]을 상대로 승리하는 동안, 그는 리구리아인을 상대로 승리했다. 두 사람은 로마로 귀환한 뒤 동시에 [[개선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164년 스파르타와 메갈로폴리스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기 위해 그리스로 갔고, 뒤이어 아시아로 가서 [[페르가몬 왕국]]의 [[에우메네스 2세]]와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4세]]가 로마에 대항하는 동맹을 준비하고 있는지를 조사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그는 에우메네스 2세에 대한 경박함과 적대감을 보여줬고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고 한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키케로에 따르면, 그는 로마 귀족 중에서 그리스 문학을 가장 깊이 연구했으며, 섬세한 취향과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으로 두각을 나타냈다고 한다. 그는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가 인용한 [[천문학]]에 관한 작품을 집필했다고 전해지나 현존하지 않는다. 키케로에 따르면, 갈루스는 청소년기에 장남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루스를 잃었다고 한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첫번째 아내가 머리를 가리지 않은 채 문간에 서 있다는 이유로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고 한다. 늘그막에 낳은 또다른 아들 퀸투스 술피키우스 갈루스는 아버지가 사망한 뒤 기원전 144년 집정관이며 탁월한 웅변가로서 명성을 날렸던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기원전 144년 집정관)|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에게 양육되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