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훈구파 (문단 편집) === [[세조(조선)|세조]] ~ [[성종(조선)|성종]] 시기 === 훈구파의 정치적 성향은 이들은 절대적 왕권을 숭상한 왕당파였다. 그리고 대부분 관학파 출신의 관료인 덕이고 세조의 탈성리학적 성격으로 계유정난을 도운 자신의 노비들도 등용시켰고 이를 반대하지 않았다. 당시 '실학'이라는 학문으로 명명하지 않았을 뿐이었지 사법 체계, 경제 체제, 과학기술, 군사적 개혁으로의 국내 착호정책[* 호랑이를 토벌하여 북쪽으로 쫓아내는 정책. 당시 조선은 너무 많은 호랑이의 개체 수로 많은 백성들이 피해를 봤다] 대외 정벌사업으로의 식민지 개념의 확보 등으로의 실학주의 사상을 주류로 여겼다. 법 체계에 대해서 매우 관심이 많아 세조 대에 새로 개정한 법전을 추진, 성종 때에 법전인 경국대전을 지어 법을 세우는 큰 업적을 보인다. 게다가 [[성종(조선)|성종]] 대에는 성종이 추진하려는 중인계급 폐지와 기존 중인계급들의 양반 편입 정책에 대해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등 유연한 사회적 법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외교적 성향에선 관학파들의 대명 외교 방식은 '겉으론 숭상, 안으론 실리 추구'였지만 세조와 훈구 신하들은 민족주의적 정신을 고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조는 고구려 역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기록되어있다. --통일 중원국가인 명나라 앞에서 고구려 덕질 ㄷㄷ--] 명나라를 견제하기 위해서 대국의 예는 매우 형식적으로 수행하고 실제로는 대놓고 [[환구단]]을 만들어서 제사를 지내거나[* [[환구단]]이란 천지신명인 하늘에게 제사를 올리는 것인데 이는 말 그대로 하늘의 아들인 천자의 나라 명나라 혼자만 올릴 수 있었고 주변 조공국들은 권한이 없었다. 그런데 조선이 그런 성대한 제사를 올린다는 것은 세조와 훈구파의 강력한 민족적 독립성의 고취를 표현한다.] 군사적 성향에서는 세조의 성향대로 화끈하게 밀고들어가는 성향을 지니게 되었다. 세종 대와 문종 대에 개발한 신 무기 체계와 전략 체계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고구려 시절의 조상들의 영토인 요동 정벌 정책을 다시 추진하자고 하는 등 자주성을 표방하고 [[홍윤성]] 등으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간도의 여진족과 왜구들을 토벌하여 안보 안정화에 큰 기여를 하였다.[* 이는 당시 명나라가 [[토목의 변]]에서 [[탈문의 변]]으로 이어지는 내외적 혼란기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북로남왜]] 항목도 참조.] 내무적 성향에서는 세조 때부터 [[성종(조선)|성종]] 때까지의 교육과 문화 사업 정리가 이들의 주도하에 이루어지고, 상공업을 육성해서 시장이 확장되고 농지를 확대하는 과정에서 해안 간척지가 늘어나는 등의 공이 있다. 하지만 간척지마저도 여기에 들어가는 노동력은 내수사와 이에 딸린 소작농들을 동원해서 나왔고, 이렇게 늘어난 토지는 다시 고리대에 이용되는 등 이들이 부를 축적하는 동시에 민생을 어지럽혔기에 민생은 어려워졌으며, 조정에서 은퇴한 훈구 관료들이 유향소 직원으로 내려오는 등 지방 중소 지주 세력에 대한 압박이 심해졌다. 또한 훈구파와 비교해 사림파가 더 성리학 원리주의적으로, 비현실적이고 이상에 집착한다는 편견이 있었지만 사실 성종 시절이 되면 훈구파도 사회적으로 신분 차별을 공고히 하는 등 보수적인 색이 굉장히 강해지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유교가 사회문화 전면에 등장한 것이 이때로, 열녀문/효자문을 세워 요역과 잡세를 면천시켜주는 정문/복호가 대대적으로 실시된 것도 이 때다[* 이 때문에 사칭 사례도 빈번히 발생했다.]. 또한 천민의 면천을 쉽게 해주지 않으려는 분위기도 강했는데, 심지어 기근 중에 곡식을 바치거나[* [[http://sillok.history.go.kr/id/kia_11607024_001|진천에 사는 사노(私奴) 임복(林福)이 곡식 2천 석을 바친 일]]이 있었는데, 한명회는 이에 찬성했지만 심회는 반대하거나 노사신은 가족을 전부 면천시키면 안된다는 등, 내부에서도 반대가 있었다. 끝내 성종이 면천시켜주긴 했지만 결국 납속 정책을 재검토하게 된다.] 살인사건의 범인을 알리면 성종이 직접 면천시켜주겠다는 것을 [[노사신]]이 반대하는 일[* 심지어 "살인범은 못 잡아도 되지만, 강상이 허물어지는 건 나라에 해가 된다"라는 말까지 했다. 이 살인사건에 대해서는 [[창원군]] 항목 참조.]도 있었다. 그렇다고 면천된 노비들에게 제대로 양인 대우를 해준 것도 아닌 것이, 양인이 되었다 한들 갑사가 되지 못하게 만드는 등(현대로 치면 군 간부에서 자동으로 떨어트리는) 차별을 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며 훈구파에는 크게 두 가지 파벌이 생성된다. 한명회, 신숙주로 대표되는 정난공신파와 이후 이징옥 이시애의 난에서 공을 세운 신공신파로 나뉜다. 정난공신파의 등쌀에 시달린 세조가 단종 사사후에 의도적으로 훈구파들을 길들이기 위해서 신공신파를 지지해준다. 신공신파의 대표 인물이 남이, 박원종이다. 예종 즉위 직후 남이가 역모로 몰려 죽은 것과, 예종 승하 후 예종의 적자 제안대군과 세조의 장손 월산대군이 모두 임금이 되지 못한 대신 성종이 왕이 된 것은 정난공신파의 입지를 재차 다지기 위함이었고[* 성종은 한명회의 사위였다. 예종이 중용한 인물인 월산대군의 처남 박원종도 신공신파다.], 성종도 그 은혜가 있기 때문에 정난공신파를 구태여 건들지 않아 성종기까지는 그럭저럭 연착륙에 성공한다. 또한 훈구파는 계파갈등이 여러차례 있었는데 세조 초반 때 있던 집현전계와 정난계의 갈등도 있었다. 집현전계는 세종 때부터 관료였던 자들이 많았고, 정난계는 세조의 즉위를 도운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예종 때의 구공신파와 신공신파는 물론이거니와, 성종 때도 훈구파 내 계파갈등이 있었는데 5대 공신 세력(정난, 좌익, 적개, 익대, 좌리)과 일부 적개공신과 성종의 총신들이 합쳐서 결성한 왕실 친위세력 간의 갈등이 있었다. 그리고 연산군 때도 연산군과 거리를 둔 부중파와 연산군 친위파인 궁중파가 나뉘어서 대립하는 경향이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