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연 (문단 편집) === 폭정과 멸망 === 그 뒤 모용수의 늦둥이 아들 [[모용희]]가 군주가 되었다. [[모용성]]의 두 아들을 제치고 그가 즉위한 것엔 형 [[모용보]]의 부인, 형수 태후 정씨의 공이 컸다. 정씨는 모용희와 [[간통]]했는데 그 대가로 황제에 올려주었다. 모용희는 즉위 이전에 표기대장군으로 있으면서 고구려 토벌을 지휘하여 위에 기술한 바와 같은 큰 공을 세웠고, 그 전에 북위와의 전투에서도 여럿 공을 세운 바 있었다. 이런 배경으로 후연의 군권을 휘어잡았고 더군다나 [[모용수]]에 버금간다고 할 만큼 뛰어난 평을 받는 인재였다. 하지만 즉위 이후에는 정반대의 막장일로를 걷는다. 신라 원정에서 돌아온 [[광개토대왕]]의 대반격으로 [[요동]] 전역을 잃은 것을 넘어 영토 깊숙한 곳의 [[숙군성]], 연군[* 원래는 [[베이징]] 부근이지만, 앞서 연군 태수가 이미 북위에게 항복한 사건이 있었으니 옮겨진 대릉하 유역으로 옮겨진 행정구역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다만 이전보다는 소수지만 북경이라는 견해도 여전히 어느정도의 근거를 갖추고 있다.]까지 털리면서 이제는 반대로 후연이 고구려에게 수도 용성을 위협받는 역전이 일어났다. 게다가 아예 이 시기에는 요서 일대에 고구려가 알박기를 시전하면서 적어도 오늘날 대한민국 충청남도 정도 면적은 해당하는 영토를 직접 지배화하려 할 정도.[* 그러나 이 영토는 그 당시 복수욕에 미친 아신왕의 백제가 또 가야-왜-백제 삼국 연합군을 끌고 평양 주변을 공격하던 터라, 요서 방어선 구축에 유리하지 않겠다고 판단한 광개토대왕이 포기하고 물러나게 된다. 물론 요동강 서쪽의 고구려 요새들은 무려 수양제 시기 이전까지도 유지되고 있었는데 이 당시 광개토대왕이 확보한 영역이었을 개연성은 높다.] 모용희는 부씨 자매를 총애해서 황후와 귀비로 삼고 말 그대로 뭐든지 들어주었다. 한편 태후 정씨는 총애를 잃고 절망하다가 병부상서 정신과 함께 모용희를 폐위하려고 모의했다가 발각되어 자살했다. 부씨 자매는 민간에 놀러다니며 초호화판 파티를 했고 또 모용희에게 각종 사치스런 토목공사를 장려했다. 모용희는 그것을 모두 들어줬고 갑자기 귀비 부씨가 앓다가 죽자 치료하던 태의 왕온이 성의가 없었다면서 잔인하게 쳐 죽였다. 그는 내친 김에 고구려에 반격하여 요동성을 공격해서 함락 직전까지 몰았다. 그런데 갑자기 전투를 중단시키고 자신이 황후 부씨와 함께 '''가장 먼저''' 요동성에 입성하겠다며 요동성을 무너뜨리고 평지로 만들어 가도를 뚫도록 명령한다. 이 때문에 요동성 함락은 실패했다. 이후 [[거란]]을 원정했다가 무리가 많음을 보고 지레 겁을 먹고 공격하지 못했다. 모용희는 퇴각하려고 했으나, 황후 부씨가 왠지 거절하자 이번에는 고구려를 공격하려고 했다. --[[동호]][* 사실 후연의 모용선비족도 거란족과 같은 동호 계통이다.] 대신 [[동이]]를 공격한다.-- 이동의 신속함을 위해 치중과 무거운 것을 모두 버리고 경무장으로 무려 3,000리를 행군하여 목저성을 공격했으나 역시 패퇴했다. 이후 황후 부씨가 죽자 모용희는 슬픔에 잠겨 성대한 장례식을 치뤘는데 [[크고 아름다운]] 무덤을 축조토록 했다. 또 전국에 명을 내려 눈물을 흘리지 않거나 곡을 하지 않은 자는 처벌하도록 했고 대신들을 그 무덤에 [[순장]]시키려고 해서 나쁘던 민심을 더욱 잃는다. 모용희는 이미 염습이 끝난 부씨의 관을 열고 [[시간(동음이의어)|시간]]을 한 뒤[* 대렴이 이미 끝나, '''[[네크로필리아|그 관을 열어서 겹쳐 더불어 교접하였다.]]''' 大斂既訖,複啟其棺而與交接。 ─ 《진서》 124권] 상복을 입고 머리를 풀어헤치며 [[맨발]]로 그 상여를 직접 메고 용성을 나섰다. 그런데 상여가 너무 커서 북문을 무너뜨리고 나갈 정도였으며 이 틈을 타 호한 혼혈로 한족이던 [[풍발]]이 반란을 일으켜 모용보의 양자인 고구려계 [[혜의제|모용운]](慕容雲)을 황제로 추대했다. 모용희는 용성을 공격했지만 실패하고 군대마저 흩어져 자신이 세웠던 용등원으로 달아났다가 끝내 사로잡혀 처형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래도 모용운은 예의를 갖춰 부씨와 합장해 주었다. 이렇게 후연은 외우내환으로 [[멸망]]하였고, 모용운이 [[북연]]을 건국하며 명맥을 이어나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