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홍연흠 (문단 편집) == 생애 == 1885년 5월 21일 경상도 의흥현 부남면 대율동(현 대구광역시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에서 아버지 홍장우(洪章佑, 1854 ~ 1892. 10. 23)와 어머니 [[전주 최씨]](1852 ~ 1932. 3. 9)[* 최달식(崔達植)의 딸이다.] 사이의 3남 4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20년 음력 7월 27일, 홍재훈(洪在燻)·이원봉(李遠鳳)의 권유로 군위군 부계면 동산동에 있던 28촌 지간의 족조(族祖) 홍정수(洪定修, 1872 ~ 1970)[* 부림홍씨세보 권상 923쪽 참조.]의 집에서 [[홍영우(독립운동가)|홍영우]]의 첫째 남동생인 7촌 재종숙(再從叔) 홍석우(洪奭佑, 1895 ~ 1930. 5. 15)·이기식(李基植)과 함께 [[일심동체]]임을 서약한 후, [[보천교|흠치교]]에 8인조의 교도로 가입하고 홍재훈에게 치성비 20원을 기부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1년 6월 4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771&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41977&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이송되었으며]], 7월 8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소위 [[다이쇼]] 제령 제7호, 즉 정치범 처벌령 위반 및 사기 혐의로 징역 1년형을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493&evntId=0034993225&evntdowngbn=Y&indpnId=0000024176&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았으나]], 이에 불복하여 공소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11월 26일 대구복심법원 형사제2부에서 다만 미결 구류일수 중 120일이 징역 형기에 산입되었을 뿐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182&evntId=0034988391&evntdowngbn=Y&indpnId=0000019629&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공소가 기각되었고]], 이에 곧 상고하였으나 11월 30일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4896&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32664&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상고를 취하해]] 결국 안동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2년 8월 2일 출옥한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70년 11월 22일 별세하였다. 200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부림 홍씨]][[분류:군위군 출신 인물]][[분류:1885년 출생]][[분류:1970년 사망]][[분류:건국포장]]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