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헌애왕후 (문단 편집) === 섭정 태후가 되다 === 목종이 즉위하면서 김치양은 중앙 정계에 뛰어들었는데 1006년 만들어진 대보적경(大寶積經) 사경 발문에는 김치양의 [[벼슬]]이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판삼사(判三司)라 적혀 있다. 상서우복야는 상서성(尙書省)을 관할하며 삼사의 판사, 사는 전곡의 출납 [[회계]]를 관할하는 것으로 김치양은 [[행정]]권과 [[재정]]권을 장악했던 것이다. 훗날 강조의 정변 때 김치양과 함께 죽은 사람들은 김치양의 친당(親黨)으로 보인다. [[유행간]][* 고려 초기 중앙에서 활동하던 유씨는 평주 뿐이기에 헌애왕후의 고향 황주(黃州)나 김치양의 집안 동주(洞州)와 같은 [[패서]]호족(浿西豪族) 평주 유씨(平州 庾氏)로 추정되는데 이들은 고려 계통 패서[[호족(한국사)|호족]] 간의 연고로 뭉친 것이다.]은 목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현종(고려)|대량원군]]의 후계자 선정을 반대했다. 천추궁사(千秋宮司)를 맡은 [[문인위]]는 황주 인근 장연현(長淵縣) 출신이다. [[이주정]]은 헌애왕후의 친속[* 촌수가 가까운 일가]으로 목종 12년에 유배되었는데 전중감(殿中監)이었으며 마찬가지로 고려 계통 패서호족으로 추정된다. 상서좌복야 [[이주헌]]은 동주 토산현 출신으로 삼사의 직임을 맡았는데 김치양이 동주 출신으로 삼사사를 겸한 걸 고려하면 연고로 가까워진 것으로 보이며 고속으로 승진한 것을 보아 목종 즉위의 [[공신]]으로 추정된다. 동주 토산현 출신인 안소광(安紹光)은 연고를 통해 접점이 생긴 것으로 보이며 [[무술]]이 뛰어나고 왕을 추대한 공이 있다는 기록을 보아 근위를 맡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선휘원(宣徽院)의 판관이었는데 선휘원은 내료(內僚)를 총괄하고 의식(儀式)을 관장하는 관부다. [[황보유의]]는 [[국왕]]의 측근 [[보좌]] 기구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이는데 헌애왕후 [[가문|집안]]인 황주 황보씨라 추정할 수 있다. 헌애왕후의 친당은 모두 고려 계통 패서호족이었으며 혈통 또는 지역적 연고를 가진 자들이었다. 목종 즉위 이후 헌애왕후는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한 명 낳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