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허난설헌/생애 (문단 편집) ==== 김성립의 과거급제 ==== >세상에 문리(文理)는 부족하면서도 글은 잘짓는 이가 있다. 나의 매부 김성립(金誠立)은 경ㆍ사(經史)를 읽으라면 입도 떼지 못하지만 과문(科文)은 요점(要點)을 정확히 맞추어서 논ㆍ책(論策)이 여러 번 높은 등수에 들었다. > >그가 책문을 지을 때에는 편 끝부터 거꾸로 지어 올라가되 맨 처음 끝 부분을 짓고 그 다음에 구폐(救弊)를 말하고 다음 축조(逐條), 다음 중두(中頭)를 짓고, 시지(試紙)에 옮겨 쓸 무렵에 모두(冒頭)를 짓는데 모두 질서 정연하니 이것은 또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 >ㅡ 《성소부부고》 제 24권 성옹지소록 하(惺翁識小錄下)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0577A_0630_010_0050|#]] 위의 성옹지소록을 토대로 허균 평전을 쓴 허경진 교수는 김성립이 "경전과 역사를 읽으라고 해보면 혀도 제대로 놀리지 못하는" 인물로 해석했다.[*출처13 허경진, 허균 평전 62쪽] 이는 김성립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서라기보다는, 김성립 본인의 학습 유형이 암기력은 그렇게 특출나지 않았지만, 글을 짓는 감각은 부던한 노력을 통해 단련시켜서 높은 수준에 오른 유형이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에는 문과 급제를 계속해야만 [[양반]] 지위가 유지되었기 때문에 3대 이상 낙방이 계속되면 양반으로 인정받기 어려웠다. 한두대 걸러서 급제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4대가 연속으로 급제를 한 집안도 많지 않은데 김성립의 집안은 무려 6대 연속으로 [[과거 제도|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던 [[엘리트]] 집안이었다.[* 이 정도면 가히 명문가라 칭할만한데 대표적으로 [[이발(조선)|이발]]의 경우 본인부터 9대조까지 모두 과거에 급제한 [[가문]]이었는데 이 [[호남]] 제일의 명문가였다.] 김성립도 가문의 영예를 잇기 위해 대를 이어 공부를 했으나 특출난 신동은 아니라서 허난설헌이 죽기 전까지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허난설헌 생전에는 생원시만 합격했다. 자세한 내용은 [[김성립]] 문서 참조. 그렇다고 김성립이 둔재였거나 과거급제가 심하게 늦은건 아니다. 조선시대 과거합격자 평균 연령은 소과, 대과 모두 다 합격기준으로 30대 초반이다. 28세에 병과(정9품) 급제한 김성립은 평균보다 조금 더 빨리 합격한 것으로 결코 모자랐다고는 할 수 없다. 허균은 자형인 김성립에 대해 "누나보다 못나고 공부만 할 뿐 실제로는 [[경전]]이나 역사도 제대로 모른다"고 악평했지만 이렇게 말한 본인은 17세에 초시 합격, 21세에 급제하고 [[우참찬]](정2품)이라는 고위직까지 올랐던 천재다. 이런 대단한 사람이 자기 기준으로 보니 눈에 차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