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함양군(1417) (문단 편집) == 여담 == * 양녕대군 생전에 그를 부양한 아들이었다고 한다. 장남 순성군이 있었지만, 지병이 있어 함양군이 대신 부양하였다고 한다. 함양군은 평소에도 양녕대군과 함께 온천에 가는 등 아버지를 잘 보필하여 양녕대군에게 ‘내가 과오가 적은 것은 함양의 덕이다.’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 양녕대군의 종가는 차남 함양군 이포의 가계로 이어진다. 장남 [[순성군|순성군 이개]]가 [[참척|양녕대군보다 먼저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예법대로라면, 순성군이 일찍 세상을 뜬 경우, 그의 장남(오천군)이 종가를 물려받는 것이 맞다. 그러나 몇 가지 사정이 있었다. 양녕대군이 순성군보다 불과 5일 뒤에 세상을 떠나면서, 오천군의 입장에서는 조부-부친상을 한꺼번에 치러야 했는데 이는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또한 상술하였듯 함양군이 순성군 대신 양녕대군을 모시고 살았는데, 부양한 아들이 상주가 되는 것이 당시에는 용인되었다. 따라서 자연스레 종가도 함양군의 후손들이 물려받았다.[*A 출처: [[http://www.sejongking.co.kr/news/articleView.html?idxno=722|〈양녕대군가, 지덕사 600년 종통 잇는 봉사손의 50가지 인생 풀 스토리〉, 《세종대왕신문》 2023.02.13.]]] 성종 대를 거치며 성리학적 예법이 완전히 자리잡자, 순성군의 후손들은 자신들이 장자 계통이니 종손 자격을 회복시켜줄 것을 연산군에게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후 9대손 이형까지 종가 직계가 내려오다가, 이형이 후사가 없어 양녕대군의 3남 [[서산군|서산군 이혜]]의 8대손인 이인망이 봉사손으로 입적되었다. 그런데 이형과 항렬이 같아 문제가 되었고, 이때 순성군의 후손으로 다시 종통을 세우자는 논의가 등장하였다. 그러나 당시 임금이었던 [[숙종(조선)|숙종]]은 이인망을 파양하되, 이인망의 아들 이한보를 이형의 [[양자(가족)|양자]]로 입적하게 하여 항렬 문제를 정리하였고, 이후 이한보의 후손들로 지금까지 종가 직계가 이어진다.[*A] 따라서 현재 양녕대군의 종가는 혈통상으로 서산군의 후손들이다. 다만, 함양군의 후손 자체는 지금도 많이 남아있다.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한 [[이인수(1931)|이인수]]는 혈통 상으로 함양군의 16대손이다. [각주]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양녕대군, version=810)]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