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중록 (문단 편집) === 역사성 === [[사도세자]]의 아내 [[혜경궁 홍씨]]의 직접 증언을 저술한 만큼, 사도세자 관련 문제에서는 가장 중요한 1차 사료이다. 혜경궁은 한중록에 [[사도세자]]의 광기나 [[뒤주]]에 갇혀 죽은 이야기 등을 서술했다. 2번째 집필한 부분부터 남편 [[사도세자]]를 본격적으로 미친 사람으로, 시아버지 [[영조]]를 [[편집증]]적인 사람으로 묘사하는데, 다른 여러 사료에도 이와 일치하는 기록이 많다. 그리하여 임오화변의 전말을 밝히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았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너무 간략하고 [[승정원일기]]는 [[정조(조선)|정조]]가 세초시켜 한중록을 제외하면 상세한 기록이 거의 없다. 현대에 와서는 [[혜경궁 홍씨]]가 친정을 옹호하고자 쓴 정치적 글이라며 가치를 폄하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혜경궁의 친정아버지 [[홍봉한]]은 세자를 뒤주에 가두자는 의견을 내었는데, 한중록은 세자의 죽음을 막으려 애썼다고 설명한다. 게다가 세자가 죽는 동안 홍봉한은 거의 집행관 수준으로 참여했으나, 한중록은 홍봉한이 그 자리에 없었다고 설명한다. 또한 혜경궁의 작은아버지 [[홍인한]]의 소위 삼불필지([[三]][[不]][[必]][[知]]) 사건에 대한 변명도 있다. 삼불필지란 '꼭 알아야 할 필요가 없는 3가지'라는 뜻이다.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려는 [[영조]]에게 홍인한이 "동궁께서는 노론과 소론을 알 필요가 없으며,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조정의 일에 이르러서는 더욱이 알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고한 것을 말한다. 영조가 "어린 세손이 [[노론]]이나 [[소론]]을 알겠으며, [[남인]]이나 [[소북]](小北)을 알겠는가?" 하고 물었다. 이에 대해 한중록에서는, 홍인한은 세손이 다 안다고 답하면 "내가 금지하는 당쟁을 세손이 어찌 안단 말이냐?"라고 트집 잡힐까 봐 당황해서 답하기를 "(붕당에 대해) 알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이 말이 와전되었다는 것이다. 정조는 '''자기 아버지를 죽이는데 앞장섰던 외할아버지 홍봉한'''과 그의 아들이자 본인의 외삼촌인 홍낙임[* 나중에 [[천주교]]에 발을 담갔다가 친척인 홍낙민(세례명 루카)와 함께 [[신유박해]] 때 사사된다.]은 살려주었고, [[홍봉한]]은 봉조하에 제수하기까지 했다. 외가에 이정도로 성의를 보인 정조가 단순 오해만으로 [[홍인한]]을 사사했을 리 없다. 설령 혜경궁의 말대로 저 삼불필지 발언이 와전되었다 치더라도, '''실록에는 홍인한이 세손 정조의 요청을 대놓고 씹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점으로 미뤄보아 홍인한이 세손 정조의 승계를 저지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정조 즉위 후에 다들 [[정후겸]]만 탄핵하자 "야, 이 대간님들아, 큰 놈은 왜 탄핵 안 하냐?" 꼬집으니, 그제서야 몇 명이 홍인한도 탄핵하였다. 정조는 홍인한도 같이 유배 보내고 곧 둘 다 죽였다. 한중록에서 세자가 미쳤다고 주장하는 기간을 [[영조실록]]에서 찾아보면, "인원 천여 명을 데리고 [[충청남도]] [[아산군]] [[온양행궁]]으로 요양을 가는 동안, 아픈 사람 하나 없고 백성들의 고초도 해결해주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 기간 중에 정말로 세자가 미쳤을까 싶은 부분.[* 사도세자는 [[양극성 장애]](조울증)으로 추정되는데, 이 병은 멀쩡한 기간도 있고, 병이 도지는 삽화 기간도 있기 때문에, 일관되게 미친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다.] 영조가 [[경종 독살설]]에서 입장이 그리 떳떳하지 못했는데, 여러 벽서 사건 등으로 소론을 치려하자 세자가 막으려고 했다. 그래서 영조와 사도세자간 사이가 나빠졌다고 봄이 당파 싸움이 치열했던 당시 조선 조정의 사정에 좀 더 부합하다는 지적도 있다. 다만, [[임오화변]]을 노론이 꾸민 음모라고 주장하는 [[노론 음모론]]자들이 이 점을 과다하게 부풀려서, 마치 "혜경궁 홍씨마저 사도세자 죽이기에 참여해놓고 한중록에서 이를 미화했다"고 주장하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물론 혜경궁 홍씨의 친정이 정치권력 싸움에서 풍비박산나는 것을 감싸고 옹호한 점은 부정하기 힘들다. 그러나 이 것이 노론 음모론의 근거로 연결되기에는 부족하다. 아래의 [[정신과]] [[전문의]]들의 분석을 봐도 그렇고. 또한 위에 언급한 세자의 광증이나 친소론 논란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해명이 가능하다는 해석도 있다. 이 부분은 [[사도세자]] 및 [[임오화변]] 문서에 있다. 즉, 결론을 내리면 한중록은 다른 사료에도 꼭 필요한 [[교차검증]] 및 사료 비판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으로 충분하며, 내용 전체를 부정할 정도는 아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