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신/생애 (문단 편집) === 삼진 정벌, 관중 평정 === 마침내 BC 206년 8월, 한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군이 동진하기 위해서는 진령산맥(秦嶺山脈)을 넘어 관중으로 들어가야 했는데 이때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적이 진나라의 명장이었던 옹왕(雍王) [[장한]](章邯)이었다. 이는 진(秦)을 멸한 후 항우가 각 제후들에게 분봉할 때 유방을 한중의 왕으로 삼고 파촉의 벽지에 몰아 넣고 그를 견제하기 위해 옛 진나라 땅에는 옛 진나라의 장수이자 충성을 맹세한 [[장한]](章邯), [[사마흔]](司馬欣), [[동예(초한쟁패기)|동예]](董翳)를 각각 옹왕(雍王), 새왕(塞王), 적왕(翟王)으로 삼아 진나라 땅을 삼등분하여 삼진 땅에 봉하여 군을 주둔시킴으로써 유방이 주둔한 파촉을 견제하며 유방이 나오지 못하도록 하였는데 그중 옛 진의 명장이었던 장한에게 관중의 8백 리 진천(秦川)을 봉해 유방이 나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즉, 이곳에 장한을 배치했다는 것 자체가 유방을 봉쇄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 유방도 이를 잘 알고 있었기에 파촉에서 나가지 못할까 두려워 했고 한신을 등용하기 전까지도 딱히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허나 한신을 대장군으로 임명한 뒤 한신의 제안에 따라 옹왕(雍王) [[장한]](章邯)을 공격했는데, 이때 한신이 제안한 전술은 성동격서에 기초한 것으로서 당시 유방은 파촉에 들어올 때, 항우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장량의 건의에 따라 여러 절벽 등에 만들어놓은 [[잔도]](棧道)를 모두 불태웠는데 이 상황을 이용한 것이었다. 한군이 잔도를 모두 불태웠으니 장한은 당연히 한군이 나오려면 그 험한 환경의 잔도를 복구하는데 최소한 년단위 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했으며 또한 잔도를 수리하더라도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적당히 주기적으로 정찰을 보내 감시하면 대비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들과 장한의 저런 심리를 이용하여 잔도를 대대적으로 고치는 모습을 보여줘 장한의 주의를 끌고 다른 길을 통해 몰래 기습을 했는데 이때 나온 말이 '''명수잔도(明修棧道) [[암도진창]](暗度陳倉)'''이다. 이에 대해 흔히들 그냥 '잔도를 고치는 척하며 다른 길로 나아갔다'라고만 알고 있으며, 그 진격로나 길 등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이 과정은 당시 한군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었고 한군의 관중 진출에 중요한 고비인데, 이에 대한 자료나 정보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기에 여기서 참고로 설명하자면, [[한중]](漢中)에서 [[관중]](关中)으로 가는 길을 알아야 한다. 일단 관중으로 나가려면 한중의 북쪽을 통해 나아가야 하는데 이 한중의 북쪽과 관중 사이에는 해발 3,000m의 거대한 [[진령산맥]](秦嶺山脈)이 있다. 훗날 [[촉한]](蜀漢)의 [[제갈량]](諸葛亮)이 [[제갈량의 북벌|북벌]]을 할 때 항상 넘어야 했던 곳이 바로 이곳인데 이 진령산맥은 매우 험준한 곳으로 그 긴 산맥 중에서도 제대로 된 길이 거의 없었으며 최단거리로 나아가기 위해 잔도를 만들어 넘어야했다. 군대를 움직이기 위해 쓸 수 있는 길은 별로 없었으며, 이 당시의 한중은 거의 개발되지 않아서 그나마 있는 길들 또한 제대로 개발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일단 가장 동쪽에는 자오곡(子午谷)이 있는데, 후에 촉한(蜀漢)의 [[위연]](魏延)이 북벌 당시 제안했던 자오곡계책의 길이 바로 이 길이다. 이 길의 북쪽 구역을 자곡(子谷), 남쪽 구역을 오곡(午谷)이라 하여 자오곡(子午谷)이라 한다. 자곡의 입구가 [[시안(도시)|장안]](長安) 남쪽에 있어서[* 후에 유방이 황제로 등극한 뒤 이곳에 [[장락궁]]을 짓고 그 외곽을 장안성이라 하였다.] 당시에는 [[셴양시|함양]]으로 가는 길이기도 했으며 간혹 한신이 이 자오곡을 통해 장한을 습격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 길은 한중에서 바로 장안으로 가는 길이라 그 길이가 660리에 달하고 높은 산과 계곡들로 이루어져 거의 죽음의 길이라 불리었으며, 대규모 병력을 움직일 수 없고 결정적으로 아직 개발조차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 시기는 진한교체기로서 장안성은 유방이 항우를 쓰러뜨리고 한나라를 세운 후에 지었으며 함양은 항우에 의해 불태워져 폐허가 되었기에 출격하더라도 거의 황량한 벌판이었다. 중간에는 당낙도(儻駱道), 즉 낙곡이 있었는데 계곡 길이가 420리로 장한이 도읍으로 둔 폐구와 가까워서 이 길로 나아가면 가장 위협적이었지만 당낙도 또한 길이 험한 데다가 자오도와 마찬가지로 완전히 개발되어 있지 않아 대군을 움직이기 힘들었다. 서쪽에는 포야도(褒斜道)가 있는데 이 포야도는 관중으로 가는 길 중 상대적으로 넓고 평탄했으며 길이가 470리로 당락곡보다 조금 더 먼 길이다. 남쪽 구역을 포곡(褒谷)이라 하였고 북쪽 구역을 사곡(斜谷)이라 하였는데 사곡(야곡)의 입구는 미현의 남쪽으로 진한교체기 당시 이 길은 관중에서 한중으로 들어가는 주요 교통로로서 유방도 이 길을 통해 한중으로 들어왔는데 유방이 군을 이끌고 들어간 것처럼 대군을 이끌기에 좋은 길이었다. 그런데 장량의 계책에 따라 포야도의 잔도를 모두 불태워서 포야도를 통해 출병하려면 반드시 잔도를 복구해야 했다. 그리고 포야도의 서쪽에 진령을 통해 북쪽으로 이동하면 진창(陳倉)에 도달하는 길이 또 하나 있는데 일찍이 관중에서 한중을 드나들 때 사용되던 주요 길이었으나 포야도가 개통되면서 점차 버려지고 잊혀졌다. 이 길이 바로 고도(故道)인데 당시에는 진창으로 가는 길이라 하여 진창고도(陳倉故道)라 불렸다. 포야도만큼 바른 길은 아니지만 군을 이동시키기에 무리가 없을 정도로 충분히 양호했으며 포야도에 의해 가려진 길이라 장한 또한 경계를 별로 하지 않았다. 그래서 B.C 206년 6월~7월 사이 한신은 병사와 백성들을 대거 동원하여 포야도의 잔도를 복구하는 작업이자 기만책을 거하게 펼치며 장한의 주의을 포야도 쪽으로 집중시켰다. 일단 포야도의 잔도 수리가 장한을 속이기 위한 수단이긴 하였으나 군을 움직이고 물자를 나르는 등 보급을 위해서는 반드시 잔도를 복구해야만 했기에 기만책이여도 착실하게 행하였고 이것이 장한을 더욱더 쉽게 속일 수 있는 요소였다. 하여 장한은 군을 사곡 쪽에 집중시켰으나 잔도 복구의 시일과 유방의 세력 안정, 복구 후에도 한군은 지쳐있을 거라 생각하여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결국 그해 8월, 한신은 충분한 시간차를 두어 장한을 안심시킨 후 몰래 진창고도(陳倉故道)를 통해 군을 이끌고 진창을 기습하였다. 진창은 교통이 발달하여 진나라 시절 최초의 현이 설치된 곳이자 군사적 요충지로 사용되어 옛날부터 성곽을 축조하고 많은 물자가 비축된 곳이었는데 한군은 이곳을 기습해 대량의 군량과 군수품을 얻었고 진창의 견고한 성곽을 함락시켜 대승을 거둔 덕분에 군사들의 사기가 크게 올랐다. 이에 [[장한]]은 한군을 막기 위해 진창(陳倉)으로 달려나왔으나 패했고, 이후 지금의 [[섬서성]][* 산시성을 말한다.] 건현(乾縣)인 호치(好畤)로 물러나서 다시 싸웠으나, 여기서도 또 다시 패배했다. 그리하여 장한은 결국 폐구(廢丘)로 물러났다. 이후 장한을 폐구에서 포위한 채, 유방은 그 사이에 다른 장수들을 시켜 한 달 사이 옹 땅을 모조리 평정했다. 그리고 폐구에 포위된 사이 색왕(塞王) [[사마흔]](司馬欣), 적왕(翟王) [[동예(초한쟁패기)|동예]](董翳)의 구원을 막기위해 이들도 패배시킨 후 항복을 받았으며, 이때 자신의 주군이었던 항우는 제나라 정벌에 발이 묶여 정창을 한왕으로 삼아 유방을 견제하고자 했으나 한신([[한왕 신]])[* 회음후 한신과 한왕 신은 이름이 똑같다. 그래서 사기 열전에서는 한왕 신의 열전을 한신 열전이라 하고 회음후 한신은 열전에서 이례적으로 작위 이름인 회음후 열전이라 하였다. 사마천이 이렇게 한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이 정창을 격파하여 한나라 땅을 탈취하였고, 하남왕(河南王) 신양(申陽)이 항복하자 유방은 그곳에 하남군을 두었다. 그리고 장한의 동생 장평(章平)과 조분(趙賁)은 농서와 북지로 퇴각해 저항하며 항우의 지원을 기다렸으나 한군이 농서를 공략하고 이듬해 정월, 북지를 공략해서 장한의 동생 장평을 생포하고 후에 폐구성을 수공으로 수몰시키자 장한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로써 유방은 관중 지역을 모조리 평정했다. 이 과정에서 사마흔, 동예, 장한, 신양 등을 격파한 공을 모조리 한신의 공적처럼 말하는 경우도 있긴 한데, 한 가지 알아둘 점은 이때의 공적은 한신뿐만 아니라 한군 전체에게 공적이 있다는 점이다. 회음후 열전에서는 이 진격 과정이 잘 나와있지 않은데 예를 들면 [[번쾌]]는 폐구 수공에서 활약했고, [[주발(전한)|주발]]은 함양 일대를 장악했으며, [[역상]]은 북지군을 함락시켰다. 즉, 당시 한신의 지위가 대장군이었기에 삼진 정벌과 관중 공략을 계획하고 실행한 것은 분명 한신이지만 총지휘는 유방이 맡았고 빠른 시일 내에 여러 곳을 공략해야 하는 과정에서[* 당시 항우와 그의 주력군은 제나라를 공격 중이었는데 초반에는 대승을 거두었으나 죄없는 제나라 백성들에게까지 만행을 저지르자 전횡과 전광 등이 패잔병 등을 수습하고 제나라 백성들이 그에 호응하여 저항했으며 이에 항우 또한 제나라를 정벌하지 못하고 고착 상태에 빠져 고전 중이었다. 그렇기에 지원군을 빠르고 쉽게 보내기는 어려웠다.] 직접 성이나 군을 공격하거나 함락시키는 데 여러 장수들이 나섰어야 했으며 이러한 움직임에서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장수들의 공 또한 크다는 것이다. 사실 잔도를 고치며 위장하는 부분도 사기 등에선 딱히 언급이 없으며, 단지 우회로를 통해 장한을 쳤다고 나와있는데 이 우회로를 제공한 사람도 한신이 아니라 수창정후 [[조연(전한)|조연]]이라는 이야기가 있어서 [[암도진창]] 자체가 대부분 허구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한신이니까' 위화감이 너무 없어서 살이 붙어버린 이야기일 수도. 그렇게 해서, 마침내 삼진이 평정되었고 관중이 유방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즉, 드디어 항우와 한번 싸워볼 만해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