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과학기술원 (문단 편집) == 역사 == || 1966년 ~ || 1971년 ~ || 1981년 ~ || 1984년 ~ || 1989년 ~ || 1997년 ~ || 2009년 ~ || ||<-2> {{{#white '''KIST'''}}} ||<|2><-2> {{{#white '''KAIST'''}}} ||<-3> {{{#white '''KIST'''}}} || ||<|3> || {{{#white '''KAIS'''}}} ||<|2><-2> {{{#white '''KAIST'''}}} ||<|3> {{{#white '''KAIST'''}}} || ||<|2><-2> || {{{#white '''KIT'''}}} || ||<-2> || {{{#white '''ICU'''}}} || KAIST는 한국과학원(KAIS)를 전신으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한국과학기술대학(KIT), [[한국정보통신대학교]](ICU)와 통합·분리된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hellodd.com/20110512231435.jpg|width=100%]]}}} || || {{{#ffffff '''한국과학원 전경'''}}} || 1960년대말 대한민국의 산업은 노동집약적 경공업 육성에서 기술집약적 중공업 기반 산업화로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공계 대학교육은 열약한 상황이었고, [[대학원]]은 유명무실한 상황이었다. 특히 많은 인재들은 미국 등 [[선진국]]에 유학을 떠났고, 다시 국내에 되돌아오지 않았다. 이 두뇌 유출을 막기 위해 설립된 것이 KAIST의 전신인 한국과학원(KAIS)이다. 1968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는 ‘이공계대학 및 대학원 육성방안에 관한 조사 연구’라는 보고서를 작성하여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비슷한 시기 미국 뉴욕공과대학의 [[정근모]] 교수는 [[미시간 대학교]]에서 공부할 당시 지도교수였던 존 해너(John Hannah)가 미국국제개발처(USAID) 처장으로 임명되자, '한국의 새로운 응용과학기술 대학원 설립안'을 USAID에 사업계획서로 제출하였다.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해너 처장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새로운 이공계 대학원 설립을 권고하는 서한을 보냈고, USAID 차관을 바탕으로 한국과학원 설립이 추진된다. 1970년 4월 8일 월례 경제동향 보고회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정근모 박사의 바탕으로 과기처의 과학기술대학원 독립 신설안을 추진할 것을 지시했다. [[경제기획원]]·[[문교부]]·[[과학기술처|과기처]]의 차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부소장 및 여러 명의 대학교수로 구성된 과학원 설립 실무위원회가 발족되었고 한국과학원법이 1970년 7월 16일 [[대한민국 국회|국회]]에서 의결되었고, 8월 7일 공포되다. 이 특별법은 자율성 보장, 출연금 지급, 병역 특별조치 등의 파격적인 조항을 통해 재정 및 제도적 독립과 안정성을 강력하게 지원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제도적 뒷받침이 오늘날까지 KAIST의 학풍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1970년 5월 11일 [[과학기술처|과기처]] 장관은 [[대한민국 부총리|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의 적극적인 협력을 얻어 한국과학원 설립에 소요되는 외자를 조달하기 위해 USAID에 600만 달러 규모의 장기교육 차관을 요청했다. 설립자금을 지원키로 한 [[미국]]은 한국과학원 설립 가능성을 검토하기 위해 [[실리콘밸리]]의 아버지로 알려진 전 [[스탠퍼드 대학교|스탠퍼드 대학]] 부총장 터만 박사를 단장으로 한 조사단을 파견했고 최종적으로 한국에서 요청한 교육차관을 제공키로 했다. 1971년 2월 16일 KAIS가 설립등기되고 18일 창립 이사회가 개최되었다. 한국과학원의 설립부지는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홍릉]] 일대 서울연구개발단지로 결정되어 1973년 완공되었다. 처음 신입생이 입학한 것은 1973년 3월이었고 그 해 9월 17일, 한국과학원의 공식적인 첫 강의인 1956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월터 하우저 브래튼]] 박사 초청 개강 특별 기념 강연이 열렸다. <미래의 꿈>은 [[미국]] [[실리콘밸리]]의 아버지 프레드릭 터만 박사가 미국 국제개발처 타당성 조사단장 자격으로 [[대한민국]]에 방문한 후, 한국과학원 설립에 필요한 차관 제공을 위해 1970년 작성한 「한국과학원 설립에 관한 조사 보고서」의 마지막 장의 제목이다. 터만 박사는 설립 30주년을 맞을 무렵인 2000년경의 KAIST를 다음과 같이 예견했다. * 국제적인 명망을 가진 이공계 교육 기관으로 성장해 학계의 본보기가 되는 학교 * 학문적 역량을 자체적으로 개발해 교육계에 새로운 기원을 이룩하는 첨병의 임무를 수행하는 학교 * 정치와 경제 각 분야의 리더를 배출하는 학교 * 한국인 생활 수준의 향상에 크게 이바지하는 학교 경영 효율화를 이유로 [[신군부]] 주도 하에 [[정부출연연구기관]]의 통폐합이 이루어지면서 1981년 1월 5일, 한국과학원(KAIS)과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통합되어 한국과학기술원(KAIST)으로 발족하게 되었다.[* '한국과학기술원 사반세기'를 보면 통합 당시의 사정을 보다 자세히 엿볼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교육기관과 연구소의 '이런 비합리적인 결합'이 이뤄진 데는 당시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다. 기록은 "자세한 내막을 밝히기는 어렵지만 몇 가지 추측에 따르면 사회적으로 인지도가 가장 높았던 한국과학기술연구소와 한국과학원 두 기관을 통합해 출연연 통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효과를 얻었고 한국과학기술원의 설립자를 전두환이 맡으면서 통치자가 과학기술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정치적 제스처의 효과도 거뒀을 것이다"라고 남기고 있다.] KAIST는 학사부와 연구부로 구성되었다. 메트릭스 체제를 통해 학사부와 연구부를 통합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실패했고, 학사와 연구 각각의 기능 중심체제로 변경됐다. 메트릭스 시스템 등 다양한 방식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격이 다른 두 기관의 통합은 갈등을 불러왔다. 1988년 독립적으로 연구부 기능을 재정립할 필요성이 제기되어 1989년 6월 12일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설립되어 분리·독립했다. 1982년 11월 29일,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대한민국 부총리|부총리]]와 [[고용노동부|노동부]] 장관에게 “최신 첨단 기술 분야의 고등 교육기관의 설립을 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983년 2월 노동부는 설립계획을 확립하였고, 1984년 1월 대학 설립에 대한 문교부의 승인이 떨어졌다. 대학의 명칭은 한국산업기술대학으로 예정되었고, 위치는 [[대덕연구단지]]였다. 그러나, 한달 뒤 [[전두환]] 대통령은 "[[과학고등학교]], KAIST 영재 교육과정, 한국산업기술대학의 효율적 통합 운영 방안을 검토하라”는 지시하였고, 3월에는 “KAIST와 한국산업기술대학의 계획안을 통합하여 과학기술대학으로 변경하여 설립하라"고 하였다. 이후 1984년 12월 31일, 부설 과학기술대학 설치를 위해 한국과학기술원법이 개정되고 이듬해 [[최순달]] 박사가 초대 학장으로 부임하였다. 1985년 6월 한국과학기술대학(KIT)이 대전 [[대덕연구단지]]에 설립되었으며, 1986년 첫 신입생이 입학하게 되었다. KIT는 [[학력고사]]를 거치지 않고 특차전형을 실시하였고 무학년 무학과제를 통해 우수한 재능을 가진 학생을 교육할 수 있도록 하였다. 1988년, 연구 기능은 서울에 잔류하고 학사기능은 대덕으로 이전해 과학기술대학과 통합하는 계획이 [[노태우]]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 당초 대덕분원 계획에 따라 1987년부터 KAIST 대덕캠퍼스의 건설이 진행되고 있었다. 1989년 KIT는 한국과학기술원 과학기술대학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KAIST와 통합되었다. 1990년 3월 2일, KAIST 대덕캠퍼스 현판식이 이루어졌고, 1992년까지 단계적으로 대덕 이전이 진행되었다. 현 본원의 북측 지역이 과거 KIT의 캠퍼스이고, 동측, 서측이 KAIST의 이전으로 건설된 부분이다. KAIST는 세계 초일류의 연구중심 교육기관을 비전으로 성장을 계속하였다. 1993년, 미국 교육부 인정 공학교육 평가기관(ABET)의 평가에 따르면, KAIST는 석·박사 과정의 수준이 미국 대학의 상위 10% 이내의 수준이며, 학부과정은 30% 이내의 수준으로 평가 받았다. ABET 평가단은 KAIST가 '최고 수준의 교육 및 연구 기관(A First Quality Institute)'이며, '교수의 질이 우수하고 적절한 규모의 실험 기자재가 갖추어져 있으며 학생들도 매우 도전적이고 향학열이 아주 우수한 집단'이라 평하였다. 90년대 말, [[사이언스]]와 [[네이처(학술지)|네이처]]는 "한국의 대표적인 이공계 대학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교육기관이 될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KAIST를 소개했다. 한편, 서울의 기존 홍릉캠퍼스는 서울분원이 사용하였다. 1992년 설립된 서울분원은 기업체나 연구소에 근무하는 사람을 모집하여 석박사 과정을 운영하였다. 그러나 서울분원은 발전의 한계를 맞이해 1996년 신입생 모집이 중단되었고, 같은 해 그 자리에 테크노경영대학원과 [[고등과학원]]이 개원하였다. 2002년, 나노종합팹센터 주관기관으로 선정되어 2005년 3월 16일 나노종합팹센터가 본원 내에 설립되었다. 2013년 [[나노종합기술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나노기술 연구와 교육을 수행하고 있다. 2009년 3월 1일에는 [[한국정보통신대학교]](ICU)와의 통합이 이루어졌다. ICU는 [[대한민국 정보통신부|정보통신부]]의 지원을 받고 있었는데, 사립대학교라 정부예산지원의 근거가 없어 운영이 어려워지자 KAIST와의 통합이 추진되었다. 이로써 ICU 캠퍼스는 문지캠퍼스가 되었고 KAIST의 IT 분야 규모가 크게 확대되었다. 또한, 같은해 2월 6일 최초의 [[과학영재학교]]인 [[한국과학영재학교]](KSA)가 KAIST 부설학교로 전환되어 [[고등학교]] 단계에서부터 체계적인 과학 영재 교육 체계를 구축하였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KAIST2017.jpg|width=100%]]}}} || || {{{#ffffff '''2010년 한국과학기술원 본원 전경'''}}}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