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드리아누스 (문단 편집) === 의문스러운 즉위 과정 ===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와 5촌 관계였고, 트라야누스 치세 동안 황제의 최측근이었던 데다가 다키아(지금의 [[루마니아]]) 전쟁에 참가하여 큰 공적을 세웠다. 그러나 이런 승진과 공적, 혈연 관계에도 불구하고 트라야누스가 하드리아누스를 자신의 양자이자 후계자로 내정했다는 이야기나 확실한 징후는 전혀 없었다. 아울러 그는 트라야누스 시대의 정복전쟁 과정에서 수많은 공적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트라야누스]]의 측근들과 대립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확장 정책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져 확장 정책을 주도했던 측근들과 대립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하드리아누스는 전임 황제인 트라야누스가 정복한 다키아 지방조차 포기하려고 했다. 반대가 심해서 결국 그만두긴 했지만, 이 황제가 얼마나 확장 정책에 부정적이었는지를 가늠하는 초석은 될 수 있다.] 그 결과, [[트라야누스]] 치세 후반에 일어난 [[파르티아]] 전쟁에서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 측근들의 견제로 후방인 시리아 속주 총독 직위에 머물러야 했다. 그나마 이것도 트라야누스의 황후로, 하드리아누스에겐 어머니나 다름없었던 당숙모 [[폼페이아 플로티나]]의 적극적인 지지로 얻어낸 자리였다. 그러나 [[파르티아]] 전쟁은 실패로 돌아갔고, 병을 얻은 [[트라야누스]]는 로마로 돌아가다 서기 117년 8월 9일에 셀리누스 항구에서 병사했다. 죽기 직전 [[트라야누스]]가 하드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하여 하드리아누스는 제위에 오르게 되었다. 117년 양자 지명과 즉위 당시, 하드리아누스의 제국 내 위치는 소년 시절부터 자신을 돌봐주고 어머니 역할을 해준 황후 플로티나의 지지 외에는 상당히 확고하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의 죽음 당시, 그 옆에 있던 이는 플로티나였고 뚜렷한 유언장 같이 플로티나와 하드리아누스의 주장을 뒤집을 만한 것도 전무해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가 사망한 후 그의 뒤를 이어 로마 제국 황제에 올랐다. 하드리아누스의 공식적인 입장에 의하면 트라야누스가 죽기 이틀 전 하드리아누스가 양자 및 후계자로 지명되었는데, 이 부분에서 불분명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의 제위 등극에 대해 당대부터 많은 의문들이 제기되어 왔다. 트라야누스의 재위 기간 동안, 하드리아누스는 정식 집정관직을 얻지 못하고 보결 집정관 1회(108년) 역임에 그치는 등 원로원 내의 다른 유력자, 차기 제위 경쟁자들과 뚜렷한 차이를 나타내지 못했다. 티베리우스, 티투스까지는 아니더라도 트라야누스가 네르바에게 받았던 지위조차[* 카이사르 칭호, 황제와의 공동 정규 집정관직] 받지 못했으며 그의 공직 생활도 후원자인 당숙 트라야누스의 아내 플로티나의 적극적인 역할이 컸던 걸로 보인다. 즉, 하드리아누스는 황제와 가장 가까운 남자 혈족임에도 양자가 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또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 사이에 반감은 분명히 있었던 것으로 보였고, 트라야누스는 하드리아누스가 끊임없이 자신의 측근들과 대립했음에도 이를 제지하지 않았다. 트라야누스는 생전에 하드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정해서 왕조를 열겠다라고 연상시킬 수 있는 일이나 행동을 하지 않았고, 죽을 때까지 아들을 원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며([[아우구스투스]]가 그랬던 것처럼), 하드리아누스가 아닌 네라티우스 프리스쿠스(L. Neratius Priscus)를 후계자로 염두에 둔 것이 아니냐는 루머도 돌았다. 마지막으로, 트라야누스가 하드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임명한다는 명령을 내릴 때 동석했던 인물들이 다 하드리아누스를 지지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트라야누스의 명령이 진실이었냐는 점에 대해 의문점이 드는 대목이다. 하드리아누스가 좋은 황제이든 나쁜 황제이든 즉위 과정이 불분명한 건 사실이며, 트라야누스 본인이 다시 살아나지 않는 이상 논란이 없을 수는 없다. 이에 대해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대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통치기와 [[세베루스 왕조]] 시대 동안 원로원 의원을 지낸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 디오 카시우스의 부친도 원로원 의원이었고, 이 집안 자체가 아나톨리아 일대에 영향력이 상당한 그리스계 세습 원로원 가문인 것을 생각하면 근거없는 소문은 아니다.]는 베일에 쌓인 하드리아누스의 양자 입적과 황제 등극에 대해 합리적인 이유로 인한 계승 음모를 거론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이는 그럴듯한 이야기였다고 하는데, "트라야누스는 실제로 하드리아누스를 입양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하드리아누스의 제위 등극과 양자 입적은 당숙모 [[폼페이아 플로티나]] 황후가 꾀한 일이고, 며칠 동안 트라야누스 황제의 사망 사실을 숨겼다고 한다. 또 디오 카시우스는, 플로티나 황후가 그 동안 하드리아누스의 입양을 알리는 편지들을 로마 원로원에 보냈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당대 로마인들조차 의문점을 제기한 증거는 황후가 보낸 '트라야누스의 편지'에 "왜 트라야누스 황제의 서명 대신 황후 플로티나의 서명이 있느냐"였다고 한다. 그래서 하드리아누스의 등극 직전 플로티나 황후는 이에 대해 "황제가 너무 허약해져서 서명을 할 수 없었다"는 구실을 댔을 것이라고 전한다. 또 다른 소문에 따르면 플로티나가 트라야누스 황제의 방에 누군가를 몰래 들여보내서 황제의 목소리를 [[성대모사]]하게 하면서 하드리아누스의 양자 입적과 후계자 지명을 알렸다고 하는데 분명한 사실은 플로티나 황후가 트라야누스의 사망 소식을 알린 것은 하드리아누스의 제위 계승이 확실해진 순간이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디오는 그 당시 원로원 내 분위기 등을 근거로, "하드리아누스가,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사망한 트라야누스 뒤를 이어서, 죽은 황제의 부인 플로티나의 정부라는 유일한 칭호만을 가지고 공식적으로 황제가 되었다"고 말하며 여러 소문 등으로 하드리아누스 즉위는 의문이 많았음을 지적했다. 게다가 로마에서 발굴된 한 묘비가 이런 음모론에 힘을 더해주는데, 이 묘비의 주인 해방노예 마르쿠스 울피우스 파이디무스(Marcus Ulpius Phaedimus)는 트라야누스의 음료 담당 시종이라고 쓰여있었고, 사망한 날짜가 트라야누스가 사망한 3일 후였으며 사망 당시 겨우 28세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시종이 플로티나의 명을 받고 트라야누스의 목숨을 끊은 후 입막음으로 살해당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있다.[[https://www.museivaticani.va/content/museivaticani/en/collezioni/musei/galleria-lapidaria/sezione-iii--istituzioni-di-governo-a-roma-e-nellimpero/epitaffio-di-un-littore.html|#]] 어쨌든 하드리아누스는 이런 베일에 쌓인 과정에서 즉위하게 되는데 이때 그는 시리아 총독으로 재임 중이었고, 트라야누스 사망 소식을 알게 된 것도 총독으로 있던 중이었다. 그래서 그는 곧바로 [[셀레우키아]]로 향한 뒤 양자 자격으로 황제의 시신을 셀레우키아로 운반해 화장 후 선박을 이용해 황제의 유골을 로마로 보내고, 트라야누스 기념 기둥 기단에 안치하도록 했다. 이후 그는 로마를 향해 먼 길을 갔는데, 그 동안 자신이 복무했던 도나우 방어선의 [[도나우 강]] 하류 북부 지역에서 발생한 군사적 위기 순간을 해결했고, 102년 트라야누스가 병합한 영토를 포기했다고 한다. 이런 과정 속에서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만큼 뛰어난 정치를 펼치고 싶어했고, 이를 자신의 국정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의 즉위 과정과 정통성에 의문점이 많았기 때문에 그가 로마에 도착하기도 전, 4명의 저명한 원로원 의원들이 국가 전복 혐의로 처형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때 처형된 이들은 모두 최고 고위직(집정관)을 지낸 사람들이어서 로마인들에게 이 사건은 '[[네 명의 집정관 사건]]'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들은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 당시 트라야누스의 뒤통수를 치고 많은 로마인을 학살한 유대인들의 '[[제2차 유대-로마 전쟁|키토스 반란]]'을 진압한 명장 [[루시우스 퀴에투스]], 아울루스 코르넬리우스 팔마 프론토니아누스(99년과 109년 집정관), 루키우스 푸블릴리우스 켈수스(102년과 113년 집정관), 가이우스 아비디우스 니그리누스(110년 집정관, 현직 다키아 총독)였다. 이 4명의 전직 집정관을 처형한 [[프라이토리아니]] 근위대장은 마침 하드리아누스의 후견인인 [[푸블리우스 아킬리우스 아티아누스]]였다. "네 명의 집정관 사건"에 대해 디오 카시우스는 하드리아누스가 내세운 명분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며, 하드리아누스가 네 명의 국가 원로를 숙청한 이유는 그들의 부와 영향력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하드리아누스가 이때 이들의 처형에 자신은 책임이 없다고 부인했기 때문에 사건의 전체 흐름이 꼴사나워졌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고대 로마의 전승 기록들에 따르면 지금은 사라진 하드리아누스의 자서전에서도 이 사건이 나온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하드리아누스는 자서전을 통해 "원로원이 자신의 승인도 받지 않고 그들의 처형을 명령했다"고 한다. 어쨌든 하드리아누스의 즉위는 등극 당시부터 다소 암울하게 시작됐는데, 그는 로마 도착 이후 자신이 사건에 책임이 없고 모든 것은 아티아누스의 과잉 충성 때문이었다는 서약을 해야 했고, 원로원에 편지를 보내 앞으로는 적절한 재판 절차 없이 원로원 의원들을 처형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아티아누스를 근위대장에서 해임했다.[* 하지만 원로원 의원 직은 유지시켰다.] 그러나 이런 그의 행동에 대해 원로원은 공개적인 비판을 피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모양새를 취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