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시즘/특징 (문단 편집) === 후기 파시즘과 우경 기회주의 === >사건사의 시각에서 보면, 파시즘의 집권은 곧 자유주의의 자살을 뜻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전후에 분출된 전투적 노동 운동과 사회주의적 선동에 직면해 있었다. 유산 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자유주의자들에게 그러한 사회적 소요는 자신들의 재산과 자유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는, 일종의 '대공포'를 야기했다. 그들은 패닉 상태에서 반볼셰비즘의 구호를 외치는 파시스트들 가운데서 반가운 동지를 발견했다. 자유주의자들은 파시스트들의 폭력을 묵인했고, 연합 공천을 통해 파시스트들에게 의석을 제공했다. 물론 자유주의자들은 파시스트 행동대의 과격한 언동에 불안감을 느꼈으나 사회주의자들보다는 파시스트들이 더 다루기 쉬울 거라고 잘못 가정하고 있었다. 자유주의자들은 파시스트들을 이용해 사회주의자들을 배제한 뒤 파시스트들을 곧바로 내치거나 길들일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이는 순진한 환상에 불과했다. 손님이 주인을 내쫓고 집을 독차지한 것이다. >---- >장문석, 파시즘 46p >파시즘 운동이 무르익어 권력을 진지하게 추구하기 시작하면서, 파시스트들은 기득권층과 깊이 공조하게 된다. 물론 이탈리아와 독일의 보수층이 무솔리니와 히틀러를 만들어낸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범법 행위를 처벌하지 않고 여러 번 묵과해준 것은 사실이다. 앞 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선거와 폭력적 위협을 통해 파시스트당과 나치당이 무시 못할 세력으로 성장하자 보수 세력은 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 결단을 내려야 했다. >보수파 지도자들은 특히 파시즘을 자기 편으로 흡수할 것인지 아니면 다시 주변 세력으로 돌려보낼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한가지 중대한 사안은 경찰과 사법기관을 통해 파시스트들이 법을 따르도록 강제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 이탈리아와 독일의 보수파 국가 지도자들은 좌파로부터 민중의 지를 빼앗으려는 파시스트들의 폭력을 묵과함으로써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훨씬 더 많으리라고 생각했다. >파시즘이 권력에 안착하도록 도와준 보수파의 공모는 몇 가지 종류로 나뉜다. 우선, 파시스트들이 좌파를 겨냥해 휘두른 폭력에 대한 공모를 들 수 있다. 독일의 경우 가장 치명적인 결정 중 하나는 [[프란츠 폰 파펜|폰 파펜]]이 1932년 6월 16일 나치 돌격대의 행동에 대한 금지 조처를 해제한 것이었다.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행동대는 이탈리아 경찰과 군인의 묵인 내지는 노골적인 도움이 없었더라면 아무 힘도 쓰지 못했을 것이다. 또 다른 공모 형태는 상대의 체면을 높여준 것이었다. 1921년 5월 [[조반니 졸리티|졸리티]]가 무솔리니를 선거 연합에 포함시킴으로써 무솔리니의 위신을 높여준 사건은 이미 살펴보았다. >... >파시스트들과 보수주의자들이 권력을 나누어 가질 방안을 모색하던 기간은 (이탈리아와 독일 모두) 파시스트나 보수주의자 양쪽 모두에게 힘든 시기였다. 협상을 해봐도 기껏해야 양쪽 모두에게 이상적이라고 할 수 없는 방안만 나올 뿐이었다. 하지만 좌파가 권력을 장악하거나 군사 독재가 등장해 보수파와 파시스트들을 모두 의회에서 내쫓는 사태를 생각하여 양측 모두 기꺼이 필요한 만큼 의견을 조정해 차선책에 합의했다. >이렇게 파시즘 정당들은 새로운 동맹세력과 더 깊이 공조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당을 분열시키고 일부 순결주의자들을 소외시키는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각기 다른 권력 관계 속에서 이런 '지배를 위한 타협'을 결정했다. 무솔리니의 승리에서는 파시스트 행동대가 매우 중요했으며 선거 정당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했다는 사실은 무솔리니가 지역의 파시즘 우두머리들인 라스(ras)에게서 히틀러가 나치 돌격대에게 받은 도움보다 더 큰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히틀러는 협상에서는 무솔리니보다 좀 더 자유로운 위치였지만, 당 투사들과의 마찰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다. >파시즘 지도자에게는 권력 획득을 위해 보수파 지도자들과 타협을 벌이는 때가 매우 위험한 순간이었다. 지도자가 정치 엘리트층과 비밀리에 거래를 하는 동안 그를 따르던 투사들은 밖에서 참을성 없이 웅성거리며 내통 행위를 비난했다. 1920년 후반에 이미 정당 지도자들과 비밀 협상을 하고 있었던 무솔리니는 크리스마스에 단눈치오를 도우러 피우메에 가지 못했을 뿐더러 1921년 5월에는 졸리티의 선거 연합에 합류하면서 일부 투사들을 실망시켰다. 무솔리니가 1921년 8월 지금까지 적으로 지냈던 사회주의자들과 '강화조약'을 맺자 불만을 품은 추종자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고, 무솔리니는 한시적으로 파시즘 지도자 자리에서 물러나며 조약을 포기한 뒤에야 간신히 반란 세력을 달랠 수 있었다. >히틀러 역시 권력 획득 과정에서 어떤 거래를 할 때마다 당내의 반발에 부딪혔다. 전(前) 자유군단 지도자이자 베를린과 독일 동부의 나치 돌격대 지휘관이었던 발터 슈테네스(Walter Stennes)는 히틀러의 합법적인 수단을 통한 권력 획득 전략에 반대했다. 슈테네스의 나치 돌격대원들은 승리의 기쁨이 계속 연기되고 낮은 보수를 참고 기다리는 기간이 너무 긴 데다 비(非)군부 출신의 정당 지도부에 복종해야 하는 상황에 격분한 나머지 1930년 9월 베를린의 나치당사를 점거했다. 1931년 2월, 돌격대원들이 노상 폭력 사태를 금지한다는 명령을 따르지 않자 히틀러는 슈테네스를 나치 돌격대에서 쫓아냈다. 격분한 돌격대 대원들은 1931년 4월 당사를 재점령했고, 히틀러는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설득한 뒤에야 겨우 폭동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이 사건으로 나치 돌격대 과격분자 5백 명이 숙청되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1932년 말 선거 지지율이 하락하고 자금이 바닥을 드러낸 데다 일부 부관들이 전도유망한 미래를 찾아 연립 정부로 떠나버리자, 히틀러는 나치당에 대한 통제권을 거의 상실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협상에서의 입지가 좁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굳은 의지와 도박사적 직감만큼은 여전했던 히틀러는 총리직에 전부를 걸기로 결심했다. >... >보수 진영의 지도자들은 다른 가능성, 예를 들면 온건 좌파와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것, 또는 왕이나 대통령의 비상권한을 통해 통치하는 것(독일의 경우에는 그 비상 통치를 계속하는 것) 같은 다른 가능성을 거부했다. 보수파 지도자들은 파시즘이라는 대안을 선택했다. 파시즘 지도자들은 그들대로 권력을 나누어 가지려면 꼭 필요했던 '[[우경화|정상화]]'를 이루어냈다. >...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나치 지식층 일각에서 여전히 내세우던 반(反)자본주의 논리를 우려했고, 이탈리아 보수 세력은 에드몬도 로소니(Edmondo Rossoni, 1884~1965) 같은 파시즘 노동운동가들에게 불안감을 느꼈다. 그러나 무솔리니는 이미 오래 전에 '생산력주의'와 산업계의 영웅을 찬양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히틀러는 사적인 대담은 물론이고 1932년 1월 26일 뒤셀도르프 기업가 클럽에서 한 유명한 연설을 통해서도 자신은 경제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사회진화론자임을 분명히 밝혔다. >거래를 하려면 히틀러와 무솔리니라는 품위 없는 이단아에게 고위직을 내줄 수밖에 없었지만, 보수주의자들은 그들을 영입한 후에도 자신들이 국가를 지배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유럽에서는 그렇게 벼락 출세한 정치 초보들이 정부를 이끈 예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 보수 세력은 한갓 오스트리아계 상병 출신인 히틀러나 풋내기 사회주의자 선동가인 무솔리니는 높은 자리에 앉는다 해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것이라고 계산하고 있었다. 교양있고 경험도 풍부한 보수 진영 지도자들의 기지가 없으면 정치를 이끌어갈 수 없으리라고 예상했던 것이다. >요컨대 파시스트들은 좌파와 권력을 나누지 않고도 대중의 지지를 받으며 정권을 유지해 나갈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고, 이 방법은 보수 세력의 사회 경제적 기득권이나 정치적 지배권에 위협을 가하지도 않았다. 또 보수 세력은 그들대로 권력의 문을 여느 열쇠를 쥐고 있었다. >보수주의자들은 준(準)입헌적 방법으로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입각시켰지만, 이렇게 구성된 연립 정부에서 파시즘 지도자들은 완전한 통치권을 갖지는 못했다. 준(準)합법적 방법으로 입각한 무솔리니와 히틀러에게 주어진 권한은 헌법이 정부 수반에게 허락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실질적인 측면으로 말하자면, 집권 초기에는 보수주의 동맹 세력과 연합을 이루어 통치하느라 권력이 한정되어 있었다. 파시즘 정당들이 연립 정부의 요직을 몇 석 차지하기는 했지만 이들은 내각에서 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곧 두 파시즘 지도자는 이 미약한 거점을 이용해 철저한 독재로 바꿔 나갔다. 준(準)헌법적 정권을 무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개인 독재로 바꿈으로써 국가를 완전히 장악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권력 강탈'이었다. >---- >로버트 O. 팩스턴, 파시즘 230~245p >실제로 폭력은 이제 뚜렷하게 공산당, 특히 그 군사조직의 일이 되어 버렸다. <적기>가 '나치 병영'에 맞서는 공세를 촉구하고 '나치 병영'의 주소들을 공개하자 돌격대가 모임을 갖는 수집들은 공산당이 선호하는 습격 대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9월 9일 공산당의 암살 부대가 '추어호흐부르크'라는 술집을 덮쳤다. 습격대가 권총을 난사하고 도망친 뒤 그곳에는 다수의 돌격대원들이 중상을 입고 신음하고 있었으며, 그들 중 몇몇은 곧 사망했다. >그로부터 4주 후에도 피바다를 이룬 사건이 있었다. 20명의 공산주의자들이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며 노이쾰른의 리하르트 거리로 행진해 들어왔다. 그들 중 몇 명은 돌격대 21중대가 모이는 음식점인 '뵈베' 앞에서 대열을 이탈하여, 사람이 많은 그 술집에 무차별 발포했다. 그 결과 10여명의 돌격대가 중경상을 입었고 한 사람은 사망했다. 그는 1931년 정치적인 유혈 충돌로 베를린에서 발생한 29명의 사망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의 폭력 행위가 늘어나는 것도 모든 계층의 국민들이 계속 나치즘 쪽으로 기우는 데 한몫을 했다. 그들이 늘어놓는 합법성에 대한 신앙고백,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 지도부의 민족주의적 파토스(pathos, 열정)가 효과를 드러냈다. 사회민주주의의 지도급 인사들조차도 소련이 조종하는 공산당이야말로 독일에 진정한 위험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비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나치주의자들에게 동맹자의 역할을 맡겼다.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나치주의자들을 "볼셰비즘의 해일에 대항할 수 있는, 독일에서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요새"라고 보았다. >----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318~319p >무솔리니는 이러한 통제불능의 파시스트 행동대원들 없이는 어떠한 정치적 힘도 발휘하기 힘들며 연립내각 협상에도 참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무솔리니는 위태로운 정치적 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조반니 졸리티|졸리티]]나 살란드라[* 안토니오 살란드라는 이탈리아 총리를 역임한 자유무역주의자이다.]와 같은 인물들에게 자신은 추종자들과 그들의 파괴적인 욕구에 거의 동조하지 않으며, 권력을 장악한 후에는 그들을 최대한 억제할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시켜줘야만 했다. 이와 동시에 자유주의자들과의 협상은 전략적 책략, 즉 단지 트로이의 목마를 이용해 적군의 요새에 들어가기 위한 수단일 뿐이며 일단 입성한 후에는 자유주의 정부를 전복시킬 것이라고 못박음으로써 일반 파시스트 당원들을 안심시켜야만 했다. 아마도 무솔리니 자신은 살란드라의 연립내각에 참여한 소수 파시스트 출신의 장관들이 제안한 평화롭고 모두가 함께 구성하는 정부를 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행동대원들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혁명을 원하고 있었다. 10월 24일 나폴리에서 개최된 파시스트 전당대회에서 4만여 명의 파시스트 행동대원들이 '[[로마 진군]]'을 요구했다. >로마 진군의 이념은 이탈리아의 역사에서 태동했다. [[마치니]], [[가리발디]] 그리고 이들의 민주주의 추종자들에게 로마로의 진군은 국가쇄신의 상징이었으며, '민중' 스스로 민중을 위한 이탈리아를 건설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1922년 10월 28일 파시스트들에 의해 시작된 로마 진군은 이러한 영광과 거리가 먼 것이었다. 무장도 제대로 하지 않은 세 무리의 젊은이들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수도인 로마로 집결했다. 이들 몇 군데의 우체국과 경찰서, 관청을 점거했다. 무솔리니는 스위스 국경과는 가깝지만 로마로부터 멀리 떨어진 밀라노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이 도박이 성공하리라고는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성을 잃은 왕은(아직까지도 분명히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군에게 발포 명령을 내려 반란군을 진압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에 무솔리니는 로마에 도착해 이탈리아 역사상 최연소인 39세의 나이로 수상에 취임했다. >로마 진군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하나의 분수령을 여겨지지 않았다. 어떠한 폭동이나 시위도 발생하지 않았다. 반복적인 일상생활은 계속되었으며, 언론에서는 이를 전후 이탈리아의 혼란과 폭력에 더해진 또 하나의 사건으로 묘사했다. 지난 몇 년 간의 혼란과 불안이 종식되고 평정을 되찾았다는 안도감이 확산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동대원들이 정부체제의 일부로 흡수될 것이라고 예상했으며, 이것이 '현실적' 이탈리아와 '정치적' 이탈리아의 격차를 줄이고 제도를 강화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믿었다. 졸리티와 같은 정치가들은 무솔리니를 은근히 무시했는데, 이들은 그의 천박한 매너와 불안한 처지를 기회로 그를 조종하고 충분히 이용하다가 그가 자신들을 필요로 할 때 제거해버린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무솔리니는 본질적으로 헌법에 따라 수상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파시스트 당원들을 고려해 쿠데타의 환상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행동대원들의 로마 시내 행진이 계획되었다. 이러한 모순적인 출범은 이후 2년 간의 변화를 결정지었다. 무솔리니는 재집권을 위해 유화정책을 폄과 동시에 자신이 여전히 파괴주의자임을 지역의 파시스트 지도자들과 그 추종자들에게 확인시켜주었다. (...) 이러한 상황에서 무솔리니는 안정과 질서, 평정을 되찾기 위한 요구들을 수용했다. 그의 정부는 하나의 '국가적 화해' 를 실천했다. 내각에는 3명의 파시스트 인사가 등용되었고, 그 밖에 자유주의자, 인민주의자, 민족주의자, 철학자 [[조반니 젠틸레]], 2명의 군장성이 임명되었다. 무솔리니는 행동대원들에게 엄격한 규율을 강요했다. 1923년 1월 무솔리니는 그 특유의 영악한 기질을 발휘해 파시스트 치안 담당 의용대를 창설했다. 이 단체는, 적어도 겉으로는 파시스트 혁명을 지원하기 위한 것처럼 보였지만, 일반 파시스트 당원들을 통제하고 로베르토 파리나치와 같은 라스[* 독재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지방 유력자]들의 권력을 제한하기 위한 목적으로 창설된 것이었다. 혁명과 폭력에 대한 행동대 지도자들의 집요한 요구는 무솔리니의 신망을 위협했다. >보수 세력의 존경을 끌어내기 위한 무솔리니의 노력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그는 남부 지역의 대토지 소유주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전후 소작인의 토지 점유를 허용했던 법령을 폐지했다. 교회를 고려해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을 공공장소에 다시 설치하도록 했으며, 전쟁 기간에 피해를 입은 교회들의 복구를 위해 거액의 자금을 지원했다. 1923년에는 교육개혁을 단행해 초등학교에서의 종교수업을 의무화했다. (...) 존경을 받기 위해 무솔리니가 단행했던 가장 중요한 조치는 1923년 2월 민족주의자들을 파시스트 국민당에 흡수시킨 것이었다. 엘리트주의자, 군주제를 지지하는 사람들, 보수주의적이고 의회에 적대적인 사람들로 구성된 민족주의자들은 대중의 지지를 받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정치적 관점 때문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군장성, 학자, 고위 공무원, 부유한 사업가, 법조인들과 같은 사회 고위층의 지원도 한몫 했다. >... >존경심을 끌어내기 위한 무솔리니의 노력은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무솔리니를 헌법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려는 자유주의자들의 목적도 달성된 것 같았다. 사회주의는 더 이상 위협이 되지 못했다. 가톨릭 세력 역시 아무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전후의 경제가 위기에서 벗어나 다시 번영의 단계로 접어들면서 당시 많은 사람들은 이탈리아가 정치적 안정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행동대원들의 생각은 정반대였다. 그들은 무솔리니가 의회에서 다수의 세력을 이용해 자유주의 체제를 완전히 붕괴시키고 오래전부터 약속된 혁명을 자신들에게 가져다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1924년 6월 초 일단의 파시스트 과격주의자들이 개혁사회주의 의원이 자코모 마테오티(Giacomo matteotti)를 납치해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사건이 벌어지기 불과 며칠 전에 마테오티는 으회에서 선거 기간에 자행된 파시스트들의 폭력을 목록으로 작성해 공개하면서 이를 비난하는 연설을 했다. 무솔리니에 대한 신뢰는 위기를 맞이했다. >무솔리니는 개입 사실을 증명하는 여러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마테오티 살해사건과의 관계를 부정했다. 그러나 무솔리니가 이 사건에 연루되었는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파시즘의 성격과 목적, 즉 파시즘이 합법적인 단체인지 아니면 사회를 전복시키려는 세력인지가 문제였다. 무솔리니는 매우 곤란한 딜레마에 빠졌다. 행동대와 그 단원들의 폭력을 부정하는 것은 가장 헌신적인 추종자들과 분리된 자신을 자유주의 체제의 처분에 내맡기는 것을 의미했고, 반대로 개입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면 파시즘이 범죄집단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는 함정에 빠졌다. 그는 자유주의적 동지들을 달래기 위해 과거 민족주의자였던 루이지 페데르초니를 내무부장관에 임명하고 파시스트 치안담당 의용대를 군대에 예속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은 무솔리니의 반대 세력들을 설득시키지도 못했을 뿐더러 행동대원들을 분노케 했다. >... >12월 31일 의용대의 지휘관들은 무솔리니에게 반대 정당에 어떠한 행동을 취하거나 아니면 공포정치를 포기할 것을 강요했다. 무솔리니는 더욱 곤경에 빠졌다. 그의 유일한 선택은 독재를 선포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 뿐이었다. 1925년 1월 3일 무솔리니는 의회로 가서 그의 정적들에게 "만약 파시즘이 범죄조직이었다면... 그 책임은 나에게 있다" 라고 선포했다.[* 번역에 따라서 "만일 파시즘이 범죄 단체라면, 나는 그 범죄 단체의 수장이다" 라고도 번역함] 그의 연설에 왕도, 반대파의 의원들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내전을 염려하고 있었다. 그들은 무솔리니의 의도가 정확히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순간에 그들이 보여준 우유부단한 태도로 인해 이후 자유주의 이탈리아는 실로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다. >... >1925년 이후에도 정부의 파시스트화 경향은 무솔리니의 전통 엘리트들에 대한 의존이 여전했던 만큼 제한적이었다. 공식적으로 무솔리니는 단지 수상일 뿐이었다. 1922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왕이 그를 수상으로 임명했던 것처럼 강한 압력만 작용한다면 (실제로 그렇게 했듯이) 왕은 언제든지 무솔리니를 사임시킬 수 있었다. 그 결과 무솔리니는 기존의 체제를 변화시킬 수 없었다. 비록 정권이 수사학적으로나 형태상으로 상당히 급진적이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그 실체는 매우 보수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게다가 일반 파시스트 조직원들은 국가기구를 운영할 만큼 충분한 자질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단지 이들 중 소수만이 행정 경험을 가지고 있거나 교육을 받았을 뿐이었고, 다수는 기질적으로나 지적으로 공직을 수행하기보다는 악다구니에 가까운 일에 더 적합한 그런 사람들이었다. >전통 엘리트 계층과의 타협이 필요했다는 사실은 1월 3일 이후 무솔리니의 주요 임무가 파시스트 행동대의 권력과 독립성을 파괴하는 것이었음을 의미했다. 무솔리니의 전략은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2월에 그는 크레모나의 라스로서 비타협적인 성향의 지도자인 로베르토 파리나치를 파시스트 국민당의 당비서로 임명했다. 이러한 결정은 표면적으로는 행동대의 승리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 이는 독이 든 술잔과 같았다. 파리나치에게는 책임감 있게 행동할 것과 (종종 파리나치 자신도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했던) 당을 통제할 것이 요구되었다. 10월에 피렌체의 행동대가 소요를 일으켜 8명의 자유주의자들을 살해했다. 파리나치는 그들의 행동이 '합법적인 분노'의 결과였다고 해명했다. 무솔리니는 그를 신랄하게 비난했고, 몇 달 후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에 충분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고 확신했을 때 그를 사임시켜버렸다. >파리나치를 대신해 파시스트 국민당의 당수로 임명된 아우구스토 투라티(Augusto Turatk)는 비교적 타협적인 인물이었다. 무솔리니가 원하는 바에 따라 당 내부의 숙청을 단행해 1926~1929년 대략 6만 명의 당원(대부분이 젊은 행동대원들이었던)을 추방했다. 대부분의 지역구는 '존경을 받을 만한' 인물들로 완전히 재편되었다. >---- >크리스토퍼 듀건, 미완의 통일 이탈리아사 288~300p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경우에는, 사회민주당마저 민주주의에 가장 위협적인 세력으로 공산당을 꼽을만큼, 독일 공산당의 정치깡패인 '붉은전사동맹'에 의한 적색 테러가 심각했다. 이탈리아의 경우 '붉은 2년' 당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폭력적 소요사태가 빈발하였고, 당시 파시스트들이 이에 맞서 싸웠다. 자유주의 리버럴과 같은 보수세력들은 구시대적인 모습의 한계로 대중정치에 미숙했고, 자신들만의 힘으로는 공산주의 확산의 위협에 맞설 수 없다고 판단한 경우에, 대중 선동 잘하는 파시스트 세력을 차악으로 이용하기로 결정하였으며, 파시스트들을 이용해서 공산주의를 제거하고 나서 파시스트들을 토사구팽하거나 제도권에 편입시켜서 온건하게 길들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보수주의자들은 파시즘의 집권을 승인하는 대신에 파시즘이 극좌적 성향을 정리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파시즘의 지도자들은 권력이라는 목적을 위하여 자신들의 혁명적 이상을 기꺼이 저버렸고, 실용적인 접근을 취하면서 보수세력과 타협하게 된다. 그리하면서 보수세력과의 타협에 실망한 돌격대나 파시스트 행동대처럼 급진혁명을 원하던 과격분자들의 반발을 잠재우고 안심시키려고 노력했고, 집권후에는 이들을 숙청했다. 독일의 경우,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돌격대를 정리할 것을 요구하였고, 히틀러는 마침 너무 나대면서 히틀러 자신의 권위에까지 도전했던 [[에른스트 룀]]과 돌격대를 [[장검의 밤]] 을 통해 숙청하였다. 이탈리아의 경우 무솔리니가 파시스트 생디칼리슴 노동 운동가와, 파시스트 행동대원들을 좌천시키거나 해임, 탈당시켜서 숙청하였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국왕에게 베니토 무솔리니가 총리로 임명되었고,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아돌프 히틀러가 총리로 임명되면서 파시즘은 집권에 성공하였다. 파시즘과 전통적 보수세력과의 관계는 보수세력의 구심점의 존재 여부로 갈라지게 된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노환으로 사망으로 보수파의 구심점이 사라진 나치 독일의 경우에는 파시스트 세력이 완전한 승리를 거두게 되며, 전황이 불리해지자 보수파가 히틀러 암살시도와 쿠데타로 최후의 저항을 시도하였으나 모두 진압당하고 처형된다. 반면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국왕이 보수파의 구심점으로 존재하였던 이탈리아의 경우에는 전황이 나빠지자, 무솔리니가 탄핵당하게 된다. 또한 천황이라는 절대적인 위상의 구심점이 존재하였던 일본제국의 경우에는 2.26사건 당시 황도파의 쿠데타에 천황이 비협조하여 쿠데타가 실패하고, 파시스트인 황도파 청년 장교들과 [[기타 잇키]]는 처형 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