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통일신라 (문단 편집) == 정치 == 신라는 통일 직후[* 신라 중대 시기.]에는 [[신문왕]](제31대)의 대대적인 공신 [[숙청]]을 거치면서 나름 꽤 강력한 왕권을 자랑했다. 그러나 국가의 재정비 및 절대 왕권 확립 과정에서 [[귀족]]들의 반발이 일어나 절대 왕권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고, 이후 신라 하대에 들어서는 너도나도 왕위를 노리고 [[반란]]과 [[쿠데타]]를 일으킴에 따라 차츰 혼돈 국면으로 치닫게 된다. 그럼에도 신라는 바로 무너지지 않았는데, 오히려 [[반란]]을 진압하고 나서 일부 지역에 면세의 혜택을 줄 만큼 지방까지 행정력이 미칠 역량이 충분했고 200여 년 이상 통치를 이어갔다. 신라가 통일 왕조로서 멀쩡히 한반도를 지배한 기간만 떼놓고 따지면 676년~900년 정도인데, 224년이면 중국 역대 왕조와 비교하면 [[청나라]], [[당(통일왕조)]], [[명나라]] 다음으로 꼽힐,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장수 왕조로,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신라 중대~하대의 정치가 보편적 시각으로 보았을 때 마냥 혼란하고 취약하기만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후대 고려 초 중기보다 더 지방 통제력이 강한 중앙 집권적 국가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고려시대, 특히 고려 초기는 태조 왕건의 역대급 포용책으로 인해 지역별로 정치 분파가 생성 대립하는 성향이 강했고, 지방에서 달려온 세력에 의해 수도의 정치가 뒤집어지는 일이 매우 잦았다.] 그러나 오랜 기간 [[골품제]] 등의 고대 국가적 병폐가 쌓인 끝에 말기인 9세기 후반에 이르면 일개 지방의 [[독립]] 선언도 못 막고 [[세금]]도 못 걷는 궁색한 지경으로 전락하였고 그 이후엔 다들 잘 아시다시피 견훤의 경주 함락으로 치명타를 입었으며 서기 935년에 마지막 왕인 [[경순왕]] 김부가 고려에 나라를 바치는 것으로 그 왕조의 문을 닫게 된다. 하지만 국가 체제는 더욱 확고해졌고, 모든 지역의 [[종교]]를 국가가 주관하는 등 [[한민족]]으로서의 인식이 자리잡혀가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부터다. 심지어 후고구려와 후백제 역시 신라 출신이 세운 나라이며 이성계 역시 족보상으론 신라 귀족으로 되어 있다. 단, 후고구려와 태봉의 나머지 건국층은 신라6부의 후예가 아니었고 전주 이씨의 가문 조상이 정말로 신라 귀족이었을 가능성은 희박함을 알아두어야 한다. 통일신라 당시 황해도 일대를 제외한 신라 영역 전체에 오히려 고려 전기의 그보다도 훨씬 강력한 신라의 밀도 높은 직접 지배가 이어져 옛 고구려, 옛 백제 유민의식이 있었음에도, 제대로 행세하려면 호족들은 통일신라 체제와의 연관성을 내세워야 했던 걸 두고, 정말로 신라가 삼국 유민들의 정체성을 완전 희석했다고 착각하면 안 된다. 그렇게 신라 체제가 선망의 대상이 되었음에도 타도와 배제의 대상 또한 되는 현상 자체가, 신라의 한계를 말한다. 특히 골품제가 아쉽긴 한데, 그걸 두고 신라가 태생부터 악하거나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곤란하다. 사실 어떤 사회든 [[신분제]]가 제대로 개혁되려면 [[머리]] 꼭대기부터 한 바탕 뒤집어져야 하므로, 골품제는 결국 신화로 기억되는 [[고대]]부터 국가를 쭉 유지했던 신라 천 년 역사의 정체성이자 어쩔 수 없는 멍에였다..[* 요컨대 [[고구려]]나 [[백제]]가 한반도를 통일했더라 손 쳐도 이런 신분 질서가 완화되길 기대할 순 없다는 이야기. 고구려나 백제도 신라의 골품제 비슷한 신분 제도가 있었다. 고구려의 고추가나 백제의 대성팔족 등은 어떻게 보면 골품제보다도 더 심한 적폐 세력이었다.] 후세의 한국인들이 아는 이것을 신라 국왕들이 몰라서 훗날 [[후삼국 시대]]가 온 게 결코 아니었다. 적어도 신라 왕실은 그 기능을 유지하는한 진골층의 억제와 지방민 위무를 포기한 바는 한번도 없었다. 오히려, 골품제의 근본적 개편을 끝까지 거부해서 신라 국왕들의 꾸준한 개혁을 모조리 좌초시켜버려 신라가 망하는 원인을 제공한 원흉은 모두 진골층이 큰 문제였음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국가 체제에 대해 더 설명하자면 당시 [[동아시아]] 각지에는 [[당나라]]의 새로운 행정 체계인 율령제가 퍼져나가고 있었다. 율령제는 신라에도 영향을 주긴 했으나, [[견당사]]를 통해 급격히 [[중국]]화한 [[일본]]이나 당의 행정 체계를 거의 본뜨다시피 한 북쪽의 [[발해]] 등과 비교해볼 때 신라는 당이 성립되기 훨씬 전부터 구축한 통치 체계를 꾸준히 계승하고 있었다. 하대에도 계속된 이 같은 [[전통]]의 고수는 신라의 정부 체제가 기존의 갑절 이상 넓어진 영토에서도 충분히 기능할 정도로 높은 수준을 가지고 있었다는 소리이기도 하지만 끝내 골품제 혁파 등 구습 혁파에 성공하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을 수 밖에 없다. 골품제가 신라 고대부터 이어진 것이라 완전히 바꾸지 못한 것이 아쉽기는 하나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다 좋은데 유독 [[정치]]판의 [[막장]]급 다툼을 오점으로 평가하며 신라를 깎아내리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왕위쟁탈전은 어느 나라든 규모의 차이가 있을 뿐 군주제 국가에선 언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며 고구려, 백제, 신라도 모두 겪었고, 특히 태종 무열왕의 방계 왕족인 [[김주원(신라)|김주원]], [[김헌창]], [[김범문]]의 3대 연속 [[반란]]은 [[고려]] [[무신정권]] 이전까지 한국 반란사의 한 획을 그었다. 그나마 한국사에서 왕위 쟁탈전이 많이 사그러든 왕조가 조선이었다.[* 조선에서는 왕실에서 암투는 있었지만, 왕자의 난과 이인좌의 난을 제외하면 왕위 쟁탈을 위한 내전이 일어나지 않았다.] 《삼국사기》에서도 4명의 왕이 반역자라며 정치판을 막장으로 만들었다고 김부식이 혜공왕(제36대) 시절 때 정치적 상황이나 반란을 평가하기도 했다. 해구‧연신의 난[* 웅진시대 문주왕, 삼근왕 때 백제에서 일어난 반란.]이나 [[간주리]]의 난도 막판에 고려가 낫다고 했다. 그런데 이건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거나 옆나라 당과 [[일본]]([[헤이안시대]])과 비교해도 딱히 큰 차이는 없다.[* 당쟁 등을 언급하면서 [[한국사]]를 분쟁의 역사로 몰아세우는 것은 [[일본 제국|일제]] [[식민사관]]이 즐겨 써먹던 여론몰이 수법 중 하나이나, 정치가 있는 곳에 다툼은 필연이다. [[중국]]만 해도 60여 개에 달하는 왕조들의 [[평균 수명]]은 65년 정도이며, [[시황제|진시황]] 이후의 통일 왕조 중에서 송나라만이 북송과 남송을 합쳐 300년을 간신히 넘겼을 뿐이다. 그리고 [[일본]]의 경우 [[천황]]제를 1,000년 이상 존속시켰다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귀족]] 세력과 [[다이묘]]([[막부]])의 정치적 농단을 그저 지켜만 보다가 가끔씩 쫓겨나거나 죽어나가는 [[마스코트]]에 불과하였고, 결정적으로 무슨 [[번(제후국)|번]] 무슨 [[막부]] 하는 세력들 모두가 천황의 명목상 신하이기는 하되 실상은 서로 항쟁하는 [[독립]]된 국가나 다름없다. 즉 따지고 들면 통치 체제가 외침과 내란에 맞서 건재하게 유지됨에 있어서 [[한반도]]만큼 안정적인 지역은 오히려 찾기 힘들다. 당장 신라 이후 한반도의 국가들이 건국부터 멸망까지 대항했거나 사대했던 국가들만 따져봐도 이는 간단하다. 신라는 [[수나라]]와 [[당나라]], 고려는 [[북송]]과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조선은 [[명나라]]와 [[청나라]].] 오히려 마지막 결정타인 [[후삼국시대]]가 개막하는 부분을 제외하면 다음 시대인 고려 초중기에 비해 정치는 안정적이었던 측면도 있는데, [[김헌창의 난]] 등 수도 외부에서 주도해 일어난 반란이 [[서라벌]]을 뒤집어버린 경우는 후삼국시대 이전까지는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신라 자체의 역사로 한정지으면 통일신라의 최후반 100여 년간은 그 전대와 비교해 집권 귀족 세력 간의 권력 다툼에 다소 심하게 치중했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위에서 설명했다시피 거기서 그대로 망하지 않고 재도약을 꾀할 가능성은 내재하고 있었으나 막판의 반란이 너무 대규모라 이겨내질 못했다. 그리고 갈등의 과정이 오히려 제도의 개혁으로 이어져야 하나 제도의 개혁과는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던 점도 있었다. 당장에 문무왕에서 신문왕으로 이어질 때 많은 반란들이 일어났으나 녹읍이 폐지되고 관료전이 지급되어 대토지화를 차단한다거나 독서삼품과를 넘어 과거제가 자리잡는다던가 하는 것이 800년대 신라 말에는 없었다. 이는 고구려의 5부 귀족과 백제 8성씨 귀족들의 잦은 반란으로 개혁이 안되는 것과 비슷하다. 예를 들자면 고려말 엄청난 정파 갈등 속에 위화도 회군을 시작으로 고려 말은 온갖 폐단을 다 정리하게 되는데 사전 혁파와 과전의 시행과 부곡민 체제 폐지와 군현 체제 정립과 그리고 무과의 도입 등 온갖 제도를 도입했으나 결국 고려는 문을 닫고 조선이 세워진다. 그야말로 정쟁이 있는 곳에 다툼이 있다는게 마냥 옳으면 위와 같은 개혁도 없이 무의미하게 진행되는 후삼국시대와 무신정권과 임오군란도 옹호받아야 한다. 악습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상황에서 혼란의 상황만 반복하면 그야말로 자멸일 뿐이다. 세습과 추천이 남발되어 능력이 높다거나 혹은 전공을 세우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개혁을 하고 의견의 대립을 하면 모를까, 한번 자리를 먹기 시작하면 계속 먹거나 입맛에 맞는 사람들을 계속 뽑고 기분에 따라 보기 좋아하는 사람들 혹은 말과 행동을 마구 바꾸는 사람들의 대립과 싸움은 그야말로 무의미한 대립과 싸움일 뿐이고 파괴일 뿐이다. 800년대 신라의 정치적 혼란에 대한 비판은 삼국사기가 부각시켰는데, 이는 고려가 전조인 신라와 차별화를 두기 위한 것으로, 전 왕조의 실정을 부각시키고 그 몰락을 앞당겨야 현 왕조의 정통성을 높일 수 있어서였다. 이후 조선 왕조가 들어서자 800년대 정치적 혼란은 문성왕 시기부터 헌강왕 시기를 마지막 치세로 두어 지적을 하지 않다가 오히려 후삼국시대가 시작하고 최치원이 등장하기 시작한 900년대를 정치적 대혼란기와 몰락으로 삼았다. 이는 고려 왕조의 정통성을 좀 깎아내리기 위한 것이고 신라를 재평가한 것이다. 예를 들어 조선 왕조도 고려 왕조의 무신정권 시절을 난신적자가 판치는 대혼란기로 여겼다. 그러나 현대에는 무신정권 시절보단 원 간섭기 시절을 몰락의 시점으로 본다. 당시의 임금과 인물에 대해서는 [[신라/왕사]], [[신라/인물]] 참조고 해보는것이 좋다. 여담이지만 통일신라 중기 [[무열왕]] 직계 국왕들([[무열왕]]~[[혜공왕]])의 수명들이 하나같이 짧은 편이다. 50대에 사망한 무열왕(59세), [[문무왕]](56세)를 제외하고 [[신문왕]]부터 혜공왕까지의 무열왕 직계 국왕들은 50세를 넘기고 생존한 임금이 없다.[* 혜공왕은 어린 나이에 즉위해 피살당했고, 나머지 임금들은 어린 나이에 즉위해서 오래 왕위를 지키다 세상을 떠나거나 해서 아무튼 50세를 넘기지 못했다.] 그래서 조선 후기에도 비슷한 이유로 왕손이 적어진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