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토번 (문단 편집) === 정복 사업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ibetAD800.png|width=600px]]}}}|| || 토번 제국의 영토. 현재 [[티베트 자치구]] 영토 4배에 육박한다. || 토번의 정복 활동은 계속되어 왕국의 힘은 8세기 후반 더욱 확장되었다. 토번은 [[파키스탄]] 북부와 [[네팔]], [[인도]] 북부와 벵골과 [[방글라데시]]는 물론 중국의 간쑤성(甘肅省)과 쓰촨성(四川省) 서부 지역을 점령함으로써[* 안사의 난 때 하서와 농우 지역의 군대가 반란 진압에 투입된 틈을 이용해, 하서 및 농우 지역을 점령해 나갔다. 이후에는 안서 및 북정 지역을 빼앗는 데 성공.] [[실크로드]]를 장악, 거대한 국가로 발돋움하였고 763년 당이 안녹산의 대란으로 혼란에 빠지자 공물을 보내지 않았음을 빌미로 삼아 20만 대군을 몰아 당군과의 수차례에 걸쳐서 정면 대결을 시도, 여기서도 승리를 거두며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점령했고 자신들이 당의 황제를 마음대로 세울 정도로 엄청난 위세를 떨쳤다. 토번의 장안점령은 토번이 동북아시아 최강국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사건이었다. 781년에는 [[상치싱얼]]이 월아천 전투 대승 뒤 [[돈황]]을 점령했고 790년에는 [[줘치수]]가 북정을 점령한다. 그러나 791년 서역 전역에서 [[위구르]]에게 패하면서 조금씩 영향력이 줄어들더니 800년대 초반부터는 남조 왕국에서까지 견제를 받았다. 결정적으로 아바스 왕조와의 대결에 국력을 소모하고 당, 위구르와의 전쟁에서도 큰 성과를 얻지 못해 결국 당과 화친했다. 결국 토번과 당나라는 820년 협정을 맺어 국경선을 확정함으로써 서로 무력 충돌을 피하기로 했다. 이때의 확정조약은 티베트의 수도 [[라싸]]의 조캉사원[* 대조사(大照寺)라고도 한다. 문성공주가 세웠다.] 앞에 당번회맹비라는 내용으로 새겨져 지금까지 있다. 여담이지만 '이 비문이 세워진 날부터 토번인은 토번인의 땅에서, 당나라인은 당나라인의 땅에서 각자 영원히 행복하게 살 것이다.' 라고 쓰였고 [[1950년]] 대지진으로 국경 지방의 비석이 파괴되기 전까지 이 비문은 그 역할을 훌륭히 이행하였다. 다행히 [[라싸]] 지방의 당번회맹비는 아직 무사하고 조사도 가능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