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충청수영 (문단 편집) == 상세 == 1509년에 [[성곽]]을 축조하였는데, 길이 3,174척(1,650m), 높이 11척, 우물 4, 못 1, 옹성 5, 성문 5이었다. 성내에 있던 건물은 동헌, 아사, 영보정 등 33동 312간에 달하였다. [[임진왜란|임란]]부터 18세기 중반 [[영조]] 대에 이르기까지 북문과 원산창, 군향고, 관노비청, 교방, 십물고, 현고, 양무고, 대주원과 진휼고 등 성내의 많은 영사와 창고등이 건축되고 보수되어왔다. 이러한 내력이 충청수영 사례집에 개략 기록되고는 있으나 그 규모와 위치, 건물용도, 건축 과정을 주도한 장인, 공역에 투입된 공장수나 물목 등에 관한 의궤가 없고 다만 [[수영]]을 운영해온 재정적 상황을 밝힌 사례들로 구성되어 있다. 충청수영은 왜란과 같이 남부에서 침입이 발생할 경우, 삼도수군통제영에 소속되어 통제사의 지휘를, 호란과 같이 북부에서 침입이 발생할 경우에는 삼도수군통어영에 소속되어 통어사의 지휘를 받았다. 상황에 따라 상급 부대가 바뀌었던 셈. 19세기 들어 이양선이 많아지는 시점에 와서는 이양선을 감시하는 역할도 맡았다. 임진왜란 시기 충청수사들은 [[남해]]안보다는 [[경기도]] 방어를 주요 임무로 맡았기 때문에 임진왜란기에 충무공 [[이순신]]의 주전장인 남해바다에서는 어찌보면 당연히 전라수군이나 경상수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눈에 많이 띄진 않았으나, 그래도 나름 여러 전투에 참전했다. 충청 수사 정걸(丁傑)은 이순신의 한참 선배였으나, 전쟁 초기 [[전라좌수영]]의 조방장으로 이순신 휘하에 소속되어 있었고, [[옥포 해전]], [[한산도 대첩]], [[부산포 해전]]에 참전했으며, 1593년에 무려 79세의 나이로 충청 수사에 임명된다. 충청수사로 보임된 뒤에는 [[행주대첩]]과 서울 탈환전에 참여했다. 사실 행주대첩도 충무공 이순신은 마치 정유재란 당시의 순천왜성 공략 때처럼 수륙협공을 주장했으나, 조정에서는 들어주지 않았고, 충청수영만 합류하여 정걸이 보급 위주로 활약하여 공을 세운다. 이후의 충청수사인 [[선거이|선거이(宣居怡)]] 역시 이순신 휘하에서 둔전을 주로 하고 한산도대첩과 장문포 해전에서 공을 세웠던 인물로, 충청병사에 이어 충청수사로 임명된다. 이후 충청수사가 되는 [[최호(조선)|최호(崔湖)]]는 함경도에서 [[북관대첩]] 이후 함경도에서 소탕전을 하다가 충청수사가 되는데, 현재의 충청남도 지역이 [[이몽학의 난]]의 주전장이 되기 때문에, 홍가신과 함께 이몽학의 난 진압에 주력했다. 이후 정유재란이 발발한 다음에는 2대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 휘하에서 [[칠천량 해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한다. 그 이후의 충청수사는 [[불멸의 이순신]]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이순신의 부관이자 [[임진왜란]]기 [[순천]] 부사였던 [[권준]]이 후임으로 임명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