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완 (문단 편집) == 생애 == 1889년 2월 16일 경상도 경주부 부내면 교리(現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69번지)에서 아버지 최현식(崔鉉軾, 1854 ~ 1928. 6. 20)과 어머니 [[류(성씨)|풍산 류씨]](豊山 柳氏, 1851 ~ 1932. 10. 1)[* [[류성룡]]의 후손으로, 류도휘(柳道彙)의 딸이다.] 사이의 4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경주군 부내면 교리(現 경주시 교동) 68번지 최부자댁 [[https://www.gyeongju.go.kr/gyochon/page.do?mnu_uid=2988&|뒷 새댁]]으로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639&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39753&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이주해]] 분가했다.[* 현재 이 자리에는 최완 고택을 비롯해 [[https://naver.me/FgiSiuBR|고운님오시는길찻집]]이라는 찻집이 들어서 있다.] 위로 형 [[최준(1884)|최준]], 최윤(崔潤, 1886. 3. 26 ~ 1969. 10. 22)[* 초명 최영희(崔泳禧).], 아래로 최순(崔淳, 1892. 10. 15 ~ 1948. 3. 22)[* 초명 최영희(崔泳禧).]이 있었다. 아버지 최현식은 경주 교촌 최부잣집 11대로, 1888년(고종 25) 식년 [[진사|진사시]]에 3등 19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88_037994|입격한 뒤]] [[서오릉|경릉]](敬陵) [[참봉]][*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32_01A_12A_00030_2004_167_XML|#]]]을 거쳐 1900년 산릉도감 감조관(山陵都監監造官)[*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37_11A_27A_00060_2005_187_XML|#]]] 등을 역임했다. 1909년 10월 [[안희제]]·[[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876|이동하]](李東廈)·[[남형우]]·[[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7965|이시열]](李時說)·[[윤병호(정치인)|윤병호]]·[[서상일]]·[[박중화]] 등 8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신민회]] 계열의 비밀 청년단체인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6623&docId=795931&categoryId=46623|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하고 당원으로서 국권회복을 위해 지하독립운동을 전개했고, 같은 달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6623&docId=551526&categoryId=46623|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도 신입회원으로 [[http://db.history.go.kr/id/ma_011_0060_0250|가입했다]]. 그러나 1910년 8월 끝내 [[경술국치]]를 당하자 [[청나라]]로 망명했다. 이후 [[중화민국]]과 조선을 수시로 넘나들다가 1919년 [[3.1 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했고, 형 최준의 부탁으로 현금 2만원을 휴대하고 상하이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http://db.history.go.kr/id/haf_086_0090|조달하기도 했다]].[* [[http://db.history.go.kr/id/haf_086_0090|1919년 5월 일본 외무성 기록 騷蜜 제2219호]]에 '경상북도 경주 부호 최준(崔俊)의 동생 최완(崔浣)이 2만원의 현금을 휴대하고 상해에 나타났다'고 기재되어 있다.] 그해 4월 13일 임시정부 제2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차장(次長)제를 폐지하고 위원제를 채택할 때 임시의정원 의원 및 재무부 위원에 [[http://db.history.go.kr/id/ij_045_0030_00010|선임되었고]], 임시정부 조사원으로도 활동했다. 1919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조선 내 각 지방의 유력자, 재산가, 학교, 종교 등을 조사할 때 [[경주시|경주군]] 지역의 유력자로 보고되기도 했다. 1920년 8월 21일 [[대구광역시|대구부]] 금정(現 [[대구광역시]] [[중구(대구)|중구]] [[태평로(대구)|태평로]]) [[타나카]]여관에서 [[최시형]]의 장남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391|최동희]](崔東曦)·이근호(李根鎬) 등과 만나 독립운동 방법을 [[http://db.history.go.kr/id/su_005_1920_09_03_0210|논의하다가]] 곧 체포되었고, 그해 9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에 대해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처분]]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639&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39753&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받고]] 출옥했다. 1921년 이후에는 경제 사정이 어려워져 더이상 [[상하이]]에 체류할 수 없게 되자 [[http://db.history.go.kr/id/sa_023_0070_0010_0020|귀국했다]]. 1923년 [[경기도]] [[경성부]]에서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6623&docId=527635&categoryId=46623|혁청단]](革淸團)이 결성되자 이에 입단했고, 1924년 임원에 [[http://db.history.go.kr/id/hdsr_008_0020_0010_0030|선출되었다]]. 1925년 [[주식회사]] 대동사(大東社)에서 [[이사]]를 [[http://db.history.go.kr/id/hs_001_1925_08_14_6190|역임했다]]. 1926년 상하이에 잠시 체류해 있던 중 당시 경주경찰서장 이노우에 시게루(井上茂)[* 1925년부터 1927년까지 경주경찰서장으로 근무하면서 최준에게 붓글씨를 배운다는 핑계로 3년간 최부자댁을 출입했다.] 경부(警部)로부터 '아버지가 위독하니 빨리 귀국하라'는 형 최준 명의의 가짜 편지를 받았고, 이에 형이 보낸 편지로 생각해 급하게 귀국했으나 귀국 직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혹독한 고문의 여독 및 오랜 망명생활로 인한 지병 악화 등으로 가출옥했지만 1927년 1월 3일 순국했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경주 최씨 사성공파]][[분류:경주시 출신 인물]][[분류:1889년 출생]][[분류:1927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