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세진 (문단 편집) == 생애 == 최세진은 1849년생이며 함경북도 길주군 장백면 양포리 출신이다. 그는 구한말 때 대한제국군 시종(侍從)을 지냈으며, 1907년 9월 1일 대한제국군이 강제해산되자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이범윤]], 김영준(金榮璿) 등과 상의하여 의병 500명을 결성했다. 이후 함경북도 경원군 장태곡 등지에서 수차례 일본군과 교전했으며, 얀치헤에서 의병들에 대한 군사훈련을 실시하였으며, 1919년 3·1운동 직후 의병을 이끌고 양재구(養才溝)에서 활동하였다. 1919년 4월 대한국민노인동맹단(大韓國民老人同盟團)의 단원으로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했고, 1923년 이범윤·[[김좌진]]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유지해야한다는 내용의 「재만 유지의 경고서」를 발표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하얼빈 일본총영사로부터 3년 간 재류금지(在留禁止) 처분을 받았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최세진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