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북 (문단 편집) == 평가 == 모난 성격과 알코올 중독 때문에 인망이 좋지않아 평생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지만 현대는 물론 당대 조선에서도 인정받는 화가였다. 실제로 최북이 평양과 동래에서 그림을 그려서 팔겠다고 내놓으면 사람들이 이를 보고선 감탄을 하며 서로 사가려고 했을 정도였다. 심지어 동래를 방문한 일본인 상인들도 최북이 그린 그림을 보고는 감탄하며 사갔다. 조선후기의 문인 화가인 조희룡은 최북을 [[김득신]], [[이인문]], [[김홍도]]와 같은 반열에 놓았으며, 최북의 또래인 문인 정범조도 최북을 [[정선(화가)|정선]], [[심사정]]에 견주었다. 특히 청백리인 정승 신광수를 존경하여 그와 같이 한라산을 등반할때 한라산의 경치를 그린 설산조치도를 그리고 나서 돈한푼 받지 않고[* 사실 신광수는 정승까지 지냈음에도 어머니를 모시고 살 단칸방조차 없을 정도로 가난하여 최북의 그림을 살 돈이 없었다.] 신광수에게 선물하여 신광수를 기쁘게 했다. 산수화에 능해 '최산수'라고 불렸으며 [[남종화]]의 화풍을 계승해 상상력만으로 절경을 그려냈다. 화훼, 짐승 등을 그리는 데도 재주가 있었는데 특히 [[메추라기]]를 잘 그려 최메추라기라는 별명도 있었다.-- [[박용택/별명|별명왕?]] -- 위에 언급한 개차반 성격에 비해 화풍 자체는 부드러운 편이다. 손가락에 [[먹]]을 묻혀 그림을 그리는 지두화(指頭畵)라는 당시 청나라 화법을 사용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