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황 (문단 편집) == 역사 == || [[파일:external/blogimg.goo.ne.jp/85f88c0300e2972c63d2a8be671c931b.jpg|width=100%]] || || 그림 속 여자들이 입은 옷은 [[쥬니히토에]]라는 옷이다. 남자들이 입은 옷은 [[소쿠타이]], 머리에 쓴 관은 [[칸무리|스이에이노칸]]이다. || 천황은 명목상으로는 임금이지만 실제 권력은 없는 [[허수아비|명목상의 군주]]였던 기간이 긴 것으로 유명하다. 실권은 셋칸이나 막부, 군부가 잡고 상징적인 존재로서 군림한 적이 대부분이다. 사실 일본 역사 초창기에는 주변 다른 나라들처럼 천황이 실제 군주로서 통치를 했고, [[아스카 시대]]에는 중국식 제도를 본따 [[율령]]을 도입했다. 즉, 일본도 고대, 헤이안 시대 초기까지는 동시대 [[고구려]]나 [[백제]], [[신라]]와 크게 다를 바 없이 천황이 직접 율령에 의한 정치를 하는 고대 중앙집권제 국가였다. 그러나 [[헤이안 시대]] 중기인 858년, [[후지와라노 요시후사]](藤原良房) 이래로 [[후지와라]]가 [[외척]]으로 권력을 모두 독점하면서 귀족 섭관정치로 변모하며, [[국풍]]이 발달하면서 한국이나 중국과의 교류도 감소한다. 이때부터 중앙집권이 약화되고 일본 특유의 이중적인 권력 체계가 발달하기 시작했으며, 이렇게 약 1000년 동안 [[대정봉환]]과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의 천황은 실제 정치는 셋칸, [[간파쿠]], [[쇼군]] 등에게 권력을 위임하고 명목상 일본 정부인 조정의 수장으로 수도인 [[교토]]나 직할 영지 등 일부 지역에서만 직접적인 통치를 했다. 다들 알다시피 무사 정권은 천황 자체를 쫓아낸다거나 찬탈하지는 않고 '신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았다'는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 그대로 두었다. 물론 일본 역사상에도 [[또라이]]가 [[원술|없는 건 아니라서]] [[타이라노 마사카도]]는 교토와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던 반도 땅[*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중앙의 권력 지배가 좀처럼 닿지를 않아서 교토 조정이나 교토 서쪽 지역 주민들에게는 아즈마에비스(東夷)라 불리며 '오랑캐' 취급을 받았고, 그런 탓에 지방관들이 중앙의 권력이 미치기 어렵다는 점을 악용해서 좋을 대로 해먹는 일도 많았다.]에서 거병해 본인을 신황이라 일컬으며 천황이 되려고 시도한 적이 있으나,[* 타이라노 마사카도가 신황을 자처한 데에는 자신이 50대 [[간무 덴노]]의 4대손이라는 것도 중요한 요인이었지만 동시에 후지와라노 다다히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고금의 역사를 살펴봐도 힘이 있는 자가 한 나라를 차지하는 일은 흔하디 흔한 일이었다. 바로 얼마 전에 [[요나라|대거란국]]도 [[발해]]를 멸망시키고 그 땅을 차지하지 않았느냐?'''"라는 다분히 패도지향적인 이유도 드러내고 있었고, "'''내가 가진 이 힘도 하늘이 나에게 주신 힘이니 내가 이 일본의 절반을 차지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라고, 일본 전통관으로 보자면 이미 [[황적이탈]]돼서 딱히 정통성이 없는 자신에 대해 일종의 중국식 천명사상도 드러내고 있었다.] 결국 조정에서 보낸 쇼군[* 이때의 쇼군은 [[막부]] 시대의 쇼군과는 다른 개념으로, 천황이 임명하는 단순한 무관직에 불과했다.]의 군대에 토벌당해서 죽었다.[* 이마저도 중앙에서 보낸 군세에 의해서 진압되었다기보다는 타이라노 사다모리(마사카도의 친척으로 역시 간무 덴노의 후손, 간무 이세 [[헤이시]]의 선조), [[후지와라노 히데사토]] 같은 현지 호족들이 주축이 된 군세에 의해서 진압되었다.] 또한 현대에는 [[옴진리교]]의 교주인 [[아사하라 쇼코]]가 '''천황을 폐위'''시키고 자신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고 일본 정부와 천황가를 전복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실패했고, 2018년(平成30) 7월 6일 오전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타이라노 마사카도는 일본 천황의 존재와 그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일본의 역사, 사회에서 놓고 볼 때 좀 삐딱하게 말하면 '머리가 깬 사람'에 가까웠다. 일본의 국왕인 덴노는 [[맹자]]의 천명사상, 역성혁명론으로 대표되는 동아시아 유교적 정치문화 측면에서 보면 꽤나 이질적인 존재이다. 한국이나 중국, 베트남 등 동아시아 다른 왕조 국가들과 달리, [[진승]]의 [[왕후장상 영유종호]]라는, 민중에 의한 혁명과 왕조 교체를 긍정한(나아가서는 전근대적인 신분제에 대한 부정으로까지 이어질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게 되는) 그 유명한 말이라던가 "정치 똑바로 못하면 하늘과 백성의 이름으로 왕을 갈아치워야 한다"는 천명사상, [[역성혁명]]론으로 대표되는 맹자의 사상이 유독 현실 정치에서 좀처럼 통용되지 않았던 경우가 일본의 국왕, 덴노이다.[* 다만 "너 정치 똑바로 못하면 갈린다"는 맹자의 사고방식 자체는 일본에도 분명히 존재했고 긍정되었다. 당장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사서를 다 읽기 힘들면 맹자만이라도 읽어야 한다'''"고 했던 맹자 애독자였다. 메이지 유신도 그 사상적 토대를 제공한 [[요시다 쇼인]]이 맹자를 강의했다거나 그 문하생인 [[타카스기 신사쿠]]의 기병대 역시 맹자의 '하늘과 백성의 이름으로 실정하는 국왕을 갈아치운다'는 천명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어떤 의미로 '''일본 역사에서 맹자가 '위력'을 발휘한 몇 안 되는 사례'''로 해석할 수 있다. 사실 [[후지와라 세이카]] 이래 맹자 중심의 신유학인 성리학이 일본에 본격 보급되고 도쿠가와 막부 시대를 거치면서 연구가 심화됨에 따라, 막부 말쯤 되면 [[시부사와 에이이치]] 등을 비롯한 유신지사들 중 많은 사람이 맹자 정도는 기본 교양으로 다 알고 있었고, 유교적 이념에 따르면 문제가 많은 천황-막부 이원 구조에 대한 불만도 이로 인해 증폭되었다. 시부사와 같은 인물은 아예 맹자를 직접 읽다가 혁명을 부추기는 구절에 영향을 받고서 막부를 타도하려는 무리를 소집했던 사람이다. 문제는 "너 정치 똑바로 못하면 갈린다"의 대상이 어떤 경우에고 '일본 국왕'인 덴노가 되지는 않았다는 점이고, 이는 덴노가 실권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차이가 없었다.] 이에 대해 혹자는 "일본의 경우는 집안 족보를 따지고 보면 왕실 후손이라서 덴노를 건드려 자기 정통성을 훼손할 필요가 없었다"[* [[쇼군]]은 56대 [[세이와 덴노]]의 후손인 세이와 카와치 [[겐지]] 계통([[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아시카가 다카우지]],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이 관례적으로 차지했고, 유사시라도 황가, 황실의 오랜 외척인 [[후지와라]]가,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간무 [[헤이시]]의 인물을 데려오려고 했다. 이것이 바로 <<[[맹자]]>>에서도 말하기를 "[[순(삼황오제)|순]] 임금은 동쪽 오랑캐 사람이고, [[문왕(주)|문왕]]은 서쪽 오랑캐 사람이다"하는, 대놓고 혈통이 다른 걸로 소문이 다 나서 [[천명]]을 명분으로 [[선양]] 혹은 [[역성혁명]]을 통해 집권할 수밖에 없었던 중국 등의 경우와 다른 점이다.]거나, "중국도 역성혁명을 하면서 자신들의 집안 혈통을 윤색하고 왕후장상이라는 신분제를 부정하지 않았다"[* 주로 자신이 [[삼황오제]] 중 누군가의 후손이라는 프로파간다, [[음양오행설]]에 따르면 개중에서도 자기 집안이 황제 해먹을 차례라는 프로파간다 등을 애용했다.] 는 점을 이유로 전근대 신분제 부정의 토대가 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고 지적하지만 그 의의는 더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다. 맹자의 천명설, 혁명론이나 진승의 구호가 물론 '왕후장상'으로 대표되는 '신분 제도' 자체를 전적으로 부정한 것은 아니라지만, 그러한 '신분'이 태생이나 어떤 이유로 해서 고정불변한 것이라고 정의하려 드는 선민사상적인 인식이나 혹은 그러한 신분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부여되는 특권을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동시에 그러한 '신분'간의 유동성을 긍정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혹자는 민본주의의 한계점인 "새 권력자 1인 혹은 새 권력층의 집권 명분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제도적, 정치문화적으로 현대 민주주의 원칙에 부합하게 자생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을 들며 "민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친화적으로 연결해 이해하려는 시도는 어디까지나 근대 서구의 충격이 있은 이후에나 출현"한 것이니 "현대 민주주의로의 발전을 위해서 결국 외부적 충격을 기다려야 했다는 교훈에 주안점을 두어야 하겠다."며 '현대 민주주의의 원칙'이라는 것을 기준삼아서 외부적인 요인만을 강조하려고 드는데, 애초에 그 기준으로 제시되는 '현대 민주주의의 원칙'이라는 것도 민주주의의 '태동기'부터 '현대'라는 시간대에 이르는 과정에서 기존에는 '문제점'이라는 인식도 없었던 것들이 '문제점'으로서 서서히 인식되고 수용되며 보완되는 과정들을 거쳤고, 동시에 단지 문제점으로서 '인식'되지 않았을 뿐 여전히 '현대 민주주의'에도 그 '보완점'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현행 민주주의 체제를 '현대 민주주의의 원칙' 운운하며 고정불변의 원칙으로 삼아 민본주의를 평가절하하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예를 들어 로마의 성산 사건과 함께 '능동적으로 새로운 바람을 일으켜 시민의 역할과 권리를 보장, 증대'했다는 평가가 존재하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현대 민주주의의 원칙'으로는 너무나도 당연한 상식이 된) '여성 참정권'은 ''''말 같지 않은 헛소리''''로 여겨졌을 뿐 아니라 근현대에 해당하는 19-20세기에 들어서까지 그것을 용납하지 못한 국가가 '민주주의'가 뿌리내렸다는 구미권에 상당히 많았다.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의 전범이라고 할 [[미국]]에서 [[흑인]]에 대한 참정권이 허용된 것은 18세기, 19세기 같은 근대도 아니고 역사 연구에서 '현대'로 분류되는 20세기 [[1965년]]의 일이었다. 국제학계나 시민의식의 도태니 고립이니 하는 거창한 말은 '현대 민주주의의 원칙'이라는 이름으로 현행 민주주의 체제를 민주주의 그 자체로 동치시켜서 아예 고정불변한 도그마로 만들려는 사람들에게나 더 어울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민본주의 아래 백성은 '시민 사회'라는 것을 구성하고 체계화하고 운영할 생각도 능력도 인프라 등 여타 여건도 없었다며 '시민 사회의 적극적 활동'을 민주주의의 제3의 요소 운운하며 민본주의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고 역시 '현대 민주주의의 원칙'이라는 잣대로 민본주의를 어떻게든 평가절하하려 하려는 자들도 있는데, 민주주의라고 해서 그러한 '시민 사회의 적극적인 활동'이 처음부터 긍정되었던 것은 아니다. '시민 사회의 적극적 활동'이 단지 혁명 정부의 개악된 지방 정책 수립에 대한 반발과 항의라는 모습을 띠었다는 이유만으로 철저하게 짓밟히고 공화주의를 부정하는 '반동'으로 매도당해 20세기에 들어서까지 온갖 비난을 감수해야 했던 [[방데 전쟁]]의 피해자들은 사건 이후 300년이 지난 현대, '현대 민주주의의 원칙'이 존재하는 21세기에조차 어떻게 해석해야 될 것인지 당장 프랑스 본국에서조차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떻게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그럴 수가 있느냐?"라는 비난과 조소를 듣기 충분한, 민주주의의 흑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에 대한 '재조명'도 이러한 문제점들을 '문제점'으로 인식하지 않고 있던 풍조가 서서히 변화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다양한 논의와 재해석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나온 산물이며, '시민 개개인의 적극적이며 자유로운 각양각색 의사의 개진과 취합에 따른 체제'라는 현대 민주주의라는 것도 그러한 형태를 이루기까지 진화생물학처럼 그러한 다양한 논의와 재해석, 시행 착오와 보완이라는 '과정'을 거치는 중인 어떻게 생각하면 매우 불완전한 동시에 완전한 것이고 그 자체가 처음부터 완성되어 등장한 고정불변의 완벽한 결과물은 아닌 것이다. 그걸 가지고 현대와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평가절하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센고쿠 시대에 온갖 신분 세탁과 족보 위조를 통해서 등장한 유력 다이묘들이 자신은 덴노의 먼 친척이네 어쩌네 하면서 덴노 자체를 부정하거나 하지는 않았고[* [[헤이케]] 후손을 자처한 [[오다 노부나가]],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라이벌이며 같은 [[겐지]] 일족인 [[닛타 요시사다]]의 후손을 자처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이 대표적이다. [[헤이케]]의 경우 [[타이라노 키요모리]]는 '출신이 의심스럽다' 소리를 듣기도 했는데, 평민이면서 귀족 후손인 것처럼 족보를 위조했다는 게 아니라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생모인 기온노 뇨고가 원래 [[시라카와 덴노|시라카와인]]의 후궁이었다가 다다모리에게 하사된 인물이라서 기온노 뇨고가 낳은 키요모리가 사실은 다다모리의 아들이 아니라 시라카와인의 사생아라고 수군댔다는 것이다. 이는 시라카와인이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서 타이라노 다다모리 같은 이세 헤이시를 끌어들여 고위 관직을 주고, 일개 무사의 신분이었던 타이라노 다다모리를 덴조비토로 승진시킨 것뿐 아니라 그 아들인 키요모리는 원복하자마자 종5위 관위를 주고 나아가 정4위상이라는 당시 무사로서는 과분하다고 할 정도로 황족에게나 베풀 법한 특전을 받았기에 그것을 후지와라 씨 등 기존의 귀족들이 뒤에서 씹고 까느라고 "키요모리가 다다모리의 친아들이 아니고 사실은 시라카와인의 사생아였다"라는 썰을 지어내 퍼뜨린 것이다. 이는 노부나가나 이에야스와는 분명히 다른 점이다.], 진승이 비록 나중에 자신을 왕의 후손으로 윤색하기는 했지만,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다더냐'라는 진승의 말은 전근대적 신분제가 내세운 '''신분의 고정불변성'''에 대한 명시적인 부정이라는 점에서 "'''[[대깨|일본의 국왕은 하늘이 무너지고 집안이 무너지는 한이 있어도 오직 덴노의 일족만이 될 수 있다]]'''"고 못박았던 일본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어떤 사회의 변혁은 전에 없던 뭔가 '혁명적인' 어떤 것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있던 사상이나 묻혔던(혹은 당대에는 부정당했던) 이론을 시간이 흐르면서 시대의 변화상에 맞추어 '재해석'하는 과정 혹은 '재발견'하는 형태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당장 현대 민주주의의 모델이 태동한 서구만 해도 현대와 같은 민주주의의 모델을 갖추는 과정에서 신분제에서 기인한 차별 의식, 고정불변의 것이라는 선민사상이 완벽하게 바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단순히 민주적 형태의 의회를 세우는 것도 모자라 [[루이 16세|자신들의 머리에 앉은 왕]]을 끌어내리고 재판에 회부해 목을 날려버리기까지 하는''' 급진적인 사태에까지 치닫고도 결국 [[테르미도르 반동|왕정이 일시적으로나마]]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복고되었던]] [[프랑스 혁명]]이나 [[미국 독립 혁명]]도 그 자체로 전근대적 신분제를 완벽하게 부정하고 떨쳐내는 데까지는 여러 진통을 겪어야 했고, 현대 민주주의에서 당연한 상식이 된 [[여성 참정권]]을 비롯해 노동자나 부르주아나 귀족이나 인종, 장애 여부에 상관없이 인민 모두에게 동등하게 투표권이 주어져야 한다는 사상은 서구에서도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고도 한참 뒤에나 이루어졌다. 이것은 어떤 의미로는 사람들의 고정관념, 시대와 사회의 한계라는 것이 넘기 어려움을 보여준다.][* 사실 어떤 사회의 변혁이 아래로부터의 혁명보다는 위에서부터 조금 생각이 깨어 있었던 이들 몇몇으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 아울러 [[고조(전한)|한고조]]나 [[홍무제]]처럼 밑바닥으로부터 시작해 위에 올라선 이들이 더 발작적으로 신분제에 집착해 더한 짓을 벌이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실제 사례가 있다. 하지만 그들을 예로 들며 "진승, [[만적]] 같은 '근본 없는 것'들의 대다수는 그냥 난 일으킨 역적으로 몰살당해버리고 2500여 년 내내 민주주의와는 하등 상관 없는 분열-통일-숙청-전제-부패의 단일 패턴을 반복하였다"고 그것을 마치 주지의 통설인 것처럼 주장할 수는 없다. [[진승]] 문서에 나오듯 진승은 한나라 조정에서 결코 마냥 '근본도 없는 주제에 기어오르려 들었던 것'으로 치부되었던 적이 없었고, 홍무제가 신하들을 잔인하게 숙청하긴 했어도 맹자 나아가 유교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또 백성에 대한 빅브라더식 감시망을 만들어 통제를 강화한 것이 현대 민주주의의 원칙에서 보면 분명 인권 침해이긴 했어도 동시에 민주주의의 적이라고 할 수 있는 관리의 부정부패를 감소시키는 데에 효과가 있었던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31340|#]] ] "기존의 전근대 왕조 체제를 유지하며 마치 저 북쪽의 '인민의 총의'와 같이 집단주의적으로 추상화된 '민심'을 그 대리인인 '수령/장군/위원장' 비슷한 유덕자(라고 선전된 사람), '군자'에게 위탁하는 정치 형태가 동아시아 2500년 역사 내내 지속되었다"느니 "이때 민심이라는 것은 천인감응, 민귀군경 등의 수사적 표현을 통해 명분상으로는 군림하되, 실제적으로는 통치하지 못한다. 웃기게도 어찌 보면 덴노와 비슷한 신세다." 운운하는 것이야말로 일본 역사에 대한 이해 부족뿐 아니라 동아시아 역사, 민본주의를 지나치게 현대적 관점에서 곡해, 왜곡하는 논리라고 할 수 있다. 혹자는 '집단주의적으로 추상화'되었다고 치부해 버릴 '민심'이라는 것이 입을 옷이 없어 모기장을 뒤집어쓰고 살든 즉위식 치를 돈조차 없어 글씨를 팔고 성금을 받아 연명했던 덴노와 달리 동아시아에서 사회를 움직이는 분명한 한 축으로 작용하며 크고 작은 영향을 주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천명사상이나 역성혁명론은 신분 자체를 완벽하게 부정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현대의 민주주의와 차이가 극명하지만, 국가를 통치하는 정치 권력의 작동 원리와 그 형성, 유지에 '하늘'이라는 형체 없고 불가지한 동시에 전지전능한 것으로 여겨지던 존재뿐 아니라 '백성'이라는 현실의 존재를 포함시켰다는 점에서 일본의 덴노와는 분명하게 결을 달리한다. 천인상관설(天人相關說)이라 불리는, '''하늘과 인간은 서로 밀접하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자연 현상과 인간의 행위 사이에는 명백한 인과 관계가 존재한다'''고 보는 유교적 천명사상과 역성혁명론은 전근대 사회에서 권력자가 피지배층을 멋대로 착취하지 못하게 하는 사상적인 안전장치인 동시에 그 피지배층에 대한 권력자의 다스림이 충분하지 못할 경우 하늘이 자연 현상을 통해 권력자의 '부덕'을 심판하는 것을 넘어서 아예 권력자를 갈아 치워버릴 수도 있음을 긍정한다. 누구처럼 "민본주의라는 것도 피지배층 착취 방지의 안전장치라고 하지만 사실상 최고지배층(군주)을 중간지배층(귀족)이 명분상으로 압박하는 용도로 기능하는 바가 더 컸지 않느냐"는 냉소는 위정자들이 그렇게 '''표면적으로나마 피지배층을 위한 '안전장치'를 만들 수밖에 없게끔 압박을 가한 사회적 공기'''는 무엇에서 기인하였는가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을 뿐 아니라[* 맹자가 "군자의 과오는 [[일식]]과 같아서 저지르면 백성이 지켜보고 고치면 백성이 우러러 본다."는 말을 반민주적 정치관에 속박된 형태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단장취의에 가까운 억측인데, 해당 구절의 청자는 백성이 아니라 군자이다. 백성이 군자로 표징되는 위정자를 우러러 본다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군자로 표징되는 위정자가 어떤 과오를 저지르면 하늘의 일식이나 월식처럼 백성에게 그대로 드러나기 마련이고'''(즉 군자의 과오를 백성 앞에 숨기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군자라는 존재는 그 자신의 과오를 고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백성에게 미치는 영향이 그만큼 크다고, 잘못한 것을 숨기려고 하지 말고 드러내고 고치라고 권하는, 현대 민주주의 원칙에서도 충분히 도덕적 경구로서 수용이 가능한 위정자로서의 자세를 강조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당초에는 좋은 의도로 도입되었던 제도가 나중에 가서는 악용되는 경우도 많다는 점에서 피지배층 착취 방지의 안전장치, 명분상 압박하는 용도 운운하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주객전도'에 가깝다. 민본주의나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 정의를 분명히 하겠다는 이유로 민본주의를 필요 이상으로 평가절하하고 민주주의 특히 현대 서구식 민주주의 원칙만을 절대적인 동시에 고정불변의 것으로 떠받드는 것은 그 자체가 동양을 '깨지 못한' 존재, 계몽해야 할 미개한 존재로 취급했던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비교는 단순하게 1대 1 또는 지금의 기준만을 가지고 하는 게 아니다. 타이라노 마사카도를 '머리가 좀 깬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논지에 대해 "마사카도가 운위한 천명론은 고대적 민본주의이고 현대 민주주의 원칙의 기준으로 그 민본주의에는 많은 한계가 있다며 마사카도를 '좀 깬 사람' 운운하는 것은 반발을 불러온다"는 말은 적어도 마사카도라는 인물과 천황이라는 존재를 운위함에 있어서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봉기에 그가 거점으로 삼고 있던 반도 지역의 백성들이 대부분 호응했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며, 마사카도가 사후 역적으로 몰리고도 여전히 반도 지역에서 그를 영웅으로 받드는 전설이나 민담이 전승되었다는 것은 "민심이 천명인지 그냥 못된 역심인지를 판정하는 것은 지배층끼리 자기 셈에 따라 아옹다옹하며 결정하는 것"이라는 일부 논자들의 민본주의에 대한 냉소 자체를 비웃기 충분하다. '현대 민주주의의 원칙' 운운하며 백성의 수동성을 운위하지만 엄연히 중앙 정부로부터 '역적'으로 몰린 인물을 긍정적으로 전하는 전승 자체가 그러한 긍정적 전승의 내용이 실제 역사적 사실이냐 아니냐에 상관없이 그러한 전승을 공유하는 이들의 강렬한 의지가 반영된 산물이고 '권력에 대한 능동적 저항'이라 부르기 충분한 것이다. 애초에 민본주의를 평가절하한답시고 백성을 '폭정이 있은 연후에야 지배층에 대한 불만으로 반응하고 덕정이 있은 연후에야 지배층에 대한 찬양으로 반응'한하는 존재로 정의하며 그것을 시민과는 다른 '수동성'이라고 평가절하하는 문장도 이율배반적이다. 폭정이라고 표징되는 위정자의 실정에 불만으로 반응하는 것은 '현대 민주주의의 원칙'으로 분명하게 보장된 저항권의 일종이고, 덕정이 있은 연후에 지배층에 대한 찬양으로 반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동성이 아니라 인과율에 따른 필연적인 귀결이다.] 천황이라는 존재가 일본 사회에서 어떤 위치이고 그 천황을 정점으로 세워진 일본이라는 나라의 사회 구조가 어떤 사상과 이념으로 이루어졌는가를 짚어보는 과정에서 타이라노 마사카도는 존재는 분명히 이색적인 존재인 동시에 이단적인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그 수많은 잇큐잇키도 마사카도처럼 체제 자체를 부정하거나 일본이라는 지배 체제를 이탈해 독립하려 한 것이 아니었고, 모기장을 뒤집어쓰고 살든 돈 없어 글씨 팔아 연명하든 '덴노는 신성불가침적 존재'라는 명제를 고정불변의 절대적 진리로 여기며 부정하려 하지 않았던 일본 사회에서 타이라노 마사카도 이외에 일본 역사에서 그 어떤 인물도 그러한 일본의 지배 체제와 사회 구조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기를 들 생각을 할 인물은 없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민본주의는 위정자와 백성을 '대립'하고 '양립'하는 이분법적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 또 받을 수 있는 모종의 계약 관계로 간주하며, 위정자의 권한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시점에서 무한정이고 고정불변의 것이라거나 백성이 마냥 위정자의 지배를 받아 들여야만 하는 일방적이고 수직적인 관계라는 사상을 부정하는 것이 민본주의이다. 지배자는 마냥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신성한 권력을 피지배자인 백성에게 마냥 행사하고 군림하기만 하면 되고 피지배자는 그러한 지배자의 군림을 '신의 뜻'이라고 수용해야만 하는 신민이 아니라 상호간에 각자의 생존과 행복을 위해서 권한을 위임하고 위임받은 일종의 '계약' 관계이며, 그 지배자의 엇나간 정치로 인해 피지배자가 생존과 행복을 위협받을 경우 그 지배자와의 계약을 철회하고 다른 이로 바꿀 수 있다는 사상은 [[왕권신수설]]의 토대를 마련한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이후 서양에서 [[르네상스]]를 거쳐 [[토머스 홉스]]가 [[사회계약론]]을 주창하기까지 거의 천 년을 기다려야 했다. 위정자가 부여받은 것과 같은 '천명'의 또 다른 상징으로서의 인민의 존재를 '발견'해낸 것이 맹자와 민본주의의 가장 큰 업적이고, 이는 서구 민주주의 발달사에 비추어 생각해도 분명히 획기적인 사상의 전환이었음은 틀림없다. 백성이 위정자에게 있어서 천명의 대변자이기는 하지만 그 위정자도 백성과 마찬가지로 '천명'을 명분으로 존재하고 위정자가 위정자의 위치에서 자신이 해야 할 책무를 다하지 않아 백성이 도탄의 빠지게 되는(즉 위정자가 위정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소임을 다하지 않은) 상황이 벌어졌을 때 그 위정자의 자리를 담보하는 천명은 백성의 민심과 마찬가지로 변화할 수 있고 위정자라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당위성마저 부정된다, 라는 식의 사상은 굳이 자본주의 맹아론이니 하는 말을 가져오지 않아도 그 자체로 맹자 당대뿐 아니라 현대의 기준에서도 분명히 '혁명'적인 사상이라고 평가받아 마땅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신분제를 부정하거나 고정불변성을 부정하기는커녕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오히려 그것을 '중국과 다른 우리만의 특별함'[* 혹자는 동아시아의 민본주의를 현대 민주주의 원칙으로 평가절하하는 입장에서 "기존의 전근대 왕조 체제를 유지하며 마치 저 북쪽의 '인민의 총의'와 같이 집단주의적으로 추상화된 '민심'을 그 대리인인 '수령/장군/위원장' 비슷한 유덕자(라고 선전된 사람), '군자'에게 위탁하는 정치 형태가 동아시아 2500년 역사 내내 지속", "2500여 년 내내 민주주의와는 하등 상관 없는 분열-통일-숙청-전제-부패의 단일 패턴을 반복하였음이 주지의 사실"이라느니 말하는데, 그게 따지고 보면 동아시아 국가의 민본주의의 실상이라기보다는 그냥 일본이라는 나라의 현실 그대로였다.]이라고 여기는 인식을 중국 황제 앞에서도 대놓고 "우린 원래 이래요, 부럽죠?" 이러고 자랑하던 것이 일본이다. 덴노의 조정이나 막부의 쇼군이라고 그러한 천인상관설을 몰랐거나 혹은 '웃기고 있네' 정도로 치부한 것은 아니어서 국가 재난 사태에는 으레 '덕정(德政)'이라 불리는 국가적 대책들이 시행되었다.[* 이 점은 전근대 중국이나 한국의 왕조 국가에서 시행한 여느 정책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덴노의 경우 '''하늘과 백성을 거스르고 실정을 일삼는 왕의 덕이 쇠약해지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아예 다른 데로 옮겨갈 수도 있다'''는, 동시에 '''누구든 왕의 자리에 오를 만한 힘이 있는 자는 누구든 그 왕의 자리를 힘으로 쟁취할 수 있다'''는 사고는 한국이나 중국과는 달리 일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라는 일본 신토의 최고 신이자 온 세상을 비추는 [[태양]]의 여신이 자신의 손자 니니기를 지상에 내려 보내며 "'''지상은 니니기와 그 후손이 영원토록 다스릴 땅이다'''"라는 이른바 '천양무궁의 신칙'에는 니니기와 그 후손에 대한 세상을 다스릴 권한에 대한 '약속'만이 있을 뿐이지, 그 권한을 '리콜'할 수 있는 장치는 없다. 아무리 정치를 엉망으로 해도, 무모한 전쟁을 벌여 수천 수백의 목숨이 죽어나갈 망정 일본의 국왕인 덴노의 자리에는 오로지 덴노의 일족만이 오를 수 있었고, '천양무궁의 신칙'으로 하늘로부터 받은 덴노의 왕권에 리콜하거나 회수할 권리는 고사하고 이의를 제기할 존재는 일본 안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으며, 심지어 그 권한을 준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마저도 그런 건 생각도 하지 않는다.[* 이러한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와 덴노의 관계는 비유하자면 구약의 [[야훼]]와 [[이스라엘 왕국]]의 왕들의 관계와 비슷한데,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의 신황정통기에는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나 일본 신토의 신들이 덴노의 자손에게 덴노를 그대로 잇게 하는 것은 ''''인간은 도를 벗어나고 약속을 쉽게 저버려도, 하늘은 도를 벗어나지 않고 한 번 한 약속을 저버리지 않는다''''고 해석되어, 아마테라스가 니니기에게 했던 천양무궁의 신칙이라는 신대의 서약을 그대로 지키고 있으므로 결국 덴노의 자리는 [[무로마치 막부|힘 있는 자]]가 아니라 [[고무라카미 덴노|정통성을 가진 자]]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음을 역설하기 위한 것이다. 야훼 역시 [[다윗]] 이후 이스라엘 왕국의 역대 왕들을 보면 예언자의 말 따위 무시하며 야훼를 믿지 않고 이방의 신들을 믿거나 하는 등 야훼의 뒷목을 잡게 만든 인간들이 줄줄이 왕으로 즉위하지만, 그럼에도 야훼는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한다!'고 했던 때처럼 다윗 왕가로부터 이스라엘의 왕위를 거두어 다른 가계로 옮겨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다윗 왕의 후손들이 잇게 하는데, 이는 야훼 스스로가 "내가 너를 왕위에 앉히고 네 후손 대대로 왕 노릇 하게 하리라"(시편 89:4)라고 했던 야훼 자신이 다윗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동시에 [[예수|다윗 왕의 후손으로서 세상 모든 인류의 대속과 구원을 위해 나타날 나자렛 목수의 아들]]의 등장의 복선이기도 하다)고 해석되며, 지카후사의 천황관과 비슷한 점이 있다.] 이런 점에서 타이라노 마사카도는 당시 일본 사회에서 상당히 이색적이고 파천황적인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전근대 신분제의 부정을 불완전하게나마 한때의 구호가 아닌 체제로 실현한 건 서구의 체제를 수입해 이식한 근대 일본이 최초이지만, 그렇게 서구의 체제를 수입해 이식했다는 근대 일본은 끝내 한국이나 다른 나라와 달리 [[다이쇼 데모크라시|아래로부터의 힘으로 자신들의 체제를 개혁하지도 못했고]], 그렇게 불완전하게 도입된 서구의 체제를 독재 정권에 대한 비판, 항쟁이라는 방식으로 자기화해가며 뿌리를 내리게 하는데 성공한 한국과 달리 일본은 그러한 서구의 '민주주의'라는 체제를 자기화할 이유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앞에서 설명한 여성 참정권도 일본은 태평양 전쟁으로 깔끔하게 패망한 뒤인 1946년에나 시행되었다. 한국이 불완전하나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헌장(1919)에서 남녀 모두의 참정권을 인정한 것과는 대조되는 것이다. 혹자의 견해처럼 "대통령 선출을 일종의 5년 주기 역성혁명으로 등치하여, 사실상 괘씸한 왕과 붕당을 5년에 한 번 심판하고 좀 덜 괘씸한 왕과 붕당에 또 다른 5년을 일임할 뿐"이라고 한국의 현행 정치 양상을 단순히 비판하는 것을 넘어 '본질적 전근대성'으로 규정한다면, 덴노라는 존재에 대한 전근대적인 신성불가침성이 공공연하게 온존하며 심지어 특정 정치인이 대를 이어 정치에 뛰어드는 것을 넘어 아예 특정 지역의 지역구마저 대대로 세습하다시피 하며 그걸 당연하게 여기는 (루스 베네딕트가 그의 저서 [[국화와 칼]]에서 일본의 모습을 "'''일본 역사의 전체 기간을 통틀어 현저한 계급 [[카스트]]적 사회'''"라고 분석한 그대로인) 일본의 '본질적 전근대성' 역시 만만치 않다.][* 그리고 타이라노 마사카도와 비견할 만한 파천황적인 인물이 나중에 한 명 더 나오는데, 바로 [[고다이고 덴노]]이다.] 사실 덴노의 입장에서 천명사상이니 역성혁명론이니 하는 말을 들이대는 비판이 좀 억울한 게, 덴노로서는 천명 사상이나 역성혁명론 같은 것으로 비판을 받을 정도로 뭔가 국왕으로서 권력을 행사하고 나라를 다스린 적이 별로 없었다. 뭐 정치를 해야 실정을 하고 천명이니 역성혁명이니 비판을 받을 것 아닌가. 일단 일본이라는 왕국의 유일한 '왕'이자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의 후손이라는 뼈대 깊은 혈통적 정통성을 가진 존재였기는 하지만, 실제로 다른 나라의 국왕과 같은 모습으로 전제 군주로서 스스로 권력을 행사한 시기는 [[나라 시대]]부터 [[헤이안 시대]] 중기까지 20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 등 길지 않았으며, 가신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센코쿠 시대]] 이래로는 권력을 잃은 단순한 얼굴마담 같은 존재로 전락해 있었다. 무엇보다 [[쇼군]]이 실질적으로 일본을 다스리던 [[막부]] 시대에는 그게 절정에 달했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토키 요리토오라는 [[다이묘]]가 고곤 상황의 가마에 화살을 쏘고, 남조의 잔당 세력이 삼종의 신기 중 일부를 강탈하는 일도 있었다. 조정의 권위가 가장 초라하던 무로마치 시대, [[고쓰치미카도 천황]]의 치세에는 [[오닌의 난]]을 시작으로 전란이 잦아 궁궐까지 불에 탔으며, 지방에서도 혼란이 커지고 영주들이 황실령을 침탈해 황실이 재정난에 빠졌다. 고쓰치미카도 천황이 귀족들의 저택에서 기거했음에도 화려한 궁전이 아닌 허름한 집에서 지냈다는[* 사실 아무리 귀족 저택이라 해도 정식으로 건축된 왕궁과는 규모로 보나 경비로 보나 결코 비교가 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한국에서 [[광해군]]이 임진왜란으로 주요 대궐들이 모조리 불타버리고 부왕이 [[덕수궁|종친의 사저를 수리해 쓰던 행궁]]을 박차고 나와서 [[창덕궁]]이나 [[창경궁]]의 재건을 감행한 것도, 그 당시는 물론 나중에 가서 '궁궐병'이라 불릴 정도로 지나치게 공사를 많이 벌인다는 비판이 일고 결국 광해군 자신의 실각으로까지 이어졌다고는 하지만, 전쟁 이후 실추한 왕실이나 국가의 권위 쇄신 및 회복을 위해서 [[필요악|어느 정도는 필요한 조치였다]]는 옹호가 가능한 것이 이런 이유에서다. 아무리 "정치가 잘 되면 땅에 금 그어놓고 넘어오지 말라고 해도 안 넘어간다"는 논리로 토목공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유교라고는 하지만, '형식이 뭐가 중요하냐 실속만 있으면 그만이지'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말 같지도 않은 헛소리하지 마라"며 '''형식과 실속이 조화를 이루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 [[공자]] 본인이었고, 왕이라고 지나치게 검소한 것만 따져도 결국 대외적인 이미지를 비롯한 왕가로서의 품위나 권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겉으로 드러나는 시각적 이미지도 전근대에는 엄연히 권력의 한 작동 원리였고 왕권의 중요한 요소였다.] 헛소문이 돌은 것도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나온 것이다. 천황과 귀족들의 본거지인 교토가 전란으로 직격탄을 맞았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도 황실의 권위는 계속 곤두박질쳤다. 104대 [[고카시와바라 덴노]]는 황실 재정이 없어 아버지 고쓰치미카도 덴노의 장례를 치르지 못해 그 유해를 '''44일이나''' 방치해야 했었고 당시 키나이의 지배자로 칸레이를 역임하던 호소카와 마사모토가 '''형식적이고 무익하다는 이유로 천황 즉위식을 거부하여'''[* 엄연히 군주국인 일본에서 신하가 군주의 즉위식을 두고 "'''그딴 거''' 치러서 뭐하게?"라고 한 것이다.] '''22년 동안이나 즉위식을 치르지 못하다가'''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와 이시야마 혼간지에서 비용을 내주어 겨우 즉위식을 치렀으며 그 후 4년 뒤, 63세의 나이로 붕어했다. 그 다음인 105대 [[고나라 덴노]](재위 [[1526년]]~[[1557년]]) 또한 즉위식을 치를 돈이 없어서 유력한 센고쿠 다이묘인 [[후호조씨|고호조]](後北条)와 [[오우치]](大內), [[이마가와]](今川) 등의 가문으로부터 성금을 받아 즉위 10년 만에야 즉위식을 거행할 수 있었으며, 천황 자신도 '''어필을 팔아서''' 황실 수입에 보탰다. 또 [[궁녀]]들이 [[매춘]]을 한다거나,[* 이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냐면, 일본에서 천황을 모시는 것 이전에, 궁녀들의 대부분은 공가의 귀족 출신이었다. 즉 [[조선]]으로 치면 반가의 부인과 따님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몸을 팔았다는 소리다.] 동네 아이들이 천황 본인을 무시하며 마구 돌을 던져, 그 돌에 맞고 다녔다는 소문까지 발생했다. 이렇게 황실의 권위가 무너지고 형해화된 수준까지 갔으나, 무로마치 - 센고쿠 시대 천황들이 무력하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프랑크 왕국 [[메로빙거 왕조]]의 군주들이 왕실과 왕권의 보존을 위해 노력했음에도 무능력했다는 오해를 사는 것처럼 센고쿠 시대의 천황들도 황실을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오닌의 난이 터지기 전의 [[고하나조노 천황]] 때에는 형식상으로나마 정치적 권위가 살아 있어 반란이 터지면 막부에서 대부분 천황의 윤지를 요청했으며 오닌의 난 이후에도 전란과 조정의 무력화로 사라져 버린 여러 의례를 되살려 조정의 존재감을 살리고 권위를 회복하려 했다. 또한 천황들은 막부가 실정을 하거나 쇼군이 잘못을 저지르면 시나 글을 쓰거나, 퇴위하여 출가하는 것으로 막부의 통치를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민심을 샀으며 전염병이나 기근이 들면 종교 행사를 거행해 대중들을 진정시키고 위로했다. 또한 다이묘들이 헌금으로 관직을 사려는 것을 통제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하는 등, 천황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게다가 전국 시대의 다이묘들은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조정과 천황의 권위를 이용하려 했고, 이를 위해 천황에게 헌상을 바친다거나 형식적으로나마 조정의 권위를 인정하고 관위를 얻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에도 막부]] 시기에는 [[쇼군]]가였던 [[도쿠가와]] 가문의 막대한 후원과[* 재산이 없었던 황실에 10만 석의 영지를 선물해 주었는데 천황 개인의 영지가 3만 석이고 황실의 영지가 7만 석이었다. 참고로 에도 막부 직할령인 천령은 400만 석가량이고(도쿠가와 막부의 수입이 230만 석), 하타모토 같은 직속 무사는 전부 합쳐 300만 석 가량의 영지를 보유했다. 에도 시대의 다이묘 중에는 가가 번처럼 웬만큼 이름 있는 다이묘는 백만 석을 넘어가는 이들도 적지 않았고, 그 영지 보유의 기본 단위가 사쓰마(77만 석), 센다이(62만 석)처럼 10만은 거뜬히 넘는 이들도 많았다.] 더불어 고위 [[사무라이]] 및 쇼군가와의 유착으로 인해 적지않이 권세를 누린 적도 있지만[* 그 유명한 [[추신구라]] 사건이 천황이 [[쇼군]]에게 보낸 칙사를 대접하던 [[사무라이]]들끼리 예법이 어긋났다는 이유로 쪼인트를 까다가 벌어진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다이묘]]인 [[아사노 나가노리]]까지 [[할복]]해야 했을 만큼, 천황의 칙사 앞에서 무례한 모습을 보인 것에 대한 파장이 컸다는 소리니, 당시 천황의 권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다.], 그 시기에도 당연히 정치적 실권은 쇼군과 그를 중심으로 한 막부에게 있었고, 천황은 그냥 [[바지사장]]에 불과했다.[* 이는 [[에도 막부]]의 쇼군가 쪽에서 천황이 실권을 회복할 가능성을 우려해서 [[일본 황실|황실]]과의 혼인을 거부한 탓이 컸다. 그래서 그 막부의 권위도 나락으로 떨어진 [[개화기]] 때는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모치]]와 황실의 딸인 [[가즈노미야 지카코 내친왕]]과의 결혼이 성사되자, 세간의 지대한 관심을 모았다.] 여담으로 이렇게 천황을 쥐고 흔들던 [[에도 막부]]가 무너지고 [[대정봉환]]으로 [[일본 제국]]이 성립되자 신정부의 주요 인사들은 에도 막부가 정당한 군주인 천황을 핍박했다고 보고, [[구스노키 마사시게]] 등 과거 천황에게 충성한 충신이라고 판단되는 인물들을 찬양하기도 했다. 그중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있었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처럼 무엄하게(?) 천황을 허수아비 취급하지 않고 존중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 도요토미 히데요시조차 [[조선]] 침략을 하지 말라는 [[고요제이 덴노]]의 어명을 무시했다. 물론 천황도 잃어버린 권력을 되찾기 위한 시도를 몇 번 한 적은 있었고 가장 성공할 뻔했던 것이 1333년에 일어난 [[겐무 신정]]이었다. 일본의 제96대 천황 [[고다이고 덴노]]가 [[가마쿠라 막부]]를 무너트린 뒤 고대 일본처럼 천황이 직접 통치하는 나라로 되돌리기 위해 싯켄이나 막부, 관백 등을 죄다 폐지하는 겐무 신정을 시도했으나, 결과적으로 실패해 쇼군이 다스리는 막부 체제가 이후 500여 년을 더 이어갔다. 자신들 말대로는 [[일본]] 최초의 [[국가]]로 생각되는 야마토(大和)로부터 신의 피가 끊기지 않고 계속 이어져 내려오며 일본을 통치했다고 하여 '만세일통(万世一統)의 천황'라고 불리운다. 하지만 '천황'이라는 명칭이 사용된 건 비교적 최근이며 피나 이름이 끊긴 듯한 애매한 시기도 있었다. 예를 들면 일본의 패전 직후인 1954년 미즈노 유(水野祐)가 주장한 '3왕조 교체설'이 대표적이다. 그는 "[[일본 황실]]의 역사는 10대 [[스진 덴노]]에서 15대 [[오진 덴노]]까지의 고왕조, 16대 [[닌토쿠 덴노]]에서 25대 [[부레츠 덴노]]까지의 중왕조, 26대 [[케이타이 덴노]] 이후의 신왕조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하면서 "[[결사팔대|스진 덴노 이전의 천황은 역사상 실재하지 않는 허구의 인물]]"이라고 주장하였다.[* 만세일계와 같은 말은 한민족의 시조라 불리는 [[단군]]이 하늘의 신 환웅과 [[웅녀]]의 후손이며, 한국은 하늘과 곰의 기운을 받은 국가라는 식의 신화적 이야기에 불과하다. 정치적으로 천황의 정당성을 위한 상징적 단어일 뿐이다.] 이 학설은 많은 비판 혹은 보충의 대상이 되었으나 이후 '기마민족 정복설'이나 '규슈 왕조의 야마토 지역 정복설' 등 다양한 왕조 교체설의 시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런 학설들이 주류로 인정받고 있지는 못하지만, 일단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만세일계'라는 것은 허구적인 관념에 가깝다는 것이다. 다만 3왕조 교체설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확실한 것은 [[케이타이 덴노]] 이래 일본 천황의 역사는 최소 1500여 년 동안 끊기지 않았으며, 현존하는 왕조 중 가장 오래되었다는 것이다.[* 비단 현존하는 왕조뿐 아니라 옛날에 존재했던 왕조들까지도 이잡듯이 뒤져도 가장 최장수 왕조에 꼽힐 것이다. 보통 왕조는 500년을 넘기도 힘들며 문명별, 시대별, 지역별로 왕위 계승의 법칙도 달라서 A라는 왕조가 500년을 넘겼다 쳐도 B라는 왕조에서 채택했던 왕위 계승의 법칙 방식으로는 아닐 수도 있다. 한국사의 신라, 고려, 조선만 해도 하나의 나라가 쭉 이어진 것으로 인식하지만 서유럽식으로 보면 왕조가 몇번은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예시를 들자면 신라의 [[혜공왕]]-[[원성왕]] 교체기, 고려의 [[목종(고려)|목종]]-[[현종(고려)|현종]] 교체기, 조선의 [[철종(조선)|철종]]-[[고종(조선)|고종]] 교체기는 서유럽식으로 보면 다른 왕조로 세야 할 만큼 촌수가 멀어졌다.] [[헤이안 시대]] 말기에는 천황이 [[태상황]]으로 물러나거나 상황(上皇)이 출가하여 법황(法皇)으로 물러난 뒤에야 오히려 실권을 가지게 되고 천황은 사실상 [[태자]] 정도의 지위에 불과한 시대도 있었다. 이를 [[인세이]](院政)라고 한다. 가마쿠라 시대 [[고토바 상황]]이 쇼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의 죽음으로 겐지 쇼군이 단절되고 [[가마쿠라 막부]]가 호조 씨를 비롯한 고케닌들의 내부 항쟁으로 어수선한 것을 틈타 막부 타도를 외치며 이른바 '조큐의 변'을 일으켰다가 [[호조 마사코|내부 항쟁을 멈추고 한데 뭉친]] 무사들에게 거꾸로 역공을 당해 고토바 상황은 물론 그의 아들인 [[츠치미카도 상황]]과 [[준토쿠 상황]] 모두 교토에서 쫓겨나 유배되고, 고토바 천황이 지명한 [[주쿄 덴노]]도 폐위되어 막부에 의해 새로이 [[고호리카와 덴노]]가 즉위한 이후로 덴노와 교토의 조정은 독립성을 잃고 '''막부에 의해 '관리'되는''' 신세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심지어 가마쿠라 후기에 이르면 왕위 계승을 놓고 또 내분이 벌어져 왕통이 둘로 쪼개졌는데, [[고사가 덴노]]가 원래 맨 처음에 넷째 아들 [[고후카쿠사 덴노]]에게 양위해 놓고, 정작 고후카쿠사 덴노의 뒤를 고후카쿠사 덴노의 자손이 아닌 평소 총애하던 여덟째 아들 [[가메야마 덴노]]의 아들인 [[고우다 덴노]]로 정해 버리는 바람에 졸지에 자기 자손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 없게 된 고사가 덴노가 "이게 뭔 개소리야"라고 아버지와 동생에게 반발하면서 분쟁이 벌어졌고, 당시 조정을 '관리'하던 막부는 심플하게 "고사가 덴노의 자손과 가메야마 덴노의 자손이 10년 단위로 로테이션으로 해먹어라"로 퉁쳐 버렸다. 이후 고사가 덴노의 자손을 지묘인 왕통, 가메야마 덴노의 자손을 다이카쿠지 왕통이라 불렀으며, 이 두 왕통이 가마쿠라 막부 멸망 때까지도 돌아가며 덴노에 오르게 되었다. 이것이 [[남북조시대(일본)|남북조시대]]'라는 시대의 복선이 된다.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킬 계획을 세우고 [[아시카가 다카우지]], [[닛타 요시사다]], [[구스노키 마사시게]] 등 무사들의 지원을 이끌어내어 가마쿠라 막부 타도에 성공한 [[고다이고 덴노]]는 다이카쿠지 왕통에 속했다. 고다이고가 막부 타도를 꾀한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게 기껏 왕이 되었더니 자기 아들한테 왕위 못 물려준다고 하면 그걸 국왕 치고 좋아할 사람 몇 명이나 되겠는가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백 년 가까이 실권이 없어 정치적 경험이 모자랐던 데다 무사들을 도외시하고 공가 중심의 정책을 펼치는 고다이고에게 반발한 무사들은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중심으로 결집해서 고다이고 덴노의 정치를 부정하고 다시금 막부를 부활시켜 버렸다. 고다이고 덴노도 무사들에 의해 반강제로 양위하고 삼종신기도 다카우지가 세운 막부에 의해 옹립된 [[고묘 천황]]에게 넘겨 주는 굴욕을 겪었지만, 고다이고 덴노는 이를 부정하고 교토를 탈출, 나라의 요시노에서 "너희에게 넘겨준 삼종신기는 가짜이고, 내가 여기 진짜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일본의 정통 군주는 나다!"라며 요시노에서 자신의 조정을 선포한다. 이로서 교토의 조정 즉 북조와 요시노의 조정 즉 남조 이렇게 두 덴노가 양립하는 일본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태가 벌어졌던 것이다. 고다이고 덴노가 무사들을 도외시하고 공가 중심의 정치를 펼쳤다고는 하지만, 이에 반발하는 무사들이 다카우지를 중심으로 결집해서 세운 막부와 그 막부에 의해 옹립된 덴노의 북조를 마냥 지지한 것도 아니었고, 고다이고 덴노 본인도 자신의 아들들을 일본 각지로 보내 무사들을 결집하게 하는 등 참 끈질기고도 집요하게 뛰어다녔다. 난보쿠초 시대 내내 일본 각지에서는 남조를 지지하는 무사들과 북조를 지지하는 무사들이 서로 양패로 갈라져 피 튀기며 싸워댔는데, 정확하게 말해 정통성이 남조에 있든 북조에 있든 무사들 입장에서는 "아 그딴 거 나는 모르겠고"였고, 그저 자신들에게 더 많은 영지 소유를 보장해 줄 명분과 그럴 힘을 갖춘 구심점을 찾아서 자신들이 상대의 영지를 빼앗아 차지하는데 도움이 되겠다 싶으면[* 상대의 영지를 빼앗기 위해 "나는 남조(북조)의 명을 받들고 있는데, 넌 북조(남조)의 명을 받든다며? 넌 역적이야!"라며 쳐들어가고, 상대 입장에서는 "남조(북조)는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북조(남조)에 비하면 쥐뿔도 없는 것들이" 또는 "나도 남조(북조)인데? 이게 어디서 팀킬을 하려 들어?"라며 맞서 싸우는, 그리고 이렇게 양측이 서있는 편이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건 예사였다.] 박쥐마냥 남조에 붙었다가 북조에 붙었다가 하는 판이었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일부는 '''궁지에 몰린 나머지 전쟁에 필요한 자금을 구하러 바다 건너 [[고려]]와 [[원나라]]/[[명나라]]로 [[레이드]]'''를 떠나게 되니, 한국사와 중국사에 '[[왜구]]'라고 기록된 존재들의 등장도 남북조 시대의 전란으로부터 파생된 사태였다. 가끔은 남조가 우세하기도 했지만 점차 막부가 세력을 넓혀가고 [[규슈]]를 완전 복속하면서[* 고다이고 덴노가 각지로 자신의 아들들을 보내 현지에서의 논공행상권을 맡기고 무사들을 포섭하라고 했는데, 이들 왕자 가운데 그나마 유의미하게 북조에 대항할 만한 힘을 갖추었던 곳이 규슈였고, 가네요시 친왕이 호족 기쿠치 씨와 결탁하여 수립한 정서부(征西府)는 북조가 규슈 통치를 위해 임명한 규슈 단다이나 가마쿠라 막부 이래로 규슈의 슈고로써 전통적인 지배 세력이었던 쇼니 씨와도 항쟁을 벌여 여러 차례 승리하고 한때 [[다자이후]]를 점령하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일본국왕]]으로 책봉되는''' 등 외교적인 지위도 확보했다. 여기에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서자였던 아시카가 다다후유까지 끼어들어 자신의 세력을 결집하려 하면서(이후 다다후유는 쇼니 씨의 사위가 되었다) 규슈는 '가네요시 친왕 - 기쿠치 씨'의 남조 세력(정서부) 대 '잇시키 씨 → 이마가와 씨'의 북조 세력(규슈 단다이) 그리고 전통적인 지배 세력이자 남조나 북조 모두와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아시카가 다다후유-쇼니 요리히사의 '제3세력' 이렇게 삼파전 양상을 띠었다.] 결국 북조 쪽으로 기울고 만다. 결국 [[아시카가 요시미츠]]의 알선으로 남북조 두 가문이 왕위를 번갈아가며 계승할 것과 전국의 천황 직속령인 "고쿠가레(국아령, 国衙領)"를 다이가쿠지계의 소유로 삼을 것을 조건으로 남조의 히로나리 친왕[* 후에 [[고카메야마 덴노]]로 추숭]이 북조의 [[고코마츠 덴노]]에게 삼종신기를 넘겨 남북조가 통일되었다. 서기 [[1392년]]의 일이다.[* 이 해는 마침 한반도에서도 [[공양왕]]이 강제로 폐위당하고 [[이성계]]가 새로운 왕조를 세운 해였다.] 물론 이 시기 고쿠가레의 토지는 거의 조금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작 고코마츠 천황은 당초의 양통질립 약속을 무시하고 자신의 차남인 오구라노미야 미히토 친왕을 태자로 책봉해 버리면서 화의는 깨졌다. 이에 고카메야마 상황이 잠시 요시노로 가는 등 반발했지만 결국 화의가 성립되었다. 그때 남조의 실력은 이미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저항만큼은 정말 끈질겼다. 1428년에 미히토 친왕 즉 쇼코 천황이 죽고 [[고하나조노 천황]]이 즉위하였는데, 이에 대해 옛 남조 지지파가 항의하며 다시 거병했다. 이를 후남조(後南朝)라고 한다. 후남조는 1443년 삼종신기 가운데 곡옥과 검을 가져가는 금궐의 변(禁闕の変)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이때 검은 곧 회수했지만 곡옥은 후남조의 2대 천황인 자천왕(自天王)의 요시노 조정이 보유했다. 1457년 말에 아카마츠씨의 부흥을 목표로 하는 세력이 조로쿠의 변(長禄の変)을 일으켜서 자천왕과 그의 형제이자 후남조의 정이대장군 충의왕(忠義王)을 죽이지만, 요시노 향민들이 곡옥을 다시 빼앗는 바람에 1458년에야 북조는 곡옥을 마저 회수할 수 있었다. 그 후 [[오닌의 난]] 와중이던 [[1470년]]까지 여러 차례 후남조 세력의 거병이 이어졌고, [[야마나 소젠]]을 총대장으로 하던 서군이 남조 계통의 황족을 데려다 이른바 '서진남제(西陣南帝)'로 옹립했지만, 1473년 소젠이 죽은 뒤에 서진남제는 완전히 힘을 잃었고 각지를 떠돌다 1479년 에치젠의 어느 절에 도착했다는 사료를 끝으로 기록마저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남조의 왕통은 그대로 끝났다. [[메이지 시대]]에는 남조의 정통을 인정했지만, 북조 계통인 이후 덴노들의 정통성이 부정된 건 아니었다. 당장 메이지 덴노 본인이 천황가 역시 북조의 직계 후손인 만큼 북조를 애써 무시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1911년]](메이지 44년)에 [[메이지 덴노]]의 명으로 남조 2대를 정통 천황으로 인정하고 종래의 96대부터 100대까지의 천황을 "북조"로 보고 정통에서 제외하였고 남조의 노리요시 친왕, 히로나리 친왕은 천황이 아니었으나 즉위한 것으로 보고 [[고무라카미 덴노]], [[고카메야마 덴노]]로 추숭했다. 1926년(다이쇼 15년)에 [[다이쇼 덴노]][* 실제는 섭정을 한 황태자 [[쇼와 덴노|히로히토]]]의 명으로 남조를 정통으로 한 이후에도 즉위의 여부에 대해 의견이 갈린 유타나리 [[친왕]]에 대해서도 즉위한 것으로 보고 [[조케이 덴노]]로 시호를 올렸다. 하지만 이 때문에 자신이 남조의 후손으로 황위를 이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차례차례 나타나 자신이 남조의 후손이라며 들고 나온 사람들의 경우도 남조의 후손으로 인정받을 경우 최소한 백작 이상의 높은 [[화족|귀족]] 작위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기에 그런 사람들이 나타났을 것이다. 구스노키 마사시게나 닛타 요시사다 등 남조를 위해 목숨 바친 '충신'의 후손들까지 찾아내서 귀족 작위를 주던 시대적 분위기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총합 약 50여 명 정도가 나타났다. 그중에는 큰 반향을 일으킨 사람도 없지는 않지만 지금은 모두 근거 없는 주장으로 추정된다.[* 남북조 시대 혈통 분쟁과 관련한 부분은 [[교고쿠도 시리즈]] 3권 <광골의 꿈>에서 소재로 사용된다.] 쇼군과 천황의 관계는 흔히 [[만세일계]]로 상징되는 [[정통성]]의 천황, 권력을 위임받은 [[실권자]] 쇼군이라는 도식으로 흔히 설명되지만, 그것도 [[무로마치 막부]] 시절까지의 이야기이다. [[센고쿠 시대]]부터는 이미 그 권력의 정통성도 원래부터 쇼군에게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여기에 [[에도 막부]]대까지 오면 쇼군이 [[금중병공가제법도]]를 제정해 천황에게 이런저런 규정을 강요하는 등 사실상 하급자 취급을 받았다. 쇼군이 직접 천황이 되지 않은 것은 초기에는 천황의 상징성 때문이었지만, 그 이후에는 천황이 '''진짜로 아무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덕일]] 같은 사람은 "중세 일본의 천황은 제사장 역할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이러한 인식은 지금이라고 별로 다를 것은 없는지 2017년 생전 퇴위를 밝힌 아키히토 당시 덴노에게 이른바 유시키샤 회의(有識者会議)라 불리는 아베 신조 당시 총리의 사적 자문 회의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바지사장|덴노는 기도나 하고 있으면 그만이다]](天皇は祈っているだけでよい)'''"라는 비아냥이 나왔을 정도니. 히라카와 쓰케히로(平川祐弘) 도쿄대 명예교수 등에 따르면 이 발언을 전해 들은 아키히토 당시 덴노는 몹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적어도 아키히토 자신은 일본의 천황으로서 과거 일본의 침략으로 식민지로 전락하고 전쟁에 강제 동원되어 피해를 입은 이들이 있다는 것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내 왔건만 그 모든 것이 그것도 덴노를 받든다는 우익 관계자들로부터 단박에 부정당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궁내청 관계자도 "'''지금까지 폐하께서 해 온 활동을 모른단 말이냐'''"라는 반응이었다. [[https://mainichi.jp/articles/20170521/k00/00m/010/097000c|#]][[https://www.yna.co.kr/view/AKR20170521028600073|#]]]고 말하기도 했다. 다만 천황과 조정을 이루는 [[공경]][* 일본의 전통적인 [[문벌귀족]].]들은 당대의 일본 상류사회를 이끄는 셀럽처럼 인식되었고, 아무리 정치적인 실권이 없다고 한들 적어도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그들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역대 쇼군들은 황녀와 혼인함으로서 황실 전체를 막부 권위의 상징처럼 여겼다. 그래서 [[에도 막부]] 때는 애들이 고나라 덴노에게 했듯이 돌을 던졌다가는 목이 달아나는 수도 있었다. 그러다가 에도 시기 중기 이후 [[오규 소라이]] 등으로 대표되는 유교적 통치 이념이 지배층에게 퍼지자 천황이 다시 쇼군의 윗사람이라는 인식이 부활했다. 천황과 쇼군이 주고받는 친서를 살펴보면 이 시기부터 천황이 슬슬 윗사람인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한다. 물론 '윗사람'이라고 대해주는 선이었지, 막부를 타도하고 정권을 '진짜' 주인인 덴노에게 돌려줘야 한다느니 이런 소리하는 인간들은 가차없이 목을 잘랐다. 또한 윗사람이라고 해서 뭔가 실권이 있는 게 아니니 재력도 그렇게 변변치 못해, 왕실 보물을 교토 시장에다 내다 팔아서 살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일본 만화 [[히카루의 바둑]]에 이를 보여 주는 장면이 있는데, 작중 [[신도 히카루|히카루]]가 어느 골동품점 주인이 히카루의 지인으로부터 몰래 빼돌려 가지고 있던 [[혼인보 슈사쿠|토라지로]]의 물그릇 도자기를 걸고 바둑을 두는 에피소드에서 [[후지와라노 사이]]는 골동품점 주인이 빼돌린 그 물그릇 도자기에 대해 "분명히 토라지로를 따라 들어간 교토의 황궁에서 봤던 그 물그릇"이라며 "당시 황실의 재정이 몹시 궁핍했다고 알고 있는데 그때 외부로 반출된 것일까..."라고 생각하는 장면이 나온다.] 일본 메이지 시대에서 패전 뒤까지 활약했던 수필가 사토 고세키(佐藤垢石)가 쓴 '도미 감시(にらみ鯛)'라는 글에 보면, 만엔 원년 무렵 한여름이라 왕궁에 어선(御膳) 즉 수라상에 올라가는 생선들이 모조리 썩어서 악취가 나고 먹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고, [[고메이 천황]]이 연회를 열었을 때 왕궁 안에는 언제나 술이 모자란다는 이유로 술에다 물을 타서 마셨고 결국 몇 잔을 마셔도 취할 수가 없었다거나, 연회에 [[연어]] 한 조각이 남은 것을 보고 "'''버리지 말고 챙겨 두어라. 짐이 두었다 저녁 반주에 먹겠다(これを棄ててはならぬ。朕は晩酌の佳肴とするつもりである)'''"고 하는, 이게 진짜 한 나라의 국왕이 맞긴 한가 싶은 심히 안습한 에피소드가 소개되어 있다. [[https://www.aozora.gr.jp/cards/001248/files/46804_26525.html|#]] 그러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구심점이자 절대권력으로 옹립되어 막부에서 권력을 돌려주면서 '[[일본 제국]]'의 심볼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의 패전 이후 천황이 신이 아닌 인간임을 밝히는 '[[인간선언]]' 때문에 '신의 후예' 정도로 약간 위상이 내려갔다. 일본 제국 때에 [[로마 교황]]이 [[유럽]]을 포용하듯이 천황도 [[아시아]]를 포용해야 한다는 보편적 천황제(普遍的天皇制)는 끝내 정계, 학계 등에 등장하지도 못하고 무산되었다.[* 사실 일본 덴노가 아시아 세계에서 보편적인 군주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티베트 불교의 달라이 라마나 바티칸의 로마 교황 같은 종교적 권위를 내세우자니 일본의 신토는 불교나 그리스도교처럼 동아시아 세계 전체에서 통용되는 종교도 아니었고, 문자 기록부터 시작해서 인문학, 정치학, 철학, 기술 등 온갖 인프라의 발상지로 말 그대로 '세계 문화' 그 자체였던 중국처럼 뭔가 일본이 고안하고 내세울 수 있는 보편적인 철학을 제시하고 내세울 위치에 있지도 못했다. 이는 지금이라고 별로 다를 것은 없다.] 이 시절에도 천황이 절대 군주였는지는 일본 근대사를 차분히 곱씹어야 할 일이다. 일본 제국 시절에 중요한 것은 천황이 전 일본을 다스리는 신국(神國)의 계승자라는 '이미지', 즉 권위를 지닌 구심점이었기 때문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다른 나라 [[외교관]]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일본 황족으로 태어남은 큰 불행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예절에 얽매여 살고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하면서 손으로 [[마리오네트]] 다루는 시늉을 하여 지켜보던 [[외교관]]들이 당황했었다는 말은 도시전설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실제로 그랬다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이토 히로부미는 군주에게 매우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는 [[독일 제국]] [[헌법]]을 모방해서 [[대일본제국 헌법]]을 제정할 정도로 메이지 천황을 존중하고 섬겼다.] [[메이지 덴노]]는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실세들의 눈치를 보고 그들의 뜻에서 어긋나지 않게 행동하였다. 보통 다른 사람에 의해 군주가 된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그렇듯이. 메이지 시대 초기에 천황의 위치는 민중에게도 대단히 모호하게 여겨졌다. 당시 일본인들은 오랫동안 쇼군과 [[다이묘]], [[사무라이]]들의 지배를 받았지 천황의 지배를 받은 것은 아니었으며, 그랬기에 천황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있었다.[* 메이지 정부가 전국 각지에 징병령을 내려 농민들로 구성된 징집 군대를 편성할 계획을 세웠을 때도, 농민들이 [[죽창]] 들고 관공서 몰려가서 "천황이라는 것이 도대체 뭔데 우리 목숨을 혈세로 거둬가겠다는 거냐"며 화를 냈을 정도였다.] '현인신(아라히토가미)'이라는 개념조차도 민간의 생각과 지배층의 생각이 잘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메이지 시대]] 초기 천황이 행차할 지역에 사전 파견된 정탐꾼이 그 지역의 민심에 대해 기록한 점이 이러한 점을 잘 드러난다. '천황께서 행차하시니 길을 닦으라고 명령해서 길을 청소했다. 천황의 행차라는 것은 정말로 귀찮기 그지없다.' 게다가 행차를 위해 뭘 만들라고 하면, 적당히 대충 만들고 끝인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를테면 메이지 초기에는 천황의 행차에 [[화폐|돈]]을 집어던지는 일이 꽤나 자주 벌어졌는데, 신에게 돈을 바쳐서 경의를 표하는 민간 [[신토]]의 전통을 그대로 천황에게 적용한 것이다. 돈만이 아니라 천황의 행차가 지나가면 [[춤]]이나 [[노래]] 또는 [[음식]]을 바치는 사람도 나타났다. 이것은 민간인들이 자신들이 아는 민간 신토의 방식으로 신이라고 하는 천황에게 경의와 숭배를 나타내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천황에게 서양의 절대 군주와 같은 권위를 씌우려 했던 [[일본 정부]]는 이런 행동에 기겁하였고, 금지와 억압으로 이런 전통을 단절시켰다.[* 아직도 남아 있는 곳도 있다고 한다.] 같은 이유로 현인신인 천황이 존재하는데 신과 소통한다고 자처하는 것은 불경스럽다는 이유로 기존 신토계의 무속인들도 탄압당했으며, 이는 현재 일본 신토에서 [[무녀]]가 아르바이트 직업화하고 궁사([[신관]])는 사실상 신사 관리인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 일본 민중들 사이에 거의 민중종교로 자리잡고 있던 [[불교]]가 특히 된서리를 맞아서 신불분리령에 수반한 폐불훼석(廢佛毁釋)으로 전국 각지에서 사찰들이 파괴되고 많은 [[승려]]들이 강제[[환속]]당했다. 메이지 정부는 천황에게 서양의 황제와 같은 권위를 덧칠하려 했다. [[제국주의]] 열강의 위협 아래 최대한 빨리 이 일을 해치우기 위해서는 전 국민을 상대로 한 세뇌 작업이 필요했으며, 당연히 폭력과 금지·억압이 덤으로 따라붙을 수밖에 없었다. [[일제강점기]] 초기의 '헌병경찰'도 [[일본]]에서 하던 짓을 [[식민지]]로 가져온 것에 불과했다. 학교에서는 위처럼 메이지 정부의 입맛에 맞게 각색된 신화를 사실로 가르쳤고, 천황의 사진과 초상화인 어진영(御眞影)을 모셔 놓고서는 천황을 섬기게 만들었다. 불타는 학교에 그 어진영을 구하려고 뛰어들어갔다 죽는 교사의 일화가 전설적인 미담으로 그려지고,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다이호(항공모함)|다이호]]가 피격당해서 함내에 화재가 발생했는데도 함내에 걸린 어진영을 다른 구축함에 옮기겠다고 뻘짓을 해서 화재유폭-굉침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는 일이 나올 정도였다. 나중엔 [[궁성요배]][* 천황이 있는 도쿄 황거([[고쿄]])를 향해 신민으로서 절을 하는 일.]를 [[식민지]]를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강요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실패와 몰락은 이미 여기서 예견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로, 실제 권력이야 어쨌건 근대 일본에서 '''천황의 상징성과 신성함'''은 함부로 건들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수준으로 격상되었다. 심지어 [[메이지 덴노]]가 잠시 묵었던 집에서는 그가 썼다는 물건과 자리에 투명 덮개를 덮어 박물관의 전시물 다루듯 하였고 메이지 덴노가 마시고 목욕했다는 우물물은 '신이 사용한 물이니 신령함이 깃든 만병통치약일 것이다'라고 해 사람들이 줄을 서서 그 물을 받아갈 정도였다고 한다. 천황이 잠시 머무는 집이더라도, 지역에서 유지 가문이어야 하고 가족 중 죽은 이가 없어야 하며 집안에 우환이 없어야 하는 등, 까다로운 조건을 걸고 각별히 신경을 써 머물 집을 뽑았다. 대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천황이었던 [[쇼와 덴노]]는 단순한 신성불가침의 대상이나 얼굴마담이 아닌 꽤나 실권이 있었던 국가원수였다는 연구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쇼와 덴노가 직접 영향력을 행사했던 케이스는 단 3차례가 있다. 첫째는 [[다나카 기이치]] 총리를 질책해서 물러나게 한 사건, 둘째는 [[2.26 사건]] 당시 '이유가 어떠하건 내 허락도 없이 내 군대를 마음대로 움직여 반란을 일으킨 것들은 내 신하가 아니다', '장군들이 가만 있겠다면 내가 직접 근위사단을 지휘해 진압하겠다!'고 까지 할 정도로 강경한 태도를 보여서 반란 진압의 계기를 마련한 점, 셋째로, 패전 과정에서도 '성단(聖斷)'을 내리는 등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바 있다. 이 외에도 전쟁 당시 [[쇼와 덴노]]는 일본 육해군의 동향을 일본 내에서 가장 잘 파악하고 있었으며, 작전을 수정하라고 지시한 사실도 있다. 그를 처벌하지 않았던 [[미국]]의 장군인 [[더글러스 맥아더]]에 대해서는 "히로히토를 제대로 처벌하지 못했다는 면에서 매우 잘못했다"는 [[떡밥]]도 은근히 나오고 있다.[* 맥아더는 천황에 대해서 “천황 한 명의 가치는 미군 사단 21개와 맞먹는다”며 그런 영향력을 지닌 천황을 굳이 교수대에 올려서 괜히 패망한 일본인들 감정만 자극해 사태를 악화시킬 바에는 자신이 목표로 하는 일본 개혁에 적절하게 이용해먹는 것이 차라리 더 효율적이고 일본인들의 저항도 덜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패전 직후 일본 전국 각지로부터 맥아더와 미군을 환영하는 무수한 편지들이 쇄도했는데, [[오사카]] 인근에 사는 오우치 하나코라는 사람이 1945년 12월 맥아더 사령관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아예 “'''식량 배급을 늘려주면 천황제를 폐지해도 대중들은 환호할 것'''”이라고까지 썼다고[[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880952.html#csidx2d3f5f88705e0cbb01fc16d1501fb08|#]] 특히 일본국 헌법 공표당시 일본 대중들 대다수가 군대와 전쟁포기 조항을 지지했을 정도로, 정말 당시 대중들은 전시상황만 끝날 수 있다면 뭐라도 좋은 상태였다. 물론 맥아더가 포섭하려 한 건 대중이 아니라 반공에 협력해줄 지도층이었기에 얘기가 달라진다.] 이 외에도 [[메이지 덴노]] 역시 시기에 따라 나름 권력을 지녔다고도 한다. 사실 실권이 없어 보인 것도 따지고 보면 어려서 뭘 몰랐거나, 아니면 실제로는 [[히카루 겐지]]로 대표되는 일본의 이상적인 지도자 유형에 따라 신하들에게 다 맡기느라 그랬다는 얘기도 있다. 지도자는 생각 없이 인생을 즐기고, 실제 일은 아랫것들이 다 하는 스타일. 이런 문화 때문에 일본은 굳이 천황이 아니라도 막부나 번, 군부에서 유난히 중간층의 영향력이 강했다.[* 그래서 일본의 역사물을 보면 막부나 번 등에서 '가로(家老)'라든지 하는 사람들이 주축이 되는 경우가 많다. 쇼군이나 번주는 가끔 몇 마디 던지는 정도고, 아예 참석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쉽게 말하자면, 사장은 없이 전무, 상무 등이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는 격.] [[대일본제국 헌법]] 등에서도 나타나 있듯이 실제로는 일본의 국사 중에서는 천황이 아니면 권신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못 건드리는 영역이 있었고, 메이지 6년의 정변이나 종전 당시 상황에서 볼 수 있듯이 진짜 답이 없으면 천황이 나서서 일을 해결하기도 했다. 또, 메이지 시대 말년에는 [[이토 히로부미]]도 [[안중근]] 의사에게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암살당해 세상에 없었고]] 어지간한 신하들도 슬슬 나이를 먹고 은퇴했을 뿐더러 [[메이지 덴노]] 본인도 나이를 먹었을 무렵에는 그나마 활동을 좀 했다. 사실 [[쇼와 덴노]]는 서자였던 [[메이지 덴노|할아버지]]와 [[다이쇼 덴노|아버지]]와는 달리 다이쇼 덴노의 정실인 [[데이메이 황후]]에게서 태어난 적장자였기에, 정통성에 흠이 없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미래의 군주로 태어나고 자랐다. 그리고 그가 천황으로 즉위했을 무렵엔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실세들은 이미 죽고 없었다. 쇼와 덴노를 위협할 힘을 가진 것은 [[일본군]]뿐이었지만, 당시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일본군의 육군과 해군은 견원지간]]이었고, 그 둘 모두는 특이하게도 "내각의 통제는 거부하지만 최고 지휘관인 천황에게만은 절대 복종한다"고 절대 맹세 및 복종했다. [[만주사변]] 이전까지 쇼와 덴노는 공공연하게 민간정부를 지지했으며 이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연구는 없다. 문제는 내각이 천황의 신임을 등에 업고 군부를 컨트롤하려고 하면 군부는 통수권이 천황에게 있지 내각에 있는 게 아니라면서 반발하는 것이었다. 군부는 이른바 통수권 간범이라는 논리로 내각과 정당정치를 역적도당으로 만들어버리고, 이를 막으려는 궁중 중신들까지도 역적/간신배 딱지를 붙여 탄핵했으며 193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 '천황기관설' 등 천황을 현대적 정책결정과정의 일원으로 편입시키려는 이치키 기토쿠로 등 쇼와 덴노 측근들의 시도를 격렬하게 공격, 축출시키고 메이지 시대의 원로였던 [[사이온지 긴모치]]까지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 극에 달한 게 [[2.26 사건]]으로, 쿠데타군에게 총리대신이 살해당한 줄 알았던 [[쇼와 덴노]]는 쿠데타 당일 새벽에 반란군의 요구를 거부하고 자신이 직접 통수권을 행사하면서 육군에게 즉시 쿠데타군을 진압하도록 명령했으나, 육군상 가와시마는 이를 무시하고 쿠데타군과 3일이나 지리한 대치전과 협상을 벌였으며[* Ikuhiko, Hata, Hirohito: The Showa Emperor in War and Peace, Global Oriental Ltd, 2007, p.24] 심지어 반란을 진압해야 할 계엄사령관 가시이는 사태 마지막 날까지도 육상과 참모차장에게 천황에게 대권을 쥐어주고 유신을 선언토록 하자고 설득하고 있었다.[* Ikuhiko, p.31] 결국 진압작전이 시작되자 궁지에 몰린 쿠데타군의 투항으로 사태가 마무리되었다. 이 사건은 [[쇼와 덴노]]의 통수권이 얼마나 유명무실하였는지를 입증했다. 더군다나 [[사이토 마코토]]나 [[다카하시 고레키요]] 등 유력한 측근들이 살해당하고 권위를 실추당한 쇼와 덴노는, 쿠데타군이 자신의 바로 아래 남동생인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과 접선하여 황위 교체를 노렸다는 뜬소문까지 퍼지면서 자신의 위치까지 위협받기에 이르렀다. 쇼와 덴노가 무력화되는 시기도 바로 이 2.26 이후이다. 쇼와 덴노가 1937년 [[우가키 가즈시게]]를 총리로 임명하자 육군이 반발하여 무산시키고 [[하야시 센주로]]를 내세워 총리대신에 앉힌 사건이 가장 대표적이다. 육군에겐 천황에게 대놓고 거역할 힘이 있었던 것이다. 이때부터는 현인신이라는 천황조차도 군부의 눈치를 봐야 했다. 실제로 작전회의에서도 쇼와 덴노가 직접 의견을 내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군 수뇌부들이 낸 의견들을 듣고 다수가 찬성하는 쪽으로 승인해주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몇몇 개막장 작전에 관해서는 쇼와 덴노도 '이 작전이 실제로 가능하기나 한 건가?'라며 태클을 걸기도 했으나, 결국 수뇌부 다수가 찬성하면 본인의 의견은 접어버리고 '다수가 찬성했다면 짐 또한 반대하진 않겠소.'라며 결국 승인을 해주었다. 심지어 [[태평양 전쟁]]의 개전도 이런 식으로 이루어졌다. 쇼와 덴노가 [[포로]]에 대한 인도적 대우를 명시한 [[제네바 협약|제3 제네바 협약]]과 전시 [[생화학무기]] 사용을 금지한 [[제네바 의정서]]에 비준하는 것을 거부했다는[* 당시 일본에서는 의회가 아닌 천황만이 조약을 비준할 수 있었다. 참고로 일본은 [[제네바 의정서]]는 1925년에 서명했지만 비준은 1970년에 했고 [[제네바 협약]]은 1929년에 서명했지만 비준은 1953년에 했다.] 말이 있으나 비준이 무산된것은 육군과 해군, 즉 군부의 반대로 1934년에 무산된 것이므로[* Sherman, Christine, War Crimes: Japan's World War II Atrocities, Turner Publishing Company, 2001, p.258] 쇼와 덴노가 조약의 비준을 거부했다는 주장은 사실무근이며 오히려 외국과의 조약을 체결하고 비준한다는 천황의 권위가 얼마나 땅에 떨어졌었는지를 확인할수 있다. 섭정 시절인 1925년에 제정된 [[치안유지법]]을 1928년에 강화해서 반정부운동 탄압에 써먹었다고 주장되나 마찬가지로 쇼와 덴노가 섭정이었던 1922년 2월에 사법성에서 치안유지법의 전신인 '과격사회운동단속법안'을 제출했다가 기각된 사실과[* Tipton, Elise, The Japanese Police State: Tokko in Interwar Japan, Bloomsbury Academic, 2014, p.22] 1925년 보통선거의 실시와 맞물려 내무성과 당시 보수양당이었던 헌정회와 정우회의 지지를 받아 입법되고 강화되었던 사실[* Tipton, p.22-23] 이 어디에도 쇼와 덴노가 관여했다는 주장이 끼어들어갈 자리는 없다. [[우가키 가즈시게]]가 총리로 지명되었다가 육군의 반대로 조각에 실패한 것을 [[아돌프 히틀러]]가 [[발터 폰 라이헤나우]]를 2번이나 [[독일 육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려다가 육군의 반대로 실패한 사례로 비교하는 경우가 있으나 일국의 재상인 총리대신을 임명하려다가 군부가 인정을 거부하여 무산된것과 군부인사문제를 손대려다가 군 내부의 반대로 실패한 것을 같은 격에 둘 수 없는 것이고 또한 히틀러의 외교정책에 독일군부가 쿠데타 음모까지 벌여가면서 반대하다가 결국 모두 숙청되고 예스맨만 남아 히틀러에 아무런 대꾸도 못하는 신세가 된 것과는 달리 일본군부는 정책결정과정에서 막강한 발언권을 행사했고 항복을 질질 끄는데 성공했던 걸 고려하면 독일 군부와 일본 군부의 권력 지위는 서로 비교하기가 어렵다고 하겠다. [[중일전쟁]] 초반에 [[일본 육군]]은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을 점령한 후 협상으로 전쟁을 끝내는 것을 고려했는데 쇼와 덴노는 협상을 거부하고 전쟁을 확대시킨 [[고노에 후미마로]]를 지지했다고 하나, 협상을 파토낸 건 육군성(이타가키)과 내각(고노에)이었고 협상으로 전쟁을 끝내고자 한 쪽은 지금까지 만주 침략 활동을 주도해 온 참모본부(간인노미야)였는데, [[사이온지 긴모치]]의 비서였던 하라다 구마오의 일기에 의하면 1938년 1월 14일 내각의 반대에 직면한 간인노미야가 협상 지속 문제를 놓고 '어전회의(御前会議)'를 열어서 내각의 결정을 뒤집으려고 하자 쇼와 덴노가 "그러면 애초에 중국에서 일을 안 벌였으면 될 것 아니냐"며 질타했던 것이다.[* Harada, Kumao, Saionji-ko to seikyoku, vol.6, Iwanami Shoten, 1951, pp.206] 쇼와 덴노의 평가는 매우 복잡한데, 자세한 것은 [[쇼와 덴노/전쟁 책임]] 문서로.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