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창덕궁/건축물 (문단 편집) === 부용지 일대 === || {{{#gold ''' 사진 '''}}} || {{{#gold ''' 설명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창덕궁_부용정_근경.jpg|width=100%]]}}} ||'''[[창덕궁 부용정|부용정(芙蓉亭)]]'''[br]부용지의 정자로 정면 5칸, 측면 4칸, 배면 3칸의 十자형 전각이다. 배면 한 칸은 연못에 높은 석주(石柱)를 세우고 수중누각(水中樓閣)이 되게 하여 수상과 지상의 조화를 추구했다. 1707년(숙종 33)에 택수재라는 명칭의 정자였으나 1792년(정조 16)에 개축하면서 명칭 또한 지금의 부용정으로 고쳤으며 1795년(정조 19)에 있던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종친들과 신하들을 초청해 낚시와 뱃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 정조실록 42권 19년(1795 청 건륭 60년) 3월 10일 1번째 기사][* 또한 정조는 관료들을 대상으로 시짓기시험을 주관했는데, 제 시간에 시를 못 지으면 부용지 가운데에 있는 작은 섬으로 귀양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관료들과 공부도 하고, 술자리도 가졌다고 한다.][* 이런 양식의 건축은 몇 년 후 수원화성 방화수류정에서도 구현되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창덕궁 영화당.jpg|width=100%]]}}} ||'''[[창덕궁 영화당|영화당(暎花堂)]]'''[br]부용지 동쪽에 있는 전각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이익공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광해군]] 때 처은 건립되었으나 현재의 전각은 1692년(숙종 18)에 재건된 것이다. 부용정 일대에서 내력이 제일 오래된 건물이다. 정조 이전까지 왕과 신하들이 연회를 개최하거나 활을 쏘는 곳이고 이후 시험장으로 활용되었다. 영화당 앞 마당은 현재 모습과는 달리 [[창경궁 춘당지]] 바로 앞까지 넓게 열린 공간이었는데, 이 마당을 '춘당대春塘臺'라 불렀다. 공간이 매우 넓어 문과/무과시험 가리지 않고 왕이 직접 행차하여 과거시험을 지켜보고 관장했으며 이곳에서 치는 과거시험을 "춘당대시春塘臺試"라고 부르기도 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창덕궁_주합루_전경(가을).jpg|width=100%]]}}} ||'''[[창덕궁 주합루|주합루(宙合樓)]]'''[* 주합루의 명칭은 시간(宙: 왕고래금(往古來今))과 공간(合: 상하사방(上下四方: 육합六合))을 의미한다. 시공을 아울러 역대의 서책을 보관한다는 의미로 여겨진다.][br]창덕궁 부용지의 전각 중 하나로 정면 5칸, 측면 4칸, 팔작지붕 형식의 중층 전각으로 1776년(정조 원년)에 건립되었다. 경훈각처럼 층마다 명칭이 달랐다. 주합루의 경우 2층은 주합루, 1층은 어제각이라 했으며 본래 역대 국왕들의 글과 어필을 보관하던 곳으로 이후 규장각으로 개명되었다. 정조가 인재들을 양성하고 자신의 치세를 보필하는 장소였으나 일제강점기 당시 연회장으로 활용되는 등의 수난을 겪었다. 주합루 앞을 둘렀다가 사라진 취병(翠屛)은 최근 재현되었다. 주합루로 들어가는 문인 어수문은 취병과 함께 매우 독특한 모습을 보여주는 건축물로, 조선시대에 거의 사라진 건축 의장을 풍부하게 가진 귀중한 사례다. 어수문 양쪽의 소문 형태도 독특하거니와 어수문 내외부에는 정교한 조각을 둘러놓았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서향각.png|width=100%]]}}} ||'''[[창덕궁 서향각|서향각(書香閣)]]'''[br]부용지 권역의 전각 중 하나로 주합루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정면 8칸, 측면 3칸의 전각으로 주합루에 보관된 각종 도서, 어진과 어필 등을 말리던 포쇄소였다. 포쇄란, 좀스는 것과 습기가 스며 망실되는 것을 막고자 햇볕에 내어놓고 말리는 것을 의미한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 총독부에 의해 양잠소로 변질되어 한동안은 뜬금없이 누에치는 곳으로 안내가 버젓이 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서향각 본래 기능대로 안내가 되고 있다. 다만, '친잠권민'(왕실에서 친히 누에를 치는 것은 백성들에게도 권해야 한다)이라는 게판은 현재까지 걸려 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창덕궁 희우정.png|width=100%]]}}} ||'''[[창덕궁 희우정|희우정(喜雨亭)]]'''[br]주합루 뒤편에 자리잡은 정면 2칸의 작은 전각으로, 왕의 열람실이었다고 한다. 1645년(선조 23)에 초당(草堂)으로 세웠으며 원래 이름은 취향정(醉香亭)이었다. 1690년(숙종 16)에 가뭄이 심하여 이곳에서 기우제를 올렸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내려 가뭄이 해소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지붕을 기와로 바꾸고 희우정이라 개칭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천석정.jpg|width=100%]]}}} ||'''[[창덕궁 천석정|천석정(千石亭)]]'''[br]주합루 동북쪽 언덕 위에 있는 ㄱ자 형태의 정자로 누마루에 제월광풍관(霽月光風觀)이란 현판이 걸려 있어 제월광풍관으로 알려져 있다. 한때 순조의 세자였던 [[효명세자]]가 학문을 닦았던 곳이었다.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