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차 (문단 편집) == 역사 == > {{{-1 The tea-plant, a native of southern China, was known from very early times to Chinese botany and medicine. It is alluded to in the classics under the various names of Tou, Tseh, Chung, Kha, and Ming, and was highly prized for possessing the virtues of relieving fatigue, delighting the soul, strengthening the will, and repairing the eyesight. It was not only administered as an internal dose, but often applied externally in form of paste to alleviate rheumatic pains. The Taoists claimed it as an important ingredient of the elixir of immortality. The Buddhists used it extensively to prevent drowsiness during their long hours of meditation.}}} > > 중국 남부가 원산지인 차나무는 일찍이 중국의 식물학과 한방에 알려져, 도(筡), 설(蔎), 천(荈), 가(檟), 명(茗)[* [[당나라]] 시기의 문인 육우(陸羽, 733~804)의 저서 《다경(茶經, The Classic of Tea)》에 나오는, 고대에 차를 가리키던 다섯 가지 이름이다.]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고전에서 언급되었다. 차는 피로를 줄이고 영적인 즐거움을 주며 의지력을 강하게 하고 시력을 회복시키므로 높이 평가되었다. 사람들은 차를 음용할 뿐만 아니라, 류머티즘 통증을 치료하기 위해 연고로 도포하는 경우도 있었다. 도가(道家)에서는 이를 불멸의 영약에 들어가는 주성분이라 믿었다. 불교도들은 오랜 시간 명상하는 동안 졸음을 막기 위해 이를 널리 사용하였다. >---- > [[오카쿠라 덴신]], 《차의 책(''The Book of Tea'')》Chapter II. The Schools of Tea 中 차나무의 원산지는 [[중국]], 정확히는 오늘날 중국과 [[미얀마]] 사이의 국경에 해당하는 지대이다.[* 주변국들과는 달리, [[미얀마어]]에서는 차를 '러페(laphet)'라는 별개의 어형으로 부르는데, 사실 이는 荼의 [[상고한어]] 발음 Zh. /*rlaː/, B&S /*lˤra/의 어원이 된 고대어를 보존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만큼 재배역사가 길었다는 뜻이다. 흥미롭게도 미얀마의 러페는 음료로도 마시지만, '러페 소'라고 하여 찻잎을 땅에 묻어 발효시킨 뒤 소금에 절여서 [[반찬]]처럼 먹는 레시피도 존재한다.] [[중국 신화]]에서는 [[신농]]씨가 물을 끓이다 찻잎이 빠졌다는 일화를 전한다. 전한 [[경제(전한)|경제]]의 유적에서 마른 찻잎이 발견되었다고 하며,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2-300년 전부터 이미 상류층에선 차를 마시기 시작한 듯하다. 이때는 荼[* '도'라고 읽는다. [[시경]]에서 처음 등장하는 이 글자는 본래 '쓴 풀'을 광범위하게 이르던 글자였다. 오늘날에는 씀바귀를 뜻하는 글자다.]라는 자형으로 기록했다. 오늘날의 [[윈난성]]과 [[쓰촨성]]에서는 전한 시대쯤부터 많이들 마셨다고 한다. 이 당시의 '도'는 지금의 차보다 농도가 훨씬 진하다보니 매우 썼으며, 여러 약초를 함께 넣어 우려내 상비약 겸 각성제 겸으로 마셨다고 한다. 향토 특산물에 불과했던 '도'는 [[진(영성)|진나라]]의 천하 통일과 함께 중국 각지로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주로 귀족층이 즐겼다고 한다. 중국에 불교를 전파하러 온 서역 승려 중 일부도 잠을 쫓는 용도로 차를 활용했다고 전해진다.[* 전한 시대 쓰촨성에서 차 재배를 처음으로 했다는 전설로 잘 알려진 오리진(吳理眞)~~Origin~~ 역시 불교 승려였다고 한다.] 민중들에게 확산된 것은 [[당나라]] 이후다. 당나라 이전, 남북조시대에 북조에서는 차를 낙노(酪奴) 또는 수액(水厄)이라고 불렀다. '낙노'는 [[유제품]]의 노예, '수액'은 물난리란 뜻이다.[* 북조에 귀순한 남조 인사가 연회를 할 때 남조에서 하던 대로 차를 대접했는데, 이때는 차를 오늘날처럼 조그만 잔이 아니라 훨씬 큰 잔에다 어마어마하게 줬다. 그런데 북조 사람들은 차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아서 이걸 물난리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고대 중국 북부에서 차는 유제품보다 못한 음료로 취급을 받았는데, 짐작하다시피 이는 중국 북부를 지배하던 유목민들이 옛날부터 유제품을 즐겨 마셨기 때문이다. [[당나라]]로 중국이 통일되고 불교가 융성하면서, 후세에 다성(茶聖)이라고 불리는 [[육우]]가 <다경(茶經)>을 저술해 최초로 체계적인 다도를 퍼뜨리며 스님들이 마시던 차도 민간에까지 퍼졌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송대에 이르러 차도 전매품목에 들어갔다. [[대한민국|한국]]에서는 [[삼국시대]] 후반부터 마시기 시작한 듯하다. 초창기에는 [[당나라]]에서 수입한 고가의 차를 일부 계층이 마실 수 있었고, [[통일신라]] [[흥덕왕]] 시기 828년 12월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대렴이라는 사람이 차나무 씨앗을 들여와 재배를 시작하면서부터 차 마시는 것이 크게 유행했다고 한다. 다만 이 시기의 음다법은 차만 맑게 우리는 것이 아니라, [[곡물]]과 [[과일]], [[채소]] 등등을 집어넣어 [[죽]]처럼 먹는 것이었다. 중국은 물론이고 차 문화를 수입해 온 한국 또한 이런 식으로 먹었다. 이후 차 문화를 정리하면서 맑게 우리게 되었지만 그래도 [[소금]]은 뿌렸다. [[후추]]와 더불어 '''세계 역사를 바꾼 작물 중 하나이다.''' 당장 [[아편전쟁]]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는 것이 [[대영제국]] 내에서 차가 유행해서 발생한 대영제국-청나라 간의 경상수지 불균형이다. 당시 [[산업혁명]]을 이룬 대영제국의 주력 생산물은 공장제 옷감(직물)이었는데, '''청나라는 이걸 인건비로 씹어먹었고''',[* 현대 기준으로 해석하면 [[나이키]], [[아디다스]] 등 다국적 의류기업의 개도국 공장이 그것이다. 선진국이 요구하는 기준에 맞춘 선진국 공장의 생산성 자체는 훌륭하지만, 개도국의 저렴한 인건비 덕에 가성비 측면에서 개도국의 인력집약적 공장이 선진국의 자동공정 위주 공장을 씹어먹는 것이다. 기계를 돌리는 비용도 공짜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정말로 중국의 수작업 생산품들이 유럽의 공장제 생산품들을 가격에서 이겼다는 것은 아니고, 단지 유럽의 제품들은 지구 반바퀴를 돌아오면서 어마어마한 운송비가 붙었기 때문에 가격경쟁에서 밀린 것이다.] 그 결과 수출은 못하면서 수입만 잔뜩 해야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결국 청나라는 대영제국의 은을 빨아먹는 [[블랙홀]]이 되었고, 이걸 해결해 보겠다고 동인도 회사가 인도산 아편을 청나라에 푼 것이 아편전쟁의 계기가 되었다. 아편전쟁 때문에 청나라가 동북아의 패권을 상실했고, 그 결과 아시아에 발생한 여러 사건을 생각해 보면 차가 역사를 크게 바꾼 작물이라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