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징병제 (문단 편집) === [[근대]] 화기의 발전과 [[용병]] 쇠퇴 === [[용병]]이 필요했던 이유 중 하나는 칼, 창, 활과 같은 무기들을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에 걸친 훈련이 필요했기 때문인데 무장과 훈련이 부실한 농민 징집병과 비교하여 용병이 가진 방어구의 유무와 이러한 훈련의 차이가 냉병기 시대 때는 심각한 전투력 차이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총]]의 개발로 이야기가 달라졌다. 얼마나 훈련을 받았는가와 아무리 두터운 갑옷을 입었는가와 상관없이 총 앞에서는 생존을 확신할 수 없게 되었고, 총을 본 적도 없는 사람에게조차 총의 관리와 사격을 훈련시키는 데에는 [[기초군사훈련|보통 한 두 달, 극단적으로 단축한다면 수 주 내에도 가능]]했기 때문에 징집병의 문제점이었던 전투력 문제가 크게 해결된 것이다. 거기에 봉건 시대와 다르게 중앙집권화된 국가 입장에선 국가의 총기 숫자와 제조 능력만 충분하면 유사시 징집한 병사들을 훈련시키면 용병 집단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되는 숫자의 전투력 확보가 가능해졌다. 그 덕에 상비군의 중요성이 대두되었고 [[용병]]의 몰락 이후 국가에서 자원병을 모집해 군대를 굴렸으며, [[30년 전쟁]] 당시 이미 스웨덴이 징병제에 기반한 상비군과 전시 동원 체제를 효과적으로 운영함으로서 가능성을 입증해보였고, 결정적으로 [[프랑스 혁명 전쟁]] 당시 프랑스 혁명 정부가 대규모 징병을 통해 수십만 명의 병사들을 굴려 전 유럽을 상대로[* 그 상대는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영국]],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스페인]], [[포르투갈 왕국]], [[네덜란드 공화국]], [[사르데냐 왕국]], [[오스만 제국]] 등으로, 당시 유럽의 힘 좀 쓴다는 나라는 죄다 대 프랑스 동맹에 가담하였다.] 홀로 싸워서 국가의 체제를 유지하는, 당시의 상식을 초월하는 무시무시한 전과를 이뤄내자 주변 국가들도 전부 징병제를 시도하게 된다. [* 러시아 등의 국가는 프랑스 혁명 전쟁 이전인 [[표트르 1세|표트르 대제]] 시절 이미 스웨덴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창안한 징병제 제도를 벤치마킹해 도입하고 있었다. 골자 자체는 무려 1차 세계 대전 때까지 유지되었기에 시간이 흐르면서 타 유럽 국가들에 비해 비정상적일 정도로 긴 복무 기간 등의 부작용이 있었다. ] [[영국]] 같은 경우, 이런 군인들의 체력과 건강 상태를 개선하려 하던 것이 효과가 좋자 국민 복지와 의료 제도에도 적용하게 되었고, [[프랑스]]의 경우도 [[군인]]에게 최소한의 자질(의사소통[* [[프랑스]]는 [[19세기]] 초까지도 지방에서는 [[프랑스어]]가 아니라 지방 고유어(사투리 수준이 아니라 진짜 별개의 언어)나 인접 국가 언어([[독일어]], [[스페인어]] 등)를 썼기 때문에 타 지방과의 의사소통이 수월하지 않았다. 이 점은 공교육이 정립되면서 전 국민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면서 해결된다.]+훈련 과정 이해)을 갖춰주기 위해서 나폴레옹 시절부터 [[공교육]]을 실시하게 된다. [[일본제국]] 역시도 사회화 수준이 낮은 일반인들에게는 군대가 공교육의 기능을 수행했으며, 역시 교육 수준이 낮았던 산업화 시절 [[대한민국]]에서도 그러했다. 특히 이런 식으로 사회화를 받을 경우 [[국가주의|국가와 군대에 대한 호의적인 감정도 불어넣을 수 있어서, 애국심까지 연결]]되기도 한다. 즉, 근대 국가의 정치 사상은 시민혁명에서 나왔지만, 근대 국가를 뒷받침해 준 역량은 징병제였던 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