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직파법 (문단 편집) ==== 벼에서 ==== 매우 간단한 방법답게 벼를 키우기 시작하면서부터 있던 방법이나, [[고려]] 말기에 [[중국]]으로부터 [[모내기]]가 들어와 [[조선]] 중기에는 완전히 자리를 잃는다.[* 다만 이앙법에 비해 가뭄에 강하다는 장점 덕에 조선 초기([[15세기]])에 이앙법이 제한을 받고 잠시 장려된 적이 있다. [[농사직설]]에도 물이 충분하지 못한 곳에서는 위태로운 방식이라고 경고하며 이앙법을 쓰지 않을 것을 장려하는 내용이 있었다. 이는 당시 수리시설이 [[영 좋지 못한]] 탓도 있었다. 사실 조선 중기 이후에도 1698년(숙종 24년)에 호조판서 이유(李濡)가 수원이 부족하고 건조한 곳에서의 이앙재배의 불리함을 지적하고 그것을 금지할 것을 진언하여 왕이 이에 따른 기록이 있으며, 1839년(헌종 5년)에도 이지연(李止淵)의 상소로 수리 시설이 불안한 전답에서의 이앙재배가 금지되기도 하였다. 특히 한반도는 하상계수가 세계최고급의 하천들이므로 수리와 관개를 아무리 잘해도 위험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간척지 논을 중심으로 직파법이 보급된 이후에는 다시 사용이 늘었다. 이른바 무논골점파법이라 하여 논에 [[볍씨]]를 뿌리는 기계가 보급되어 규칙적으로 볍씨를 뿌릴 수 있기 때문. [[모내기]]에 일손이 많이 가는 [[농촌]]에서는 [[고령화]]로 노동력이 부족해지고 있어 쓰임이 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