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지리학/역사 (문단 편집) === 고대 ~ 중세 === 지리(학)(Geography)라는 용어는 스트라본(기원전 64~ 기원후 23)의 저술 『지리학(지리지)Geography』에서 최초로 기록되었다. 다만 스트라본은 이 『지리학』에서 더 과거의 지리 관련 저술들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지리'라는 용어는 그 이전부터 사용되어 왔던 것으로 보인다.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와 같은 국가나 지역들의 발전을 기술하는데에 있어 환경결정론적 관점을 견지했다. [[에라토스테네스]]는 지구의 둘레를 처음으로 계산하고 위경도 좌표체계를 창안했다. 더 이전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에는 장소에 대한 철학적 사유의 원형이 담겨있다고 평가된다. 스트라본이 지역의 개성을 기술하고 그 원인을 고찰하고자 했다면, 동시대의 [[프톨레마이오스]](90~168)는 지구의 크기, 좌표체계, 지도 투영법 등 일반적 방법론에 관심을 가졌다. 그 결과물이 유명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세계지도이다. 고대의 지리학의 주요한 관심사는 지역의 환경과 문화에 대한 탐방과 기록, 그리고 그 원인으로서 환경결정론의 논리를 택했다는 점, 천문을 이용한 측량학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는 측면(즉 지구가 구형임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이 특기할 만 하다. 중세에는 종교와 신학이 위세를 떨치며 보다 객관적인 방법으로 지역을 고찰하고자 했던 고대 지리학적 사유의 맥이 크게 훼손되었다.(무려 16세기까지 서구세계의 지도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세계지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시기 지리학은 아랍 세계에서 뚜렷하게 발달하였다. 아랍의 사람들은 국제 무역을 바탕으로 항해, 측량, 지도학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고([[알 이드리시]]), 이 과정에서 고대 서구권과 인도, 중국 등 동양에서 수집한 지리적, 철학적 지식이 큰 역할을 했다. 아랍인들은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세계 곳곳을 탐험하며 저술을 남겼다. 이븐 바투타, [[이븐 할둔]] 등의 저작이 대표적이다. 고대로의 회귀를 추구한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서야 서구 세계에서 지리학은 다시금 주목받을 수 있었다. 르네상스기에 태동한 상업 자본주의는 지중해 무역을 발달시켰고, 이는 후발주자들에게 지중해 세계 외부로 시선을 돌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새로운 세계의 발견(시장 및 노예 확보)을 위한 대양 항해의 유행은 중세 아랍 세계가 그랬듯 지도학과 항해술의 발전을 가져왔다([[메르카토르]]). 착취 무역 경쟁의 폭발적 발전을 통해 지리학 지식이 대규모로 확보되었다. 세계지도, 지구본과 같은 지리지식의 결과물들은 권력과 자본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대항해시대는 지리학의 전성기이며 동시에 제국주의 착취무역의 최전선에 있던 지리학의 부끄러운 역사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학문으로서의 지리학은 [[대항해시대]]에 본격적으로 태동했으며, 여기에는 바레니우스의(1622~1650) 『일반지리학』이 큰 역할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