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주한베트남대사관 (문단 편집) == 역사 == * 참조: [[한월관계]] 한국과 베트남이 직접 교류한 것은 [[고려]] 시대나 [[조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상당히 먼 거리와 중국 및 왜구의 방해 등으로 인해 두 나라는 교류를 지속하기 힘들었고 1800년대 이후 두 나라가 각각 [[프랑스]]와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면서 2차 대전 이전에는 한동안 직접적인 국가 간 교류가 없었다. 두 나라가 직접 교류를 하게 된 것은 2차 대전 이후 서로 독립을 하게 된 이후부터였다.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같은 분단국가였던 [[남베트남]]([[베트남 공화국]])을 우선 수교국으로 지정한 후 1956년 국교를 수립했다. 반공을 내세운 당시 대한민국은 당연히 [[북베트남]]([[베트남 민주 공화국]])과는 적대적일 수 밖에 없었으며 그 때문에 북베트남은 북한과만 교류를 했고 남한(대한민국)과는 한동안 수교를 하지 않았다. 남베트남과 대한민국은 각각 수도인 [[사이공]]과 [[서울]]에 대사관을 설치했다. 이후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면서 대한민국은 남베트남에 대규모의 병력을 파견하였다. 1973년 파리 평화협정으로 인해 [[베트남 전쟁]]에서 남베트남을 돕던 [[한국군]]은 철수하였으며 그 이후로도 국교를 유지해오다가 1975년 베트남이 완전히 공산 통일되면서 국교가 자연스럽게 단절되었다. 북베트남과 같은 공산진영 국가로서 원래부터 교류해오던 북한과는 당연히 공산통일 이후에도 교류를 지속하였다.[* 다만 1970년대 말에 [[중월전쟁]]에서 북한이 중국 편을 드는 바람에 한동안 관계가 소원해지기도 했다. 단교까지 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다가 베트남이 공산통일 이후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비효율성과 서방세계(특히 미국)의 경제제재 등으로 지속적인 경제난을 겪으면서 이를 타개하기 위해 개혁개방 정책(이른바 '[[도이모이]]' 정책)을 펼치게 되고 한국도 [[노태우]] 대통령이 '북방정책'을 통해 공산권과의 교류를 시도하면서 두 나라 사이에는 국교 재개에 대한 논의가 오고 갔다. 이러한 분위기를 타고 베트남은 다른 대부분의 공산권 국가들(북한, 쿠바 등 제외)과 함께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참가하였으며 마침내 한국과 베트남은 1992년 12월에 국교를 다시 수립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