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완구 (문단 편집) ===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다 === 1919년 2월, [[여운형]]이 상하이에서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해 독립운동의 총체적인 지휘를 맡을 최고 기관인 임시정부를 어느 곳에 둘 지를 논의했다. 이때 조완구는 "중앙기관은 국제도시인 상하이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얼마 후, 그는 [[이동녕]], [[조성환(1875)|조성환]], 김동삼, [[조소앙]] 등과 함께 상하이로 이동했고, [[3.1 운동]]이 국내에서 발발하자 신규식, 이동녕, 조성환, 조소앙 등과 함께 본격적으로 한민족의 대표기구 설립을 준비했다. 그 결과 1919년 4월 10일부터 11일까지 각지에서 온 대표자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29인의 대표가 선출되었는데, 조완구는 그 중 한 사람이었다. 뒤이어 임시의정원이 개원되어 후속 작업이 추진되었으며, 임시의정원 의장에 이동녕, 부의장에 [[손정도]], 서기에 [[이광수(소설가)|이광수]], 백남칠이 선출되었다. 이리하여 4월 11일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 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이 결정되었고 4월 13일에 이를 대내외에 공포했다. 당시 임시정부는 민주공화제를 체택했지만, 헌장 제8조에 "대한민국은 황실을 우대한다"는 문구를 삽입했다. 이는 조완구가 강력히 주장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그는 황실을 예우해야 한다고 주장해 많은 젊은 독립인사들로부터 왕조 시대의 구시대적 발상을 하는 인물이라는 지탄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입장은 확고했다. >이왕가는 500년 동안이나 조선을 통치해 왔기 때문에 뿌리가 깊을 뿐더러 나라를 팔아먹은 것은 [[이완용]] 등 5적과 7적의 소행이다. 고종은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하는 등 그가 할 수 있는데까지는 한국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더구나 고종이 서거했을 때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백성들이 덕수궁 앞에 주저앉아 밤낮없이 통곡했던 일로 미루어 보아 다수 국민이 이왕가에 대한 충성심과 추모정신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도 황실을 우대할 필요가 있다. 또한 조완구는 5월 12일 임시의정원 회의에 출석해 국무원 위원 자격으로 정부의 시정방침을 밝혔다. >외교는 대개 3방면으로 견(見)할지니 과거, 현재, 미래라. 과거에 대하여는 파리에서 8호 전보까지 내(來)하였는데 내용은 현정부 계속 진행에 관한 것이오, 현재는 금전 3만 불을 요구함이요, 장래 방침에는 3월 1일부터 진행하나 역사를 편찬할 것과 임시정부 선언서를 5처로 발송할 것과 정치고문 1인, 신문고문 1인을 치(置)할 것이오. 재무부 현상에 대하여는 잔액이 없고 재원 방침에는 2개조로 결의되었으니 1은 매인 50전의 세금을 징수할 것이오, 2는 수의로 애국금을 모금할 것이며, 교통부에는 완전한 기관을 4부로 치할 것이오. 군무부에는 계획이 별무하니 통언(通言)하면 내지동포에게 통유(通諭)를 발(發)하야 각오케 할 것이라 하니라. 조완구의 시정방침은 임시정부가 추진해나갈 외교, 재정, 교통 등의 활동방향을 천명한 것으로, 이는 장래 임시정부가 나아갈 진로를 제시한 것이었다. 여기서 '파리에서의 8호 전보'란 [[김규식]]이 1919년 2월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필요한 자금 3만 달러를 송금해달라고 요청한 전보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당시 임시정부의 금고는 비어 있었지만 다행히 5월 하순에 내무총장 [[안창호]]가 재미교포로부터 거둔 2만 5천달러의 찬조금을 가지고 와서 상하이에 도착하면서 그 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또한 조완구는 국내와의 통신을 위해 교통국을 설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국무원 위원으로도 활동했으며, 내무차장, 노동국총판, 재무총장, 내무부장 등 요직을 역임했다. 또한 그는 대종교를 토대로 [[김구]], [[여운형]], [[김철(독립운동가)|김철]], 이유필 등과 함께 교민단을 조직해 상하이 거류민들의 자치와 권익 옹호를 위해 노력했으며, 미주 지역 동포와의 연계, 중국 측과의 협력, 그리고 무력 항쟁 모색 등 여러 방면에서 활동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