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영관 (문단 편집) == 변질과 사멸 == 초기에 호민관의 보조원으로서 자질구레한 일이나 하는 하찮은 관직으로 취급되었던 조영관은 어느 시점에 이르러 '명예로운 경력'([[쿠르수스 호노룸]])의 하나로 간주되었다. 조영관은 로마 시를 직접적으로 관리하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자연스럽게 인망을 얻을 수 있었다. 특히 축제와 오락을 갈망하는 평민들이 만족할 만한 대규모 행사와 경기를 거행한다면, 사람들의 지지를 끌어내 더 높은 관직에 오를 가능성이 지극히 높아졌다. 이 때문에, 조영관은 최고 행정관인 집정관이 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직으로 취급되었고, 조영관 선거는 집정관 선거만큼이나 치열했다. 그러다보니, 본래 로마 시민의 복지를 책임지던 조영관은 야심을 품은 정치인들이 시민들의 '표심'을 얻기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 조영관들은 검투사 및 서커스 경기를 가능한 한 크게 거행하고 곡물을 국법에 정해진 것보다 훨씬 싸게 구매해서 빈민들에게 나눠주는 등 선심성 정책을 남발했다. 그 과정에서 막대한 재원이 소모되었기에, 조영관 임기를 수행한 정치인들은 거의 예외없이 막대한 빚더미에 짓눌렸다. 이것을 발판 삼아 법무관, 집정관에 선임될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경쟁에서 밀려나 경력을 이어가지 못하게 될 경우엔 파멸적인 미래가 기다렸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65년 조영관에 선임된 뒤 [[유피테르]]를 기린다는 명목으로 역대 최대 규모의 축하 행사를 조직했다. 그는 [[포로 로마노]]와 유피테르 신전이 있는 카피톨리누스 언덕을 수려한 꽃과 보석으로 장식하고 공개 연회, 서커스, 정교한 연극 무대, 화려한 검투사 대회를 열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그가 주관한 검투사 대회에 출전한 검투사는 320명에 달했다고 한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카이사르가 너무 많은 검투사들을 모으자 그의 정적들은 로마에 머물 수 있는 검투사의 수를 제한하는 법안을 급히 통과시켰다고 한다. 이렇듯 거대한 행사를 개최하느라 막대한 빚을 짊어져야 했지만, 카이사르는 조영관 경력을 통해 최고 권력자가 될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반면,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는 조영관을 거쳐 집정관에 도전했지만 3번 연속 낙선해 막대한 빚에 짓눌리자 당국을 뒤엎고 권력을 쟁탈하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파멸했다. 그 후 [[카이사르의 내전]]을 통해 최고 권력자가 된 카이사르는 '케레알리스(cereales)'라고 불리는 2명의 평민 조영관을 추가해, 축제와 경기 주관에만 치우쳐버린 기존 조영관들을 대신해 곡물 공급만을 담당하게 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의 절대 권력자가 된 후, 조영관은 쇠퇴의 길을 걸어갔다. 그들이 본래 맡았던 경기 관리와 미풍양속을 위한 퇴폐 풍조 단속은 법무관에게 이전되었고, 도시의 미관과 물 공급 책임은 [[프라이펙투스 우르비]](Praefectus urbi, 로마시 장관)의 역할이 되었다. 여기에 케레스 신전 관리 등 조영관들이 수행하던 다양한 종교적 의무에 대한 권한은 아우구스투스 본인에게 넘어갔다. 이렇듯 수많은 권한이 넘어가고 오직 목욕탕 관리, 매음굴 단속, 매춘부 등록 같은 자질구레한 것만 남자, 아무도 이 무력한 직책을 맡으려 하지 않았다. 이에 아우구스투스는 전임 호민관과 재무관을 무작위로 선택해 조영관을 강제로 맡겼다. 조영관은 이후에도 명맥을 유지했지만 모종의 시기에 사라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