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사회 (문단 편집) === 상업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조선 후기 장시망과 상인.png|width=100%]]}}}|| || {{{#000,#fff 조선 후기 장시망과 상인.}}} || [[조선]]은 전기에는 농촌을 중심으로 한 자급자족적 경제를 추구했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서 생산력의 증대로 내수 무역이 확대되어 화폐를 도입하고 세계무역의 활성화에 힘입어 중국 및 일본과의 교역이 활발해졌다. 조선 전기의 상업은 고려 시대 수도인 [[개성]]에 존재했던 어용상인 제도를 그대로 본따 새로운 수도인 한양에 시전을 설치했던 것으로 주로 정리 요약할 수 있다. 현대의 종로거리 양쪽이 바로 시전이 설치되었던 자리다. 이런 시전은 관공서와 서울 주민들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물품을 공급하는 상인들을 불러모은 것이었다. 시전 건물을 설치하여 그곳에 입주한 상인은 조정에 상세를 내야했다. 조선 전기의 상업은 실제로 그 발전이 매우 미비하며 그에 따라 기록이 극히 적기 때문에 연구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동시대 세계사적으로 상업이 크게 발전하여 [[대항해시대]]로 표현되는 국제무역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에 비하면 조선의 상업은 발전하지 못한 편이었다고 일반적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관점을 재검토하는 측에서도 조선의 상업이 이전 한반도 왕조들보다는 발전했다고 평할지언정 동시대 유럽은 물론 동아시아 타국, 즉 중국 일본보다도 상업의 발전 양상이 뒤떨어진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조선 전기의 상업이 발전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는 매우 다양한 요인이 제시된다. 가장 흔히 꼽히는 이유는 조선 정부가 상업을 실제로 의도적으로 천시하고 탄압했기 때문이다. 조선 전기에는 상인의 집안은 과거를 응시하여 관료가 되는 것을 금했다. 정부가 직접 통제하는 서울 시전 상인 외의 지방 상인 역시 정부의 탄압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육로로 돌아다니는 상인의 경우 매년 저화 8장을, 배를 가진 상인의 경우 큰 배는 저화 100장, 중간배는 50장, 작은배는 30장의 세금을 납부하게 했는데 저화 1장이 쌀 2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고세율인 것이며, 제일 자본과 규모가 컸던 시전상인들의 세금은 고작 매년 저화 4장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심각하게 불공정했던 셈이다. 또 조선의 장터하면 으레 생각나는 정기시, 자유시장인 장시는 조선에서 불법이었으며, 조선 초기인 15세기에 이미 자연적으로 형성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5세기 말까지 계속해서 단속, 처벌되었다. 이런 이유로 잉여생산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초기의 상업 발전은 부진했다. 조선 전기의 장시는 잉여생산들의 거래보다는 농사를 망치거나 토지가 적어 생계를 잇기 어려운 소농들이 생계를 잇기 위해 차린 것이었다. 조선의 상업 발전 미진의 원인으로 또 꼽히는 것은 당시 동아시아 국제 정세도 지적된다. [[원나라]]의 붕괴와 그로인한 동아시아 무역 [[시스템]]이 [[붕괴]], [[명나라]]의 해금령과 일본의 [[센고쿠 시대|전국시대]] 같은 외부적 요인들로 인해 조선의 상업이 축소되었다는 것이다. [[실크로드]] 상업을 장악하여 굴러가던 원나라의 붕괴에 따라세워진 [[명나라]]와 [[조선]]의 [[유교]] [[사대부]]들은 원의 붕괴에서 상업의 위험성을 느꼈고, 그들은 상업 대신 중농 위주, 자급자족적 정책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관점으로는 [[귀금속]]의 절대적인 부족이 심각했던 조선은 금속화폐를 유통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도 지적된다. 하지만 동아시아 국제 정세는 국제 무역의 축소는 설명할 수 있으나 조선의 내부 상업 발전의 미진을 설명하는데에는 부족하다. 일본의 경우 국제무역의 역량이 거의 없었던 11세기 [[가마쿠라 막부]] 시대에 이미 내수 상업이 발전하여 상인조합인 좌(座)가 형성되고 정기시가 있는 도시들이 만들어졌다. 토지 매매 문서 등 대규모 거래 역시 중국산 동전으로 행해졌으며 농민의 세납도 동전으로 했다. 가마쿠라 시대의 일본의 총 국력이 조선 전기보다 딱히 낫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조선의 생산력이 부족해서 조선 전기의 내수 상업이 미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 귀금속의 경우, 귀금속이 상업의 선제조건이 아니라 상업이 발전했을 때 화폐로 사용할 귀금속의 수요가 늘어나는 현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잘못된 지적이다. 일본의 경우 상업이 11세기부터 급격히 발전하기 시작해서 화폐경제가 활성되었으나 정작 광업 기술은 극히 미비하여 동전을 전부 중국에서 주조된 것에 의존했다. 그 와중에 명나라가 해금령을 때려버리자 심각한 동전 부족에 시달리다가 일종의 위조화폐인 사주전이 유통되는 현상이 나타났으며, 수백년이나 그런 문제에 시달리자 그냥 중국을 약탈해서 해결하거나, 동전이 아니라 쌀을 화폐 본위로 삼는 대응도 했다. 에도 시대의 [[고쿠다카]]가 그 흔적이다. 결국 일본은 [[회취법]]의 전파와 광산의 개발이 활성되어서야 화폐의 부족이 해결되었다. 즉, 자기네 동네에 광산이 있는지도 몰라도 상업이 일단 활성화되면 화폐경제가 생겨날 수 있다. 때문에 현재 경제사학에서는, 조용조 혹은 공납으로 불리는 현물위주수취 경제와 양반 계층 내의 광범위한 선물경제를 조선 상업 미진의 원인으로 꼽는다. 공납의 고난은 나무위키에도 [[조선시대 제주도의 진상품 고난]]이라는 별도 항목이 만들어져 있을 정도로 민중들에게 광범위한 민폐를 주었으나, 그것 말고도 조선 사회에 심대한 문제를 끼쳤다. 일단 '''공납의 세율 자체가 제대로 규정된 것이 아예 없었다.''' 공납의 양이나 종류 자체가 각 고을에 공정하게 책정되지가 않아서 작은 고을이 큰 고을보다 더 많이 내야하는 일이나, 고을에서 나지도 않는 물품이 책정되는 일은 너무나 흔해서 상소에 툭하면 나오는 일이었다. 또 공물을 수취하기 위해 백성들을 동원했기 때문에 동원되기 싫었던 백성들은 일부러 자기 동네의 특산물의 생산을 줄이거나 숨겼다. 게다가 전세 등은 자연재해 등으로 손실이 나면 감면해주었으나 공물은 감면되는 일이 거의 없었으며, 한 동네가 재해를 입어 정말로 공납을 못하면 근처 고을에 부과했고, 중국에서 사신이 왔을 때 공물이 사용되었다 해도 감면해주지 않았다. 조선 시대가 흔히 세금이 낮다고 하지만 그건 전세만의 일이고 공물이라는 현물 조세 형태를 통해서 과도한 세금을 매기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가장 거대한 수요를 만드는 정부가 자신들의 물품 수요를 공납으로 해결해버리니 시장의 가장 큰 지분이 박살나버린 것이다. 국가 다음으로 큰 수요를 만들 수 있었을 지방의 호족 유력자들 역시, 재지 사림이라는 형태로 국가 제도에 편입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 역시 시장을 형성하는게 아니라 반대급부 없이 수취해가는 입장이었다. 조선 정부는 사대부들에게 사여의 형식으로 각 지방의 공물들을 뿌렸으며, 지방관들 역시 정부에서 규정한 공물 이상으로 수취한 다음 자신의 친지나 중앙 정부의 연줄들에게 선물하는 사선(私膳)을 하곤 했다.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쓴 글을 보아도 다른 지역에서 나는 특산물을 구하는데에 상인이 아니라 지방관 연줄을 만들어두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다. 사실 고려 역시 국가 주도의 공무역은 존재했으나 민간 경제는 매우 미진했는데, 이 때문에 한반도사 최초의 동전을 주조했음에도 불구하고 활성화에 실패했으며, 고려 역시 이런 조용조 등 공납 수취 제도가 광범위하게 존재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공납의 폐해를 단순히 관의 가렴주구, 탐관오리의 부패로 설명을 마칠 수는 없다. 현물수취제도를 경제학적으로 보면, 공급 자체가 몰수되는 상황에서 수요 역시 사라지니 가격이 낮아지고, 물품을 생산하는 사람은 물품을 팔아서 이득을 보거나 생계를 유지할 수 없고 오히려 극심한 손해를 보게되니 당연히 기피하게 되며, 공급자가 줄어든 산업은 결국 붕괴한다. 조선 전기의 기록을 보면 이렇게 무리한 공납의 끝에 사람들이 도망가 마을이 붕괴되거나 마을 사람들이 손을 자르는 등 자해를 해서 공납을 안 바치려하는 등 공납의 폐단이 심하니 시정해야한다는 상소의 반복이 가득하다. 종이, 먹 등 문방사우에서부터 과일과 곡물 같은 농산물, 바다에서 나는 온갖 해산물, 양과 염소 등 목축업까지 상상을 초월하는 다양한 분야에서 이런 폐단이 나타났다. 실제로 조선의 상업은 공납제를 대체하여 미곡, 포, 동전으로 납부하게 한 [[대동법]]의 도입 이후 극적으로 성장한다. 다소 늦고 별공은 그대로 있는 등 여러 한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사상 최초로 유의미하게 상업에 대해 논할 정도의 발전이 나타난다. 조선시대에 한국 역사상 최초로 조직적인 상인 조합(유상, 만상, 송상 등), [[어음]], [[계]]로 대표되는 원시적인 선물, 금융 거래가 태동했으며, 놋그릇[* 한국은 전통적으로 ‘그릇’의 용도로 도자기가 아닌 놋그릇을 썼다. 화려한 도자기가 적은 것도 역시 이 때문. 정교한 도자기 수요가 전멸해 버리니 도자기 기술이 화려해지길 기대하기 어렵다.], [[자개]], 칠기 등의 생활용품이 시장에 유통되었다. 교역 역시 초기에만 외부적 요인들로 인하여 크게 타격을 받았을 뿐 후기로 갈수록 이전 [[고려시대]] 때 보다 큰 폭으로 늘어나 ‘민간에 의한 무역’이 이전 시기보다 유의미하게 활발해졌다. [[인삼]]을 가공한 상품인 [[홍삼]]의 예처럼 후기에 이르러서는 민간 주도의 무역 상품이 개발되었고 [[상평통보]] 같은 [[화폐]]가 처음으로 전국적으로 또 대중적으로 꾸준히 쓰이던 시기 역시 유학이 확고히 자리 잡은 조선시대 때부터였다. 이전 시기였던 [[고려]]는 물물 교환, 현물 화폐의 단계에만 머물러 있었고, 소수의 귀족들만이 주도하는 제한적인 무역만이 이뤄졌다. 또한 조선의 위정자들 역시 상업을 천시하는 이념은 깔려 있었으나 현실을 무시해가면서 상업을 억제했을 정도로 아둔하지는 않았다. 상인들은 물자 유통을 원할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인식은 분명히 있었다. 조선 후기에 자유로운 상인인 사상(私商)이 늘어나자 [[한양]] 도성 내에 [[금난전권]]이 주어졌다가 정경 유착 문제로 다시 폐지되기도 했고, [[대동법]]을 포함해서 조세 운송 등에 민간 자본에 위탁하는 등 조선 후기에는 조정 차원에서도 상인과 유기적인 협력 관계를 가졌다. 물론 조선 역시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빈말로도 조선의 상업이 크게 발전했다고 하기는 어려우며, 여러 왕이 밀어붙인 [[화폐]] 정책도 번번이 실패했다. 또한 임진왜란 때 주둔한 명군이 은으로 식량을 구하려 했으나 그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조선의 상업과 화폐 경제는 미약했다. 하지만 임란 이후 [[상평통보]]가 법정 화폐로 자리잡았고, 17-18세기에는 세계 무역 트렌드에 힘입어 은도 다소 유입되어 은도 화폐로 사용되었다. [[하멜 표류기]]에도 조선에서 은화를 자주 사용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한 [[효종(조선)|효종]] 때는 세의 납부도 은으로 일부나마 대체하고 [[상평통보]] 도입 후 조세의 금납화가 진행된다. 하지만 고려처럼 조선 또한 제대로 된 화폐 경제가 완벽히 정착하기엔 문제점이 많았다. 조선 후기에도 [[삼베]]나 [[쌀]] 등의 현물 거래의 비율이 유럽뿐 아니라 중국, 일본과 비교해서도 매우 높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화폐 부족 현상인 전황(錢荒)은 1700년대 이후로 만성적인 현상이었으며, 조정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로서 논의되었다. 오죽 심각했는지 청나라로부터 동전을 수입하자는 대책까지 논의되었고 청나라에 요청까지 했는데, 현대 입장으로 보면 화폐 발행 주권을 가져다 바칠 수 있는 위험천만한 짓이었고 그러한 우려도 당대에 나왔으나 다행히도(?) 청나라 측에서 거부해서 무산되었다. 결국 조선은 멸망 직전까지 삼국이나 남북국, 고려 같은 한반도의 다른 왕조들처럼 현물 경제에서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했다. 물론 이에 대해서 더 보충 설명 하자면 조선 정확히 [[한반도]]는 [[은]]이 거의 산출되지 않는 지역이다. [[은화]]같은 금속 화폐의 필수 요소인 [[귀금속]](대표적으로 은)이 거의 산출되지 않으니 조선이 자체적으로 은화를 충분히 유통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일단 그 막대한 인구(논란이 많으나, 16세기 후반 당시 대략 6000만 ~ 1억 인근), 안정적인 가구의 형성, 생산력이 이미 충분히 높았던 농업 경제 등 탄탄한 내수를 기반으로 전 세계에서 막대한 은화를 빨아들이던 국제 은화 시장의 최종 종착지이자 [[블랙홀]]이었던 [[중국]][* 중국 내부에서도 15세기 후반부터 은 교역이 활성화되는 등 이미 은이 경제의 내부에 포괄되어 있었던 것이 중국의 강점이었다. 이후 중국은 [[도자기]], [[차]] 등을 유럽에 수출하면서 필리핀, 마카오를 통해 막대한 아메리카산 은을 흡수하고, 생사(生絲), 모자 등의 초기 공업품을 조선과 일본에 수출하면서 일본의 은 또한 무섭게 빨아들였다. 말 그대로 당시 최대의 은 대국이 중국이었고, 이는 [[청나라]]의 막대한 국력의 큰 버팀목이 되었다. ]이나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던 금, 은, 구리 등의 대대적인 귀금속 채광으로 전근대 화폐 경제에까지 큰 영향력을 미칠 정도로 귀금속 매장량이 상당했던 일본[* [[연은분리법]]이 동아시아 경제를 뒤흔들게 된 것은 좀 더 뒤인 1533년 [[이와미 은광]]에 이 기술이 유입되면서부터이다. 이에 대해서 조선에서 건너가 연은분리법을 전해줬다는 승려 경수, 종단이 중국인이었느냐 한국인이었느냐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으나, [[1539년]]의 기록과 [[1541년]]의 또 다른 기록을 보면 조선이 연은분리법의 주요 유출 경로였음은 부정하기 힘들 듯하다. 어찌 되었건 이후 일본은 활발한 은 광산 개발과 맞물려 폭발적으로 은을 생산해 내기 시작하고, 16 ~ 17세기 세계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과 비교했을 시 막대한 내수도 풍부한 귀금속 매장량도 전혀 없었던 조선이 금속 화폐를 안정적으로 풍족하게 유통시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상기한 전황 현상에 대해서도 당대에 이미 [[구리]]만이 아니라 은화의 부족으로 인해 더 심화되고 있다고 조정에서 논의되고 있었다. 결론을 요약하면, 조선 시대는 전반적으로 상업이 발전하지 못한 시대였지만 이전에 알려진 통설처럼 발전이 전무한 시대도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