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비/생애 (문단 편집) === 정치에 기울인 노력 === 선양을 통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조비는 재위 기간 내내 제도의 확립과 민심의 안정 그리고 유학의 부흥에 힘쓰는 등 난세를 끝내고 태평성대를 이끄는 통일 군주로서의 면모를 보이고자 했다. 제도적인 면에선 행정 구역을 재확립하고 인사 제도를 정비해 [[구품관인법]]을 실행한다. 한편으론 관료간의 상사 탄핵에 제약을 가했는데, 이는 고위 관료와의 타협이라고도 볼 수 있으나 어떤 측면에서 관료기구 내의 질서를 확립한 거라고도 할 수 있다. 조비는 주로 조조가 했던 정책을 유지했는데 이는 공도 될 수 있고 조조의 강압적인 정책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과도 될 수 있다. 그는 구휼책이나 사면령을 종종 내려 민심의 이반을 제지하고자 했다. 심지어 연•예주 일부 지역 한정으로 세금 면제책도 시행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사병의 유해를 되찾아 제사를 지내게 한다든가, 사사로운 복수를 금지시키고 무고를 엄하게 다스리며 서역의 도시 국가들의 왕이 각각 사자를 파견하여 헌상품을 바치니, 무기교위를 설치하고 서역과의 무역을 재개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유가 부흥책도 역시 사회의 안정과 전통적인 향촌 질서를 부활시키고자 한 정책으로 보인다. 유학의 부흥을 위하여 즉위 직후(221년 2월) 노군에 공자의 묘당을 다시 세우고 주변 일백호에 그를 관리하게 하는 한편 제사 규칙을 정하고, 더 나아가 장례 제도를 개선시킨다. 그리고 저술 사업을 시행해 모든 유학자들에게 경전을 편찬하도록 하여 유학 경전을 편찬, 천여편에 달하는 '황람'을 출간한다. 뭔가 괴리감이 들겠지만 치세 내내 유가적 덕목의 권장에 힘써 왔다. 한나라 말엽의 당시 비관적, 회의주의적 경향의 사고가 지식인계 전반에 만연했다는 점에서 조비의 유가진흥에 기울인 노력은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정통성 측면에서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유가 부흥책으로 도덕성의 향상을 기치로 삼았음에도 스스로는 이와 반하는 패륜적 행위를 거듭 자행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지도 계급의 도덕성 향상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조비의 밑에서는 법률의 가혹함으로 말이 많았다고 한다. 하염없이 백성을 이주시켜 민초 사이에서는 불평불만이 있었다. 먹고 살게는 해주지만 그렇다고 마음과 몸이 편하게는 못 해주기 때문에 조비 역시 민담 등에서 이미 악역이 된 듯하다. 국경 지대에 있는 농민들 강제 이주는 예사였으며, 민둔제의 경우는 징발된 농민으로 하여금 황무지를 개간시키는 것 역시 계속되었다. 농민들을 강제 이주시키는 것은 예사였으며 척박한 자신의 고향을 백성들을 이주시켜 강제로 개간하려 하자 노육은 이를 반대했다. 그러자 조비는 그 의견에는 따랐지만 노육을 원망하여 좌천시킨다. 한편 전쟁은 해야겠는데 체계적으로 병력을 끌어모으기는 불가능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조조는 자신이 깨뜨리거나 포섭한 호족, 군벌들이 거느린 사병과 사민, 토벌한 도적떼, 유랑민들을 끌어모아 병력으로 활용했다. 이걸 병호제라고 하는데 병호제는 그렇게 편성한 병사들과 그 가족들을 일정한 지역으로 끌어모은 다음 어느 정도 생활수단을 마련해서 먹고 살게 해주는 대신, 병호의 남성에게는 병역의무를 부과해 병력으로 활용한 제도다. 아버지가 사망하면 자식이 계승하고 형이 죽으면 동생이 이어받아서 병역에 종사하는 세습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일반 백성들과 호적을 달리하여 군부에서 이들을 관장 했다. 이 제도가 제대로 시행되기 위해선 병사들에게 가정을 만들어 줄 필요가 있었기에 과부는 물론이요 [[네토라레|백성의 딸이나 심지어 유부녀(!)까지 빼앗아 병사들의 아내로 던져주는 것]]은 덤. 원래 조조 때부터 있었던 제도이지만 조비 대에는 일반 여성을 강제로 다른 남자에게 결혼시키는 지방 관리들이 많아 백성들의 울음이 그치지 않았는데 [[두기]]만이 이를 따르지 않았다. 후에 [[조엄]]의 일로 이 사실을 안 조비조차 좌우의 신하들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안색이 창백해졌다고 한다. 또 이런 일이 있었다. 병호제는 기본적으로 먹고 사는건 보장해 줘야 하는데 조비는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기주 병사들의 병호를 10만호 떼어다가 하남을 튼튼히 한다며 이주시킬 계획을 세운다. 당시 해충 피해로 흉년이 계속되어 백성들이 기아에 고통받고 있있던터라 신하들은 전부 옮길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조비의 고집은 꺽일줄 몰랐고, 신비가 나서서 조정 대신들과 조비를 만났지만 조비가 화를 내자 신하들은 아무도 말을 못했다. 신비가 나서서 "지금 병사들을 옮기면 민심을 잃게 될 것이고 또 그들에게 줄 식량도(거듭된 흉년으로) 없다고 반대했지만 조비는 끝내 5만호를 강제이주 시켰다. 신비가 그들에게 줄 식량이 없다고 했으므로 물론 가는 길에 식량 대주며 편하게 보내주진 않았을것이다. 이처럼 민심을 잃었기 때문에 위가 망한 이후 육조 시대 때 이미 각종 야사나 민담에는 조비를 비판하는 내용이 범람하게 된다. 후일 오나라의 마지막 승상 [[장제(손오)|장제]]는 '조조가 공이 중국을 뒤덮고, 위엄이 사해를 뒤흔드나, 속임수를 숭상하고 계략에 의지하며, 정벌이 그치지 않아, 백성들은 그의 위엄을 두려워하나, 그의 덕은 품지 않았고 조비, [[조예]] 부자가 참혹하고 지독한 짓을 계속하여, 안으로는 궁실을 일으켰고, 해마다 안정을 얻지 못했으니, 인심을 잃었다. 반면 사마씨는 백성들에게 은혜를 배풀어 민심이 그들에게 돌아가 수춘 3반과 조모의 죽음으로도 사방에선 움직임이 없으며, 위세와 무력이 성하여, 근원은 견고해졌고, 민심이 복종하여, 간사한 꾀가 세워졌다' 평가했다. 전반적으로 법이나 생활상이 각박했던 조위시대와 그래도 뭔가 조위보단 온건책, 민생안정책을 써보려다가 결과적으로 후한말부터 내려온 [[문벌귀족]] 등 내부 모순의 극대화와 이민족의 발호로 망하긴 했지만 어쨌든 [[의도는 좋았다|처음 시작할때 의도는 좋았던]] 사마씨 서진시대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