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사 (문단 편집) == 기타 이야깃거리 == * 현대 한국은 교육열이 강해지면서 자녀가 [[외국어고등학교]]나 [[과학고등학교]] 등 [[특수목적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하는 중3이라거나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고3]]이라면 그 해 제사를 포기하기도 한다. [[고시]]생이나 [[공무원]] 준비생들 역시 시험에 합격할 때까지 제사 참석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위원과 관리요원, 검토위원처럼 업무를 위해 외부와 격리되는 경우, 당연히 참여하지 못한다. 수능뿐 아니라 [[공무원 시험]]이나 각종 자격면허 시험에서도 출제위원, 관리요원, 검토위원들은 제사가 걸려도 못 간다.[* 심지어 시험지를 인쇄하는 인쇄공까지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직계가족의 장례 때만 짧은 외출이 허용될 뿐, 이 때도 보안요원이 동행한다. 탁구선수 유승민은 제삿날에도 경기가 있어서 참석하지 못했다고 한다. [[올림픽]] 선수들은 올림픽 기간에 제사가 껴 있으면 메달을 노리기 위해 대부분 불참한다. * [[KBO 리그]]에서도 제사와 관련된 사건이 있었다. [[SK 와이번스]] (현 [[SSG 랜더스]])의 2군 코치가 [[이만수]] 당시 2군 감독에게 부친의 제사에 참석하는 것을 허락받으려 했는데 이만수가 1군 감독 김성근의 허락도 없이 OK를 했고, 이를 알아차린 [[김성근]] 당시 1군 감독은 제사 참석도 장수가 전쟁 중에 전쟁터를 비우는 행위로 간주해 “어딜 감히 장수가 [[KBO 리그|전쟁]] 중에 [[야구장|전쟁터]]를 비우냐”면서 화를 냈다고 한다. * 현대에 와서는 차례나 기제사를 지내게 되면 전국, 적어도 두 광역시권에 흩어진 친척이 모이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 보니 [[구제역]]이나 [[MERS]]나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같은 전염병이 생기면 제주 일가만 간소하게 지내기도 한다. 집안에 [[임산부]]와 환자가 있는 경우도, 집에 따라 아이가 아직 돌이 되지 않은 경우도 마찬가지로 참석하지 않거나 부르지 않는다. 제사가 학기 중의 평일이나 시험기간에 걸려 있으면 대부분 불참한다. * [[실향민/대한민국|실향민]]들은 대부분 [[임진각]] 망배단[* 주로 [[황해도]]와 [[평안도]] 계통 실향민들이 여기로 간다. [[함경도]]와 미수복 [[강원도]] 계통 실향민들은 통일전망대로 많이 간다.] 등 북녘이 보이는 곳으로 가서 제사를 지낸다. [[댐]] 건설로 고향이 수몰되거나[* [[임하룡]] 등. 임하룡의 고향은 [[충청북도]] [[단양군]] 단성면 북하리인데 그의 고향은 [[충주댐]] 건설 관계로 수몰되었다.] 이런저런 시설을 짓는 과정에서 고향이 철거된 지역 출신[* [[정태춘]] 등. 정태춘은 고향이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도두리인데 그의 고향은 [[주한미군]] 기지 건설 관계로 철거되었다. 그 밖에 [[리조트]], [[대학교]], [[군부대]], 산업단지, 관공서, [[교도소]], 고속철도 및 여타 교통 관련 시설([[공항]], [[고속도로/대한민국|고속도로]] 등) 등을 짓는 과정에서 고향이 철거돼 버린 경우도 실향민이라 할 수 있다.], 문화재 복원으로 인해 고향이 철거된 지역[* 서울에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등 일부 문화재 복원으로 인한 실향민이 있고 경주에는 문화재 실향민이 더 많을 것이다.] 출신 등 극소수의 경우를 제외한 대부분의 실향민들은 고향을 [[북한]] 지역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 제사상의 동서남북은 실제 방위와 다를 수 있다. 같으면 좋겠지만 건물 구조상 불가능한 경우, 제사상의 방/신위가 있는 곳을 북쪽, 지내는 사람이 있는 곳을 남쪽, 동쪽은 지내는 사람의 오른쪽, 서쪽은 지내는 사람의 왼쪽으로 설정한다. 전통가옥이면 대청마루가 남향이니까 맞지면 현대는 그냥 신위가 북쪽이다. * [[놀부]]는 제물 대신에 종이에 음식 이름을 써서 올렸다. 조선 후기 주자가례가 널리 보급되면서 사당을 지을 능력이 되지 않는 집에서는 사당을 그린 그림을 대신 걸고 제사를 지내긴 했지만, 놀부는 재력도 있으면서 [[구두쇠]]라 아끼려고. 그 다음 해에는 제기 위에 그냥 동전을 올리고, 그 다음 해에는 무려 '''신위를 들고 시장바닥을 돌아다니며 음식 앞에다가 신주를 들이 밀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도 등장인물마다 다르게 묘사된다. 어떤 이야기에서는 가난한 선비가 제사는 지내야 하는데 돈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조상님의 신주를 들고 시장을 돌아다녔는데, 그날 밤 꿈에 조상님이 나타나 배불리 먹어 만족스럽다며 은덕을 베풀었다는 이야기다. * 제사 날짜는 대부분 [[음력]]으로 계산하는 경우가 많지만, 일부에서는 [[태양력|양력]]으로 계산하기도 한다. [[성균관]] [[문묘]]에서 행하는 석전대제와 [[종묘]] 제례는 양력으로 계산해서 치르고 있다. 석전대제는 9월 28일([[공자]]의 탄신일)과 5월 11일(공자의 기일), 종묘제례는 매년 5월의 첫째 주 일요일에 행한다. 양력을 중심으로 한 생활 습관에 익숙한 세대가 늘면서 음력으로 치르는 집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 [[2월 29일]]이 제삿날이면 4년에 한 번[* 100으로 나누어 떨어지는 해를 끼고 있는 경우에는 8년까지도 벌어진다. 이는 4로 나누어 떨어지는 경우에는 윤년으로 하되 100으로 나누어 떨어지면 평년, 400으로 나누어 떨어지면 윤년으로 한다는 규칙 때문이다. 이 때문에 xx96년 2월 29일에 제사를 지내고 나면 4년이 지난 xy00년이 400으로 나누어 떨어지는 해가 아닌 이상 xy04년까지 제사를 제 날짜에 못 지낸다!]씩 제사를 지내게 된다. 이렇게 되면 평년에는 [[2월 28일]]이나 [[3월 1일]]로 땜빵하거나 음력으로 환산한 날짜에 제사를 지내야 한다. 음력으로 [[윤달]]이 제삿날이면 날짜를 영원히 못 찾을 수 있으므로[* 특히 10, 11, 12, 1월에 윤달이 끼면(...)] 무조건 양력으로 지내야 한다. * [[한복]]을 입고 제사를 지낼 때 [[여자]]는 두루마기를 벗고, [[남자]]는 [[두루마기]]를 입어야 한다. 여자는 치마저고리 차림으로 제사를 지내도 되지만 남자의 경우 바지저고리 차림(생활한복은 제외)이나 [[마고자]] 차림으로 제사를 지내서는 안 된다는 뜻. 현대 시중에서 파는 아동한복의 90% 이상이 두루마기가 없기 때문에 아이들의 경우에는 그냥 저고리나 마고자 차림으로 제사를 지낼 수밖에 없다. [[양복]]을 입고 제사를 지내면 남자는 와이셔츠 단추를 끝까지 잠그고 [[넥타이]]를 맨 뒤 [[테일러드 재킷|블레이저]]를 입으며, 여자는 블라우스 단추를 끝까지 잠그고 블레이저를 입는 것이 원칙이다. 즉, [[와이셔츠]]나 [[블라우스]] 차림으로 제사를 지내서는 안 된다는 뜻. 다만 [[장례식장]]에서 철저히 지켜지는 것과는 달리 제사나 차례에서는 지키지 않는 집안도 많다. [[교복]]이 [[한복]]이 아닌 이상 교복을 입고 제사를 지낼 때도 양복과 동일하게 적용된다. FM(?)을 중시하는 집안이 아닌 한, 단정한 차림이면 모두 허용하는 집도 많다. *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국교]]이고 [[유교]]적인 제사문화가 완전히 정착하기 이전이라, [[절(불교)|절]]이나 [[무당]]에게 땅이나 노비 등의 재산을 제사비용으로 주고 제사를 대리하는 경우도 흔했다. 이런 풍조는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중기부터 유교적 제사문화가 강화되어 없어졌으나, 유교의 영향력이 약화된 현대에는 부활하여[* 지금은 당연히 [[노비]]나 [[부동산]]이 아니라 돈으로 낸다.] 점점 성행하고 있는 중. 때문에 불교 집안이라도 자주 다니는 절에 제사를 맡기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 집도 있다. 혹은 명절법회라 하여, 명절마다 절의 신도들이 한데 모여 합동 차례를 지내기도 한다. * [[고려]] 말기에는 [[유밀과]]가 크게 유행했는데, [[불교]] 국가인 고려의 특성상 살생을 터부시하다 보니 대충 동물 모양으로 [[유밀과]]를 올리던 게, 점점 [[과일]]대신 과일 모양 유밀과도 올리고, 모양도 점점 호화로워지니 보다못한 조정에서 [[유밀과]] 금지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럴 만도 한 게, 전통 한과는 제조하는 데 엄청난 비용과 노력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과]] 문서로. * [[천도교]]에서는 향아설위(向我設位)라 하여 위패가 아니라 제사를 지내는 사람을 기준으로 제물을 진설하고 제사를 지낸다. 다만 일반 가정에서는 그다지 엄격하게 지키지는 않는 듯. * [[홀수]]가 상당히 중요하다. 수를 셀 수 있는 제물들(ex-[[과일]], [[송편]], 포 등)은 절대 짝을 맞춰 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제물 준비를 할때 밤을 10개를 샀다 해서 10개를 다 놓느냐 하면 10개는 짝수기 때문에 1개는 남겨놓고 9개만 올리는 방법이다. 사실 이는 음양의 철학문제로, 땅에서 난 것은 음의 속성을 가졌으므로 홀수로 놓아 고인과 더불어 음양의 조화를 꾀했다고 봐야한다. 마찬가지로 하늘에서 난 것, 이를테면 새 종류는 원래 짝수를 놓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의미가 없어지고 '홀수로 놓아야 한다'는 규칙만 살아남은 것. * 현대에는 인간이 아닌 생물에게 제사를 지내는 경우도 있다. 이는 유교적인 의식보다는 추모 행사에 가까운 것. 개인이 생전에 아끼던 애완동물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나 혹은 [[의학]] 및 [[생물학]] 연구를 위한 실험 과정에서 희생된 생물들을 추모하기 위한 것 등이 있다. 또한 대구 치맥 페스티벌은 닭들을 위한 위령제를 개막행사 때 진지하게 지낸다. * [[북한]]에서도 봉건적인 잔재라고 해서 없애려고 노력을 했고, 많은 가족들이 제사를 지내지 않게 되었다. 그렇지만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고, 80년대 이후 당국의 허용으로 제사를 다시 지내는 가족이 늘어나긴 했다. 하지만 많은 북한 사람들은 여전히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조상에 대한 예라고 해봐야 무덤에 가서 [[꽃]]을 바치고 묵념하는 정도이다. 제사를 할 경우 남한에서는 제사 때 2번 절하지만 북한에서는 3번 절한다. 다른 점은 사형수에 대한 취급인데, 남한에서는 고인이 [[사형]]수라고 하더라도 유족이 원하면 제사를 지낼 수 있지만, 북한에서는 [[사형수]]는 반역자로 취급되어 '반역자는 제사를 지낼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제사를 못 지내게 하고 사형수의 제사를 지내려다가 걸리면 노동단련대로 끌려간다. 이는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 [[유현주(가수)|유현주]]가 증언했다고 한다. 유현주가 증언한 해당 사례는 그녀의 고향인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공개처형을 당한 사형수의 제사를 지내려다 발각된 가족이 두들겨 맞고 6개월짜리 노동단련대로 끌려간 사례였다. * 남의 집 제사를 방해하면 [[제사방해죄]]로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 제사방해에는 제사장소에서 떠들거나 [[고기가 없잖아|제사상을 뒤엎거나]] 제사를 진행할 수 없게 하는 행위등이 있다. 정말로 남의 집 제사에 감놔라, 배놔라 하면 제사방해로 졸지에 [[벌금]]형을 받을 수도 있으며[[http://www.ytn.co.kr/_ln/0103_201409070501561327|#]], 최악에는 3년 이하의 [[징역]]도 가능하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2&oid=056&aid=0010226871|#]] * [[무슬림]]은 샤하다[* "알라 이외에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그의 사도이다"라는 구절이다.] 때문에 제사를 지낼 수 없다. 개신교와 마찬가지로 제사상에 절하는 것을 [[이슬람교]] 교리에 어긋나는 우상숭배라며 죄악시하기 때문.[* 다만 '민속적 관습'이라는 시점에서는 지내도 된다는 일부의 의견이 존재하기도 한다.] [[개신교]]의 경우는 워낙 신학적 스펙트럼이 넓기 때문에 제사에 대한 의견이 갈린다. 교회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한국의 경우 대부분의 [[개신교]] 교단은 제사를 금지한다.[* 개신교 신자는 제사 대신 추도예배를 드린다. 안내문은 교회에서 나누어 준다고.] * [[사제(성직자)|사제]](司祭)라는 직명을 [[직역]]하면 "제사를 맡는 사람"이라는 의미인데, 사실 이 말은 [[기독교]] 신학적으로 보더라도 절대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동양식 제사'와는 목적도 형식도 모두 다르다. 자세한 것은 [[미사]], [[성찬예배]], [[감사성찬례]] 문서로. * [[설날]]이나 [[추석]] 때 합동 차례를 지내는 군 부대도 있다. 대상은 설날이나 추석 때 휴가를 안 나가는 부대원 전체(...). 부대 분위기에 따라서는 간부들(특히 지휘관, 참모, 주임원사)도 상당수가 명절 땐 휴가를 못가고 당직이 아님에도 부대에 출근해서 이 행사를 같이 치러야 한다. 특히, 차례상 차리는 거 감독해야 하므로 조리 부사관들은 태생적으로 명절 당일 반일 정도는 의무적으로 출근해야 한다. 축구대회 등 단결행사로 이어지는 경우도 흔하다(...). [[높으신 분들]]은 명절 연휴 중 병들 무료하게 놔두면 고향 생각에 우울해지거나 심심함을 못 이겨 사고 친다고 여겨서 일부러 고생시킨다는 [[카더라]]가 많이 퍼져있다. 다만 실제로는 사서 고생을 시킨다기보다는, 명절 때 이런저런 이벤트(?)를 많이 하는 것이 명분이 서기 때문이다. 이런 이벤트들은 [[휴가]]나 [[외박]]이 걸려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무작정 고생만 하는 것은 아니니까 힘을 내보자. 배에서 생활하는 [[해군]]의 경우에는 함정에서, [[공군]]은 병사식당 등의 회관에서 차례를 지낸다고 한다. 지휘관이 [[대인배]]인 경우는 [[종교]]별로 병들을 분류하여 각자의 종교에 따른 방식으로 제사를 지내게 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종교적으로 제사가 허용되지 않는 병들은 안 해도 된다.[* 아예 시작하기 전에 절 안 하는 병사 손 들라고 해서 인원를 파악한 다음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 [[교도소]]에서도 설날, 추석에는 차례를 지낸다. 이를 "재소자 합동차례"라고 부른다. 물론 모범수에게만 허용되어 있다. * BC 3000년 경 갑골문 연구로 [[은나라]]의 왕이 자신이 왕이 되고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주변에 있는 토착종교를 싸그리 배척하고 왕의 조상만 섬기게 하는 문화를 만들었고, 이에 대해 일어날 불만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 자기 조상을 섬기면 날씨도 좋아지고 전쟁도 이기고 하는 일마다 잘된다고 하였다. 그러다 은나라는 [[주나라]]에 멸망 당하는데 주나라가 자기 나라도 졔례의식을 잘 받아들이고 은나라의 제사담당자를 불러들인다. 그러면서 [[주나라]]에도 조상숭배 문화가 퍼진 것이다. 그러다 춘추전국시대 [[공자]]의 등장으로 유교의 영향아래 지금까지 오게 된 것이다라는 주장이 있으나 해당 주장은 유학에 매우 비판적인 김경은 교수의 주장에서 나온 것이므로 그 부분은 고려해서 판단하자. *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정치가였던 [[안영]]은 "유자(儒者)들은 복상(服喪)의 예를 중시하고 가산을 기울여서라도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는데, 만약 그것을 백성들이 본받게 된다면 이 또한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주문왕(周文王)은 이미 가셨고 왕실까지 쇠퇴한 지 오래 되었는데도 지금 유자들은 의례(儀禮)를 성대히 꾸미고 번잡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세상에 옛날의 예를 부활하려고 하더라도 헛수고에 끝날 것은 명백합니다."라고 하며 제사의 폐단을 지적했다. * 제사 음식에 특별한 제한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알려지기 시작하자 제사상에 [[피자]], [[스테이크]], [[치킨]] 등의 신세대 음식이나 양식을 올려서 조상님들이 다양한 음식을 맛보게 해드리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집안도 있다. 또한 제사를 지내고자 하는 조상이 얼마 전에 돌아가신 경우이고 직계 가족이 살아있는 경우라면, 해당 인물이 조상에 대해 잘 알고 있을 터이니 조상님께서 생전에 좋아하던 음식 위주로 차려 놓고 제사를 지내는 경우도 있다. * [[윤달]]에 사망한 사람의 제사를 언제 지낼지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현대에는 갖가지 방법이 나왔다. 윤달이 있는 해에만 지내기도 하고[* 윤5월 17일에 죽은 사람의 제사를 윤5월이 있는 해에만 지낸다든가 하는 식.]도 있고, 윤달이 없는 해에는 평달에 지내고 윤달이 돌아오면 그 윤달에 지내기도 하고[* 윤8월 14일에 죽은 사람의 제사를 보통 해에는 평달 8월 14일에 지내다가 윤8월이 돌아오면 제대로 된 날에 제사를 지낸다든가 하는 식.] 평달에 지내는 것은 맞지 않으니 다음 달 초하루에 지내기도 한다.[* 윤7월 13일에 죽은 사람의 제사를 음력 8월 초하루에 지낸다든가 하는 식.] 사실 조선시대에도 이 문제가 아리송하기 때문에 저명한 유학자들에게 물어보는 이들도 있었는데, 퇴계 [[이황]] 등 조선의 유학자들은 제사는 무조건 평달에 지낸다는 견해였다. 이유는 윤달은 '정상적인 달'이 아니라는 것. 음력 윤8월 14일에 죽은 사람이 있다면, 그 제사는 무조건 평달 8월 14일에 한다는 것이다. 제삿상에 비정상적인 것을 제물로 올리지 않듯이, 제사를 지내는 시기 또한 비정상적인 때는 피한다는 논리이다. [[삼년상]]을 치를 때에도 중간에 윤달이 걸리면 상을 지내는 기간을 한 달 더 늘렸다. * 음력 11월 중순~12월 중순이 기일이라면 [[윤달]] 배치에 따라 한 해에 두 번 제사를 지내는 해와 아예 제사를 지내지 않는 해가 나타나기도 한다. [[2016년]] [[12월 25일]]이 음력 11월 27일이었으므로 이 날 제사를 지냈다면 [[2017년]]에는 윤5월[* 2017년 윤5월은 [[6월 24일]]~[[7월 22일]].] 때문에 건너뛰고 [[2018년]] [[1월 13일]]에나 다음 제사가 오는 셈이다. * 모종의 이유로 [[환갑]]을 맞지 못하고 죽은 사람의 환갑에 지내는 제사는 ‘사갑제’라고 부른다. * 일부에서는 [[장애인]]들이 제사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하는 경우가 있다. * [[기독교]]에서의 제사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기독교에서 제사의 대상은 [[야훼|하느님]] 뿐이며, 이 제사를 집전하는 이를 [[사제(성직자)|사제]]라고 칭한다. [[가톨릭]]과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등에서는 사제가 [[미사]]와 [[성찬예배]]를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로서 바친다. [[개신교]]에서는 [[예수]]가 사제인 동시에 십자가 위에서 제물이 되어 한 번의 완전한 제사를 이뤘으므로 더이상의 제사는 무의미하다는 [[신앙]]을 갖고 있으며, 사제의 직위 또한 부정한다. 다만 [[성공회]]의 경우는 좀 복잡한데, 사제 계급이 존재하며 [[감사성찬례]]라는 제사를 드리지만, 평신도 또한 일상 생활 속에서 하느님 나라를 실천하는 과정 속에서 스스로 거룩한 사제와 제물로서 살아갈 수 있다는 신앙을 갖고 있다. * [[조상]] [[귀신]]이 제삿밥을 못 먹자 친[[손자]]를 [[화목 보일러]]에 밀어버렸다는 [[설화]]가 있다.[[https://archive.is/naZcR|@]] * 2020년에는 코로나19 사태로 온라인 제사가 등장하기도 했다. * 일부 집안에서는 고인이 일정 이상의 형을 선고 받은 경우 그 사람의 제사를 지내지 않기도 한다. 예를 들면 고인이 징역 10년 이상 또는 금고 10년 이상의 형의 선고를 받은 적이 있는 사람은 제사를 지낼 수 없도록 하였을 때 아버지가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면 그 제사는 건너뛰게 된다. 이런 경우는 보통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 받았을 때로 정하며,[* [[집행유예]]는 보통 추가하지 않는다.] 벌금형을 추가하는 경우도 드물게 있다. * 제사를 부활한다는 말에, 조상을 [[퇴마사|퇴마]]하자고 주장하는 며느리의 이야기가 있었다: [[https://www.instiz.net/pt/7235955|인스티즈 글]](여초 커뮤니티의 시선),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50885178|루리웹 글]](남초 커뮤니티의 시선) * 2023년 5월, '자녀 중 연장자'를 제사주재자로 가장 우선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와 판례 변경 되었다. 원래는 '장남'이 제사 주재자가 되어야 했다. [[https://www.news1.kr/articles/?5043696|#]]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