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국대학 (문단 편집) == 조선인 관련 == 모든 제국대학은 원칙적으로 [[구제고등학교]]를 졸업하거나 혹은 그 제국대학에 부속되어 있는 [[대학예과|예과]]를 졸업해야 입학이 가능했다. 이 당시의 [[구제고등학교|고등학교(구제)]]는 현재 [[대학]] 교양과정 레벨을 가르치는 고등교육기관으로, [[독일]]계 학교인 [[김나지움]] 혹은 [[영국]]계 학교의 [[식스폼]] 과정에 해당하는 가까운 엘리트 양성 기관이었다.[* [[구제고등학교]]를 일단 합격하면 대학 진학은 쉬웠다. 그래서 언제나 고등학교 입시가 입시생과 부모들의 관심사였고 고등학교 재학생들의 프라이드는 하늘 높은 줄 몰랐다고 전해진다. 이런 구제고등학교의 전설적인 [[엘리트주의]]에 관해서는 일본에 많은 문학, 예술작품이 있다. 심지어 [[도쿄도|도쿄]] 소재의 제1고등학교는 그 당시 [[도쿄대학|도쿄제국대학]] 자체보다 더 유명했다고 한다.] 그런데 한반도에는 실업학교나 [[고등보통학교]][* 예컨대 [[마산여자고등학교]]는 마산여자상업학교, [[광주제일고등학교]]는 광주고등보통학교, [[경복고등학교]]는 경성제2고등보통학교(경성제2고보, 경복중학교를 거쳐 경복 중, 고로 분리되었다.) [[고등보통학교]]가 [[구제중학교]](5년제)로 인정된 것은 1938년부터.], 혹은 [[구제고등여학교]]와 [[구제중학교]][* 당시의 중학교는 5년제로서 현재의 중학교+고등학교와 같은 레벨의 학교였다.]까지밖에 없었기 때문에, 한반도에 [[대학예과|예과]]를 갖추고 있는 [[경성제국대학]] 이외의 제국대학에 바로 진학하는 것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가지 못한 조선인 학생들은 [[보성전문학교]](現 [[고려대학교]])나 [[연희전문학교]](現 [[연세대학교]])와 같은 [[구제전문학교]]를 다녔고, 정 [[대학]]을 가고 싶다면 일본 본토의 [[와세다대학]], [[게이오기주쿠대학]]과 같은 사립 [[구제대학]][* 일본의 학교교육법(1947년)이 시행되기 이전의 제도에 의거하여 설립된 일본제국의 모든 대학을 지칭하는 말.]을 다녔다.[* 일부 사립대학에서는 예과를 별도로 운영하면서 고등학교를 나오지 않은 학생들을 받아서 가르쳐 본과로 진입시키곤 했다.] 본토의 제국대학에 입학하는 극소수의 엘리트 조선인 학생들은 [[구제전문학교]]를 졸업한 다음 제국대학 본과에 바로 입학하는 과정을 밟거나[* 이를 방계입학이라고 한다. 이들은 [[구제고등학교]]나 [[대학예과|예과]] 출신과는 달리, '선과생'이라고 하여 편입생 취급을 받았으며 졸업 자격은 획득할 수 있었지만 학력 평가를 포함한 별도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 했으며 고등학교/예과 출신과 같은 대접은 받지 못했다고 한다.], 일본 본토의 [[구제고등학교]]를 통해서 제국대학으로 진학하였다고 한다. 대다수가 조선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조선인에게 입학허가를 비교적 후하게 내주었던 마쓰야마(松山, 송산)고등학교(現 [[에히메대학]])로 진학한 다음 제국대학으로 진학하였다고 한다. 1924년 조선에서도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되었고, 1930년대에 이르러서 [[경성제국대학]] 졸업생들이 조선 식민지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일본 본토의 제국대학으로 진학하려 하는 유학생은 계속 증가하였다. 우선 일본 본토 제국대학이 교육, 설비의 질적인 수준이 높았으며, 본토 제국대학 출신들이 더 대접받기도 했다. [[경성제국대학]]은 또한 법문학부, 의학부만 존재하였고, 1941년이 되어서야 이공학부가 추가되는 등, 배우거나 연구할 수 있는 분야도 한정되어 있었다.[* 그 당시 [[연희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 등에도 상과가 있었지만 [[구제전문학교]]이기 때문에 실용적인 성격이 강했다. 그렇기에 정치학, 경제학에 뜻을 둔 학생은 일본 본토로 갈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이유로 관료주의 사회였던 일본에서 기반을 얻기 위해서이다. 일본 최고의 대학인 제국대학을 졸업함으로서 이를 얻어내하고자 하는 열망이 강했다. 마지막으로 식민지로서의 억압으로 인한 이유이다. 조좌호[*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동양사학과 졸업, 전 [[성균관대학교]] 총장.], [[김사량]], 송을수[* [[교토제국대학]] 농학부 진학.] 등의 조선인 유학생들도 항일운동 활동으로 인해 조선에서 대학 진학이 어려워졌고, 이로 인해 일본 유학을 떠났다. > 도쿄제국대학 법학부에 재학하던 중에 학병으로 끌려간 [[신상초]]도 회고록 <탈출>에서 이와 관련한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려고 현해탄을 건너는 도항증을 요청하러 갔을 때, 일본인 경찰관들은 불손하다는 이유로 소년 신상초를 욕하고 때렸다. 몇 년 후 신상초가 도쿄제국대학 법학부에 입학하고 귀향하자 이번에는 그 경찰관들이 “환심을 사느라고 오히려 아첨” 하기에 바빴다. >---- >- 정종현, 제국대학의 조센징 -대한민국 엘리트의 기원, 그들은 돌아와서 무엇을 하였나?-, 휴머니스트, 2019 中. ||{{{#!wiki style="margin: -1px -1px" || 제국대학명 || 학생 수|| || [[도쿄제국대학]] || 163 명|| || [[교토제국대학]] || 236 명|| || [[도호쿠제국대학]] || 106 명|| || [[규슈제국대학]] || 162 명|| || [[홋카이도제국대학]] || 62 명|| || [[오사카제국대학]] || 34 명|| || [[나고야제국대학]] || 21 명|| || 총계 || 784 명|| ---- || 본토 제국대학의 유학생 수.[* 교토제국대학이 유학생 수가 가장 많았던 이유는 [[연희전문학교]], [[경성법학전문학교]] 등 식민지의 공립, 사립 [[구제전문학교]] 출신들의 방계 입학이 허용되었고 비교적 차별이 적었던 학풍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데이터 출처: 정종현, 제국대학의 조센징 -대한민국 엘리트의 기원, 그들은 돌아와서 무엇을 하였나?-, 휴머니스트, 2019, 60p] || }}} || [[구제고등학교]]와 제국대학 테크를 밟은 사람들의 예시로는 다음과 같다. 그 외의 출신자는 [[구제고등학교]] 항목 참조. * [[윤일선]]: 제6대 [[서울대학교/임원|서울대학교 총장]]을 역임. [[오카야마대학|제6고등학교]]와 [[교토대학|교토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했다. * [[유기천]]: 제9대 서울대학교 총장을 역임. [[고베대학|히메지고등학교]]와 [[도쿄대학|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 [[윤종화]]: [[경상남도]] [[창녕]][[군수]] 역임. [[사가대학|사가고등학교]]와 [[규슈대학|규슈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했다. * [[권영대]]: 한국 물리학의 선구자. [[세이조대학|세이조고등학교]]와 [[홋카이도제국대학]] 이학부를 졸업했다. * [[인태식]]: [[관세청장|관재청장]]을 역임. [[에히메대학|마츠야마고등학교]]와 [[도호쿠대학|도호쿠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했다. * [[박준규(1925)|박준규]]: 前 [[대한민국 국회의장]](3선). [[에히메대학|마쓰야마고등학교]]를 거쳐 [[경성제국대학]]에 편입했다.[* 정확히 말하면 원래 [[구마모토대학|구마모토의과대학]]에 입학하였지만, 재학 중 광복을 맞아 귀국하여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로 편입하였다가, 법문학부 정치학과로 전과하여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 한편, 당시 [[조선인]] 출신으로 제국대학 교수까지 한 케이스도 있었다.[* 당시 제국대학의 교원은 주임교수-조교수-강사-조수-부수 순으로 보직이 정해져 있었다.] * [[이태규]](李泰圭)는 [[경성고등보통학교]] 및 [[히로시마대학|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를 거쳐 [[교토대학|교토제국대학]]의 이학부 화학과를 졸업하였다(이학박사). 1937년에 교토제국대학 조교수[* 도중 [[경성제국대학]]에서 이공학부 화학과 교수로 초청받았으나 교토제국대학에 재직 상태였기 때문에 응할 수 없었다.], 1943년에 교수로 임명되었다. 이태규는 교토제국대학 교수 경력 때문에 해방 이후 [[국대안]] 파동 당시 좌익 계열 학생들에게 친일부역자로 낙인찍혀 숱한 테러를 받기도 했다. * [[리승기]](李升基)는 마쓰야마고등학교를 거쳐 교토제국대학 공학부 화학공학과를 졸업했다(공학박사). 교토제국대학에서 조교수를 지낸 리승기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의 제2대 학장을 지내다가, [[6.25 전쟁]] 때 [[월북]]하여 자신이 1939년에 개발한 [[비날론]]을 공업화했다. * [[임호식]](林浩植)은 [[양정고등보통학교]],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수원고등농림학교]]를 거쳐 [[홋카이도대학|홋카이도제국대학]] 농학부를 졸업하고 홋카이도제국대학 조수를 거쳐 1935년 조교수로 임명되었다. [[조선인]] 최초의 농학[[박사]]로도 알려져 있다. * [[윤일선]](尹日善)은 [[서울고등학교|경성중학교]] 및 [[오카야마대학|제6고]]를 거쳐 [[교토대학|교토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부수 및 조수를 거쳐 1928년 조교수에 임명되었다. 한국 최초의 [[병리학]]자이며 [[서울대학교/임원|서울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다. * 고영순(高永珣)은 [[오사카대학|부립 오사카의과대학]](오사카제국대학의 전신)을 나왔다. 1928년 12월 24일 경성제국대학 조교수로 임명되었으나 이틀 만에 사표를 내고 서울 [[정동]]에서 내과의원을 개업하였다. 임명재[*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 [[홋카이도대학]] 의학박사], 심호섭[* 총독부의학전문학교 졸업, [[도쿄대학|도쿄제국대학]] 의학박사. [[경성의학전문학교]] 및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초대 학장, [[대한의사협회]] 초대 회장 역임.]과 함께 당대 3대 내과 의사로 손꼽혔다고 한다. * [[김종원(1900)|김종원]](金鍾遠)은 [[에히메대학|마쓰야마고등학교]]를 거쳐 [[도쿄대학|도쿄제국대학]]에서 지질학을 전공하였다. 그 후 [[규슈대학|규슈제국대학]] 공학부 지질학교실에서 [[연구생]] 생활을 하다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강사를 거쳐 1945년 7월 13일 교수로 임명되었으나 곧 해방을 맞게 된다.[* 해방 후 경성대학에서 대한민국 최초의 대학 교수이었으며(1946.8.22), 국립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지질학과 창설을 [[손치무]] 조교수와 같이 이루고 지질학과 과장이였다.] [[구제고등학교]]는 전부 [[남고]]라 실질적으로 제국대학의 대부분은 [[남학생]]이었으나, 조선인 출신의 제국대학 [[여학생]]도 있었다. [[이회창]] 前 [[자유선진당]] 대표위원의 막내이모이자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과학자]]인 [[김삼순]]이 그러한데, 김삼순은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現 [[오차노미즈여자대학]])[* [[구제전문학교]] 과정. 단, 당시 [[고등사범학교]]는 [[구제전문학교]] 중에서도 우월한 지위였다.]를 졸업한 다음 [[홋카이도대학|홋카이도제국대학]]에서 이학부를 졸업하였다. [[일제강점기]]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와 광복 후 [[김일성종합대학]] 초대 의학부장을 지낸 [[정두현]]은 무려 3곳의 제국대학을 졸업했다. [[http://omn.kr/1tdre|기사 링크]] 도쿄제대에서 '농학'을, 도호쿠제대에서는 '이학'을, 다이호쿠제대에서는 '의학'을 공부했다. 다만 도쿄제대의 '농과대학 실과'는 이후 농학부가 되는 농과대학 본과가 아니라, [[부속 전문부]] 과정이었므로 정식 학사 학위로 인정되진 않았다.[* 학위 수여 과정이 아니므로 도쿄제대 동문록에 등재되지 않았다.] 민족시인으로 유명한 [[윤동주]]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다음 제국대학으로 진학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릿쿄대학]]에 입학하였다고 한다.[* 후에 [[도시샤대학]]으로 편입.] 특히 동갑내기 사촌이었던 [[송몽규]]가 [[교토대학|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하여 친척들의 비교대상이 되어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한다.[* 거기다가 송몽규는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당해 시찰당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윤동주로써는 더욱 열등감을 느꼈을 것이다.][* 영화 [[동주(영화)|동주]]에서도 이런 상황이 묘사된다. 함께 교토제국대학 입학시험을 치렀는데 송몽규만 합격하자, 윤동주가 태연한 척 하려고 애쓰며 송몽규를 축하해주고 송몽규도 난처해한다. 그리고 그 소식을 편지로 접한 윤동주의 아버지도 실망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