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갈량/인간관계 (문단 편집) == 교우 관계 == 유비가 제갈량을 등용하면서 득을 본 것 중에 하나가 제갈량의 인적 네트워크란 시각도 있다. 그전까지 유비는 그를 보좌해 줄 인재들이 그리 많지 못했지만 제갈량을 등용함으로써 제갈량이 알고 지낸 형주의 인사들을 추천받거나 하여 상당 수의 인재들을 얻을 수 있었다.[* 제갈량을 얻기 전 유비군의 인적자원 구성은 이렇다. 유비가 처음 유주 탁군에서 거병하면서 따른 [[관우]], [[장비]], [[간옹]], 평원상을 거쳐 서주자사 시절 [[도겸]]에게 물려받은 [[손건]], [[미축]], 예주목 시절부터 따른 [[진도]], [[유염]] 등이 있고 [[위연]]은 유비의 부곡 출신, [[조운]]은 공손찬 휘하 객장으로 있으면서 얻은 인재이다. 그러나 이들도 유비 못지않게 고생해 생활기반을 모두 버리고 온데다가 사마휘의 평가처럼 한 국가를 경영하고 유지할 재목은 되지 못했다. 그리고 [[진등]], [[진군]], [[전예]], [[원환]]처럼 유비가 초창기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피치 못할 사정으로 헤어진 부하들도 있었다. 또한 유비는 정처없이 떠돌아다닌 생활이 길어서인지 친족 중심으로 운영하던 조조나 손씨 가문과 달리 유씨 종친 네트워크나 스승 [[노식]]으로 구축된 학파 인맥의 덕을 거의 보지 못한 듯하며 유표 사후 유기를 따르는 형주의 잔여 세력을 포함, 제갈량과 방통으로 대표되는 형주파와, 입촉 전후로 얻게 된 [[법정]], [[황권]] 등 유장 휘하에 있던 익주파를 다수 얻게 되면서 비로소 제대로 된 인재들을 활용할 수 있게 된다.] 북벌 때 옛 친구인 [[서서]]와 [[석도]]가 위에서 하급 벼슬아치에 머무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위에는 선비가 너무 많구나. 어찌 저 두 사람이 저렇게 쓰인단 말인가!" 하고 탄식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서서]]는 어사중승(정3품, 감사원장 격)까지 올라갔고 석도는 전농교위, 역시 동문수학한 사이인 [[맹건]]은 양주자사(도지사 급)를 거쳐 정동장군까지 해먹었다. 결코 낮은 직책이 아니다. 게다가 촉에는 [[구품관인법]]이 없었기 때문에 제갈량이 위나라의 시스템을 잘 이해 못한 점도 감안해야 한다. 특히 [[조비]] 때에는 주로 호족 등의 배경있는 인물들이 윗자리에 올랐는데 아무래도 그들보다 능력이 낫다고 보기 어려운 [[왕충]] 같은 인물들도 고위직에 앉은 걸 보면 더욱 그렇다. * [[사마휘]]: 수경이라는 별명이 붙은 인물. 인물평이 실로 정확했으며, 방덕공과 형님아우하는 사이였다. 제갈량의 스승으로써 그를 지도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재능을 높이 사 여남에 사는 [[풍구]]라는 이를 스승으로 모셔와 제갈량을 지도했다. 후에 제갈량을 유비에게 천거하였다. * [[최주평]]: 박릉 출신.[* 박릉 최씨는 남북조, 수당시기 태원 왕씨 등과 함께 산동귀족의 대표가문이다.]이름은 균,자가 주평으로 한글로 동명이인인 형 최균이 있다.아버지는 한 [[영제#s-7|영제]] 때 사도, 태위 벼슬을 지낸 최열로 동취(銅臭)라는 고사를 남긴 사람이다. 부패 관료인 아버지와는 달리 건실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제갈량이 출사하기 전 스스로를 [[관이오|관중]]과 [[악의(전국시대)|악의]]에 비유했을 때 다른 이들은 수긍하지 않았으나 최주평과 [[서서]]만은 그 재주를 인정하고 변호해 주었다. 또한 제갈량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단점을 수시로 지적해줬는데 제갈량은 이 일을 들어 훗날 신료들에게 자신의 단점을 지적하는데 주저하지 말 것을 권했다. * [[서서]]: 자는 원직. 본명은 복. 양양에 모여있던 인재들 중의 한 명이며, 제갈량의 가장 친한 친구로 추정된다. 제갈량과는 형주에서 유학하던 시기에 교우를 맺게 되었다. 제갈량이 자신을 [[관이오|관중]]과 [[악의(전국시대)|악의]]에 비교할 때 진지하게 그 말을 인정했던 몇 안 되는 사람으로서 제갈량과는 유별나게 친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보인다. 제갈량보다 먼저 유비를 섬기던 중, 장판파 전투의 혼란 속에 어머니가 조조에게 사로잡히자 조조에게 넘어가게 되었고 그대로 출세했다. * [[석도]]: 자 광원. 제갈량과 형주에서 함께 유학을 했던 인물. 제갈량과 우의가 상당히 깊었다. 조조가 형주로 남하할때 임관해 군수, 전농교위 등의 관직을 거친다. * [[맹건]]: 자 공위. 역시 제갈량과 형주에서 함께 유학했던 인물. 향수병을 이기지 못해 고향에 돌아가 [[조조]] 밑에서 벼슬살이 했다. 친구들 중에선 가장 먼저 출사한 인물. 이때 제갈량은 "중국에는 사대부가 많은데 왜 하필 고향에서 노니려 하시오." 하며 몹시 안타까워 했다. 제갈량이 기산에서 [[사마의]]와 대치할 때 사마의의 편지에 답하면서 자신의 안부를 맹건에게 전해줄 것을 부탁한 걸로 보아 둘의 우정은 그때까지도 변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 [[마량#s-1|마량]]: 양양의 명문귀족인 마씨 가문의 아들. 백미(흰 눈썹을 가진 기재)라는 고사의 주인공이기도 하며, 제갈량보다 나이가 어려 제갈량을 존형이라 불렀다. 제갈량과 의형제를 맺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로 친분이 깊었던 인물로 그를 따라 촉에서 벼슬을 지내나 [[이릉대전]] 때 사망. * [[마속]]: 마량의 동생. 제갈량이 남정북벌을 준비하는 동안 자주 군략을 의논했던 상대. 마량의 동생이었기 때문에 제갈량이 더더욱 총애했던 것으로 보이나 결국 제1차 북벌 때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고 [[읍참마속|제갈량은 울면서 마속을 베었다.]] * [[장완]]: 제갈량의 후임자. 일찍이 근무태만 혐의로 유비가 죽이려 했으나 그 능력을 알아본 제갈량에 의해 목숨을 건지고 제갈량 시대에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북벌기간 동안 촉군의 후방을 지원했고 제갈량의 뒤를 이어 사실상의 제1인자로 촉한의 국정을 책임졌다. * [[조운]]: 제갈량과 뜻이 잘 맞아 사실상의 교우.[* 연의에서 오나라에서 동남풍을 불게 한 후 도망칠 때 유비에게 도울 사람으로 조운을 요청했으며, 유비가 오나라로 정략결혼을 갈 때도 조운에게 호위를 맡기며 계책 3개를 주는 내용이 있다. 그만큼 조운을 신뢰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 유비가 이릉대전을 일으키려 했을 때 이 두 사람이 뜻을 같이하여 반대하기도 했다.] 조운이 죽자 가장 슬퍼한 이 역시 제갈량이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두사람이 각각 문과 무에서 정점을 찍고 있다. '''제갈량의 인간관계에 속하는 모든 이들 중 최강자.''' 실제로도 제갈량은 조운에게 많이 의지했는데, 그 이유 역시 조운의 노련한 무력과 풍부한 실전 경험 때문이었다. * [[강유]]: 제갈량이 북벌 중에 발굴한 젊은 인재. 기성 출신으로 일찍부터 [[정현(삼국지)|정현]]의 학문(훈고학)을 익히며 한실 부흥에 뜻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1차 북벌 당시 촉한에 귀순했고 그 재능을 알아본 제갈량이 중앙에 그를 추천하여 군사 경험을 쌓게했다. 이후 촉한의 핵심 지휘관으로 성장했으며 장완과 [[비의]] 사후 현상유지에 급급한 유선 때문에 망국 루트를 타는 촉한의 마지막 보루가 된다. 연의에서는 제갈량이 평생동안 병법을 연구하여 만들어낸 심서를 강유에게 물려준다. 그걸 바탕으로 북벌을 계승하였으나, 제갈량만 한 기반이 없는 데다(위 출신의 항장이니까) 정치력이 모자라(싸우는 것 말고는 염두에 두지 않은 듯.) 스승의 나라를 지키지 못하였으며, 촉을 점령한 위군 상대로 반간계를 쓰다가 실수로 패사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최후는 연의에서는 자결이지만 정사에서는 마지막까지 분투하다가 죽었다. * [[엄준]]: 손권이 황제가 되자 위위로 임명되어 촉한에 사자로 갔는데, 제갈량이 그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삼국지연의에서의 '''그의 장면'''을 알고 있다면 참 눈물이 나는 장면. * [[가비능]]: 선비족의 족장으로 위나라에 상당한 위협을 가했으며 제갈량의 북벌에 협조적이었다. 연의에선 오로침공전에서 촉한을 공격하는 포지션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제갈량의 협력자였다. * [[노숙(삼국지)|노숙]]: 노숙은 [[제갈량]]의 친형인 [[제갈근]]의 친구였으며, 제갈량을 동오로 데려가 손권과 대담할 수 있는 판을 만들어 준 사람이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연의에서는 위태로운 행동을 일삼는 제갈량의 성실한 조력자를 넘어 거의 보호자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노숙이 사망하였을 때 제갈량이 사흘을 내리 슬퍼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바, 실제로도 둘의 교분은 매우 두터웠던 것 같다. 그 이전에 노숙이 유일하게 강경파를 제어할 수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아, 이거 이제 어떡하지'에 가까웠던 것 같지만. * [[관우]]: 연의에서 둘이 신경전을 펼쳤고, 이를 바탕으로 고우영이 관우를 질투하여 그의 죽음을 방조했다는 창작을 넣었다. 그런데 이문열 등이 이를 교묘하게 조작하여 제갈량과 관우는 실제로 사이가 나빴다고 주장하여 적지 않은 세월을 여러 사람이 낚였으나 오히려 정사에서는 서로 서신을 나눌만큼 친분이 있음이 밝혀졌다. 실제로 제갈량이 유비에게 임관한 초기에는 관우와 장비를 상대로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고, 몇 차례 관우를 치켜세워주는 서신을 보내줬다. 관우도 같이 알고지내는 시간 동안 그를 인정해서인지 제갈량이 자기를 띄워주는 서신을 받았을 때 무척 기뻐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했다. 두 사람의 경력 및 나이 차이는 거의 부자뻘인데, 당대의 용장으로 이름값마저 높았던 관우쯤 되는 인물이 아들뻘인 제갈량에게 염(髥)이라 불린 것이다. 오늘날로 치면 아버지뻘인 직장 선배에게 "수염아저씨!" 하고 부른 격이니 나름대로 파격적이고, 오히려 두 사람 사이에 상당한 친밀감과 호감이 있었다는 증거가 될만한 것. 특히 마초에 대해 문답한 두 사람의 서신 내용을 생각하면 형주 지사장쯤 되는 관우가 익주 본사의 사장 비서실장쯤 되는 제갈량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해서 "본사에 마초라는 사람이 새로 들어왔다던데, 그 사람 너 보기에 어떠냐?"고 묻자 제갈량은 "그 사람 대단하긴 한데, 수염아저씨만은 못하죠"라고 대답하고, 이 대답을 들은 관우는 "하하! 본사 량이가 보기에 마초가 대단하긴 해도 내가 더 낫다는군!" 하고 기뻐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한 격이다. 두 사람의 관계가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상당히 호의적이지 않았다면 성립하기 쉽지 않은 상황인 셈. 거기에 관우 사후 아들인 [[관흥]]의 인물평을 좋게 해주었는데 당시 시대상 나이든 명사가 젊은 인재의 인물평을 해주는 것은 그의 후견인이 되어준단 의미이니만큼 관우 사후에도 그의 가문과 좋은 관계를 이어나갔다. 정치적인 수일 뿐이다 라고 폄하할 수도 있지만, 그 정도 지위가 되는 사람의 선택치고 정치적이지 않은 선택이 뭐가 있겠는가? 그리고 사실 연의 기준으로도 처음에 관우가 불복했던 때를 제외하면 둘의 사이가 좋았던 편이다. 아무래도 관우가 오만했다는 점도 있고, 둘이 유비군 내의 서열 2위를 차지하기 위한 정치적인 요소를 가미함으로 소설의 재미를 더하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설화에서는 제갈량과 관우가 대립, 대결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대부분 관우가 지거나 하는 식으로 제갈량이 띄워지는 식으로 흘러가는 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