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조(조선) (문단 편집) ===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 [include(틀:이덕일 세력의 역사왜곡)] >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 > 정조는 즉위하는 당일 빈전殯殿 문 밖에서 대신들을 소견하고 한 말이다. 임오년([[사도세자]]가 죽은 해) 이후 '하루도 잊지 않고 가슴 속에 간직해 온 한 마디를 선포했다'고 알려졌다. [[이덕일]]에 따르면 그 즉시 일성에 대신들은 경악했다 한다. 특히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았던 [[노론]]은 공포에 휩싸였'으며 '14년 전 뒤주 속에서 비참하게 죽은 사도세자가 다시 살아난 모습을 똑똑히 보았던' 것이라 한다. >---- >사도세자의 고백 345p, 이덕일 요약하자면 정조가 해당 발언을 한 것은 사실이나, 이 내용은 [[이덕일]]의 편집과 픽션적 창, 변작에 따른 왜곡으로, 실제로는 완전 다른 맥락의 기록이었다. >召見大臣于殯殿門外。 下綸音曰: "'''嗚呼! 寡人思悼世子之子也。''' 先大王爲宗統之重, 命予嗣孝章世子, 嗚呼! 前日上章於先大王者, 大可見不貳本之予意也。 禮雖不可不嚴, 情亦不可不伸, 饗祀之節, 宜從祭以大夫之禮, 而不可與太廟同。 惠慶宮亦當有京外貢獻之儀, 不可與大妃等, 其令所司, 議于大臣, 講定節目以聞。 旣下此敎, 怪鬼不逞之徒, 藉此而有追崇之論, 則先大王遺敎在焉, 當以當律論, 以告先王之靈。" > >[[경희궁|빈전]](殯殿) 문밖에서 대신들을 [[알현|소견]](召見)하였다. 윤음(允音, 국왕의 목소리)을 내리기를, "'''아! 과인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다.''' [[영조|선대 왕]]께서 [[조선왕조|종통]](宗統)의 중요함을 위하여 나에게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이어받도록 명하셨거니와, 아! 전일에 [[영조|선대 왕]]께 올린 글에서 ‘[[조선/왕사|근본]]을 둘로 하지 않는 것[不貳本]’에 관한 나의 뜻을 크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예(禮)는 비록 엄격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나, 인정(人情)도 또한 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향사(饗祀)하는 절차는 마땅히 대부(大夫)로서 제사하는 예법에 따라야 하고, [[태조(조선)|태묘]](太廟)에서와 같이 할 수는 없다. [[혜경궁 홍씨|혜경궁]](惠慶宮)께도 또한 마땅히 경외(京外)에서 공물을 바치는 의절이 있어야 하나 [[정순왕후(조선 영조)|대비]](大妃)와 동등하게 할 수는 없으니, 유사(有司)로 하여금 대신들과 의논해서 절목을 강정(講定)하여 아뢰도록 하라. 이미 이런 분부를 내리고 나서 괴귀(怪鬼)와 같은 불령한 무리들이 이를 빙자하여 추숭(追崇)하자는 의논을 한다면 [[영조|선대 왕]]께서 유언하신 분부가 있으니, 마땅히 형률로써 논죄하고 [[영조|선왕의 영령]](英靈)께도 고(告)하겠다." 하였다. >---- >[[http://sillok.history.go.kr/id/kva_10003010_004|《정조실록》 1권, 1776년(정조 즉위년) 3월 10일 신사 4번째 기사.]] 이 말을 쉽게 풀이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나, [[영조|선왕]]께서 과인에게 [[효장세자]]를 이어받도록 명하셨다. 과인 또한 [[사도세자]]의 아들이면서 [[효장세자]]의 아들일 수는 없으니 '''공식적으로는 [[효장세자]]의 후계자로만 남겠다'''는 뜻을 크게 밝힌 바가 있다. [[사도세자]]를 제사지내는 일은 왕실의 예법이 아니라 '''일반 사대부의 예법을 따를 것이며,'''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과인의 친어머니인 [[혜경궁 홍씨]] 또한 '''대비와 같은 예를 받을 수는 없는 일'''이니 구체적으로 어떠한 예를 받는 것이 타당하겠는지 의논하여 아뢰라. 이와 같은 분부를 내린 뒤에도 사도세자를 기리느니 기념하느니 하는 소리를 했다가는 선왕의 유언에 따라 엄히 처벌하겠다. 요컨대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먼저 거론하기는 했지만 이는 [[사도세자]]를 추숭해 높이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효장세자]]의 아들로서 [[조선/왕사|보위]](寶位)에 오르는 것임을 명확히 밝힌 것이다.[* 즉, 정조 즉위년([[1776년]]) [[3월 10일]], 신사 4번째 기사에 기록된 해당 발언의 내용은 '본인은 혈통으로는 [[사도세자]]의 아들이긴 하나, [[조선/왕사|왕가의 법통]]으로는 [[효장세자]]의 아들로서 보위를 잇는다.'는 점을 명확히 한 것에 가깝다.] 이는 설령 내심으로는 [[사도세자|친아버지]]를 높이고 싶었다고 하더라도 즉위 초부터 선왕인 [[영조]]의 결정을 뒤집었다가는 정국이 요동치고 역풍이 불 것이 뻔했기에 [[사도세자]] 문제를 꺼내는 사람들을 제어하고 그를 통해 정국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행해졌다고 보는 것이 옳다. 실제로 [[조선 왕조]]에서 부모의 죽음을 [[갑자사화|복수와 숙청의 명분]]으로 사용한 [[연산군|왕]]이 있었고 [[사화|엄청난 피바람]]이 불었던 만큼 정조가 적어도 피에 눈이 먼 복수를 원하지 않는 한, 신하들을 안심 시킬만한 행동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사도세자]] 문서를 봐도 알겠지만 정조가 막장이 아닌 한 복수할 만한 대상은 거의 없었다. [[임오화변]] 당시 당파를 막론하고 대부분 세자를 감싸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현 국왕의 아버지, 그것도 [[사도세자|세자]]가 죽었을 때 관직에 있었다는 자체는 찬반 여부 불분하고 숙청 대상에 들 수 있었다. 찬성했으면 당연히 죽는 것이며 반대했어도 "네가 더 잘 반대하여 [[영조|선왕]]을 제대로 보필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잖냐?"라는 소릴 듣는 순간 최소 유배형이고, 가만히 있었으면 있었던 대로 "너는 [[사도세자|세자]]가 죽는데 관심 하나 없었냐?"라는 소리를 들으며 쫓겨나거나 죽을 수 있다. [[갑자사화]] 당시 [[이세좌]]는 [[사약]]을 전달했다는 왕명을 이행했다는 이유만으로 죽고 [[광주 이씨]]에게도 불똥이 튀었으며 [[폐비 윤씨|폐비]] 논쟁 때 적극적으로 폐출에 반대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처벌을 받은 신하들도 있었다. 신하들의 경계심 자체가 높았을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정조는 오히려 [[영조]]의 유지를 확실히 계승하고 정국을 안정시키겠다는 뜻을 천명했으며, 이러한 발언을 사도세자를 계승하겠다는 의지로 해석하는 것은 정조의 의도를 왜곡하는 것이 된다. 다만 정조의 말이 본심이었는지 아니었는지. 즉 표면 그대로 읽어야 하는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것이 핵심이고 뒷부분은 명분용 겉치레인지를 살펴볼 필요는 있다. 실제로 당시에도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부분을 핵심적인 내용으로 해석하고 이에 편승하려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적 수사에서 언급돼서는 안되는 것을 언급함으로써 이중적인 효과를 노리는 것은 상당히 흔한 일이다.] 하지만 이덕일과 같이 사도세자가 살아난 모습을 똑똑히 보았던 것 운운하는 것은 도가 지나친 것이며,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아뢰는 상소를 올린 이덕사, 이일화, 유한신이나 [[영조]]의 인산(장례)이 끝난 뒤 비슷한 상소를 올린 안동 유생 이응원과 그 아버지 이도현 등 적지 않은 인물들이 [[사도세자]]를 비호한 죄로 처형되었다. 정조는 이응원 부자를 "외로운 새새끼, 썩은 쥐새끼"라고 비난했으며, [[안동시|안동]]을 부에서 현으로 강등하기까지 했다.[* 《정조실록》 1776년(정조 즉위년) [[4월 1일]], 8월 6일 및 8월 19일 조.] 이런 조치는 대게 [[강상죄|강상을 범하거나]] 역모를 일으킨 자가 나온 곳이 아니면 잘 나오지 않는다. [[노론]]에서도 위에 나온 것처럼 처음에는 불안감을 가졌을 수는 있다. 정조가 즉위하면서 [[임오화변]]의 일을 끄집어낼까 봐 불안해하는 것이 당연한 상황에서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선언을 부정적인 방향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이덕일]]의 주장과는 달리 "(정조의 그 한마디는) '''내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상 무시할 수는 없지만, 이를 빙자해서 (사도세자에 대한) 추숭 의견을 꺼낸다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취지였다고 분명히 선을 그은 것이었고, 그럼에도 당시 신하들의 귓가에는 일단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즉 정조 자신이 나서서 사도세자의 일을 공론화'''할 수도 있다'''는 선언인) 그 첫 번째 한마디만이 돌아와 들렸을 거라고 해석했다.] 존현각 사건('''정유역변''')이나 홍계희 집안의 획책 등을 보면 이런 사람들이 실제로 있었던 듯하다. 이후에도 추숭 반대를 외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정조는 오히려 앞서 언급한 발언과 처벌을 통해 [[노론]]을 안심시켰고, [[사도세자]]에 대한 추숭도 장기간에 걸쳐 [[노론]] 세력과의 협력을 약속하면서 점진적으로 시도했다.[* 참고 문헌: 사료 - 《조선왕조실록》, 국사 편찬 위원회 디지털 베이스 / 단행본 - [[이덕일]], 《사도세자의 고백》, 휴머니스트, 2004년 / 논문 - 《정병설, 길 잃은 역사 대중화》.] 둘 다 맞다고 볼 수도 있다. 즉 [[사도세자]]를 비호하려는 자들에게는 "내가 사도세자의 아들이 맞긴 맞는데 그렇다고 추숭 운운하여 정국을 뒤흔드려는 시도는 용서 안해"라고 한 것이면서 동시에 [[노론]]에게는 "내가 원래 [[사도세자]]의 아들인지라, [[영조|할바마마]]의 명령만 없었으면 너네들 담가버렸을 거거든? 알아서들 기어라!"라고 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권력자들은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말 한마디 던져두고 그 반응을 보는 전략적 모호함을 즐겨 구사하곤 한다. 학문과 정치력이 모두 뛰어났던 정조의 이 말 한마디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