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재호(1891) (문단 편집) == 여담 == * 2004년 9월 11일, [[영남일보]]에서 정재호 지사의 차남 정훈식(鄭勳植, 1939. 3. 27 ~ )과의 인터뷰 기사를 보도했다.[*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040911.010051059030001|2004년 9월 11일 영남일보 [향토 독립유공자 그 후손들의 삶 .9] 정재호 선생 아들 훈식씨]]] 정훈식은 어릴 적부터 짚신을 팔아 생계를 연명했고, 이후에는 영천군 [[고경면]](現 영천시 고경면) 도암리, [[경산군]] [[하양읍|하양면]](現 [[경산시]] [[하양읍]]) 등 다른 사람의 집을 전전하며 품을 팔고 머슴살이를 해 그 대가로 쌀을 받으며 생활하는 힘든 청년기를 보냈다. 학교도 다니지 못해 한동안 [[무학]]으로 지내다 입대 후 군 복무 중에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글자를 깨치기도 했다고 한다. 전역 후에는 여러 일을 전전하다 [[영천시청]]에서 16년간 [[환경미화원]]으로 근무하다 1999년 퇴직했는데, 1994년 근무 도중 [[청소차]]에서 떨어지는 [[낙상]] 사고를 당해 다리를 크게 다쳤다. 이때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2004년 당시에도 그 후유증으로 고통에 시달렸다고 한다. 또한 부인 [[해주 오씨]](1948. 3. 24 ~ ?)[* 오석연(吳錫淵)의 딸이다.]와 일찍 사별하고 끊임없는 생활고로 가정을 제대로 챙기지 못해 [[외아들]]마저 사회생활에 제대로 적응치 못해 [[교도소]]를 전전하는 것이 늘 가슴아프다고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1977년 늦게나마 선친이 [[독립유공자]]에 서훈되고, 2001년 고향 근처인 영천시 임고면 선원리 964번지에 선친의 독립유공을 기리는 '[[http://mfis.mpva.go.kr/memorial/movementView.do;jsessionid=S9Na9rYojUhvK7U_o3u8T2vHMKpRd2RspyAiUeKb.mfisweb10?gubunCode=ALL&sid=895&pageIndex=134&searFacilgubun=&searTopicsort=&searAddr_sigun=&searMpvabranch=&searVR=&searGbn=tit&searTxt=|정재호 애국지사 추모비]]'가 [[https://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765719|건립되어]] 이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연일 정씨]][[분류:영천시 출신 인물]][[분류:1891년 출생]][[분류:1943년 사망]][[분류:옥사한 인물]][[분류: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분류:건국훈장 애국장]]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