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동제일교회 (문단 편집) == 역사 == 1885년 10월 11일, 아펜젤러 목사가 자신의 정동 사택에서 [[성찬식]]을 거행한 것을 시초로 한다. 오늘날까지도 [[기독교대한감리회|한국 감리교단]]을 대표하는 교회 가운데 하나로, 여러 분야에서 ‘한국 최초’ 기록을 보유하면서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쳐왔다. 초기에는 작은 기와집을 예배당으로 사용했는데 점차 교인 수가 늘어나면서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현대식 예배당을 건축하기로 하고 1895년 9월 9일 정초식을 거행했으며 1897년 12월 26일 벧엘예배당 봉헌 예배를 드렸다. 벧엘예배당에는 1918년 [[하란사]]가 설치한 한국 최초의 [[파이프오르간]]이 있는데, 이후 6.25전쟁 때 예배당 강대 쪽이 폭파되면서 파이프오르간이 파괴된 적이 있다. 1902년 6월 11일, 아펜젤러 목사가 순교하여[*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자회의에 참석하러 가던 중 선박충돌사고가 일어나 같이 승선한 여학생을 구하려 탈출을 미루었고, 결국 바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순교하고 말았다.] 후임으로 1903년 [[최병헌]] 목사가 제2대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1919년 [[3.1 운동]] 당시 [[이필주]] 목사(제5대 담임목사)와 [[박동완]] 전도사가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하였다. 당시 [[이화학당]] 학생이던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다수의 교인들이 독립운동에 앞장서다 일제에 의해 구속되어 탄압을 받았고, 교회는 강제로 폐쇄 당하는 시련을 겪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