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재조지은 (문단 편집) == 대중적 인식과 반박 == 대중적으로는 [[사대]]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자주적 중립외교'를 행했다는 [[광해군]]에 대한 재평가 및 [[병자호란]] 전쟁 과정에서 조선이 보여준 추태 등으로 인해, '[[사대부]]들이 같잖은 사대 하겠다고 망해가던 명나라나 빨아대고 [[청나라]]는 무시하더니 또 전쟁 내서 나라 말아먹었다'는 부정적 인식을 대변하는 용어로 인식되기도 한다. 현대에도 과격한 숭미 의식을 비꼬려고 가끔 재조지은을 언급하기도 한다. [[한홍구]] 교수는 저서인 대한민국史에서 [[한국전쟁]] 이후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기려 동상을 세웠던 일을 조선에 파견된 [[이여송]]에 빗대어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한홍구, 한겨레출판, 대한민국史(2003년) 1, p201~211 '맥아더가 은인이라고?'] 그러나 재조지은에 관한 당대의 논의는 의리론적인 측면에서 상당히 중요한 것임은 물론이고, 현대인의 기준에서 봐도 명나라에 대한 의리나 그들의 은혜를 강조한 것은 딱히 이상할 것 없는, 충분히 할 만한 행동이었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에 대한 비전문가나 대중의 인식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들은 조선의 지배층이 공리공론에나 치중하는 쓰레기였다는 것과, 조선이 전쟁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참패를 당했다, 재조지은이 실체 없는 사대주의 사상이라는 것인데 모두 부당하다. [[임진왜란]]은 실제로도 명이 만력 3대정 중에서도 가장 많은 수준의 엄청난 전비를 쏟아부어 전폭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한 전쟁이었고, [[만력제]]가 자국에서는 '고려[* 당시 중국, 일본에서는 조선을 부를 때 [[삼한]], [[고려]], [[조선]]이 모두 통용되었다. 용법은 조금씩 달랐는데 "땅"을 가리킬 때는 주로 삼한을 쓰는 편이었고, "문명"을 가리킬 때는 고려가 많이 쓰였으며, "정권"을 가리킬 때는 분명하게 조선을 주로 사용했다. 이 외에도 "위치"를 가리킬 때는 "해동"이, "종족"을 가리킬 때는 "동이"가 사용되었다. 명에게 비유하자면 삼한은 "대륙"이고, 고려는 "중화"이고, 조선은 "명"이고, 해동은 "중원"이고, 동이는 "한"인 셈이다.] 황제'라는 비웃음을 받아 가면서까지 조선을 적극 지원해서 조선을 멸망의 위기에서 건져 낸 전쟁이다.[* 비록 [[벽제관 전투]]의 패배로 전선을 고착화시키기도 하고 민폐도 많았지만 [[명나라군]]의 전투력과 지원이 있었기에 조선군이 재정비할 여유를 가질 수 있었고 조선이 거둔 승리가 빛을 발할 수 있었다. 실제로 정유재란 때는 [[명나라군]]이 지상군의 주력이었으며, 임진왜란 때는 5만~7만 4천 명 가량, 정유재란 때 파견된 [[명나라군]] 규모가 무려 9만~11만 7천 명이다. 특히 [[정유재란]] 당시에는 [[명나라군|명나라 군]]이 한반도 남부에서 일본군과 전면전을 전개하며 일본군을 압박하였고,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 역시 사실이다. 만약 [[명나라군|명나라 군]]의 이러한 활약이 없었다면 설사 히데요시가 죽었더라도 일본군이 한반도 남부에서 철수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상정할 수 있다.[[https://n.news.naver.com/article/366/0000287767?sid=004|#]]] 도덕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조선을 위기에서 건져 준 동맹국에 대해서 인간적인 고마움을 느끼는 것은 상식적으로 보아도 당연한 일이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에서"명(明)나라 신종(神宗) 황제가 조회를 40년간이나 보지 아니했기 때문에 마침내 천하의 혼란을 초래하여 멸망하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은 분명한 근래의 일입니다. 전하께서는 게으름의 폐해가 나라를 망치기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은 잘 모르실 것입니다."라고 [[현종(조선)]]에게 충고하는 기록이 있는데 이걸 보면 당대 조선인들도 만력제와 명나라를 마냥 칭송한건 아니며 재조지은과는 별개로 만력제가 암군인건 인지하고 반면교사로 삼아야한다고 여긴듯 하다.] 명나라뿐만 아니라 [[미국]]에게도 마찬가지다. 감정적인 문제를 떠나 실리적으로도 이런 도움을 받아놓고 아예 나몰라라 해버리면 국가 신뢰도가 팍 떨어져버리니 외교 무대에서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굴복하기 전에는 광해군 때 [[강홍립]]과 군대를 보내서 도와 줬다. 이때 깃발을 바꿔단 것도 명이 도와주지 못했기 때문에 더 이상 청에 저항할 수 없게 됐다는 점과 명나라가 모문룡의 횡포를 방치했다는 정당한 근거가 있었다. 그마저도 명의 멸망에 협조했을지언정 이후 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명조 유민들의 망명을 받아줌으로써 최소한의 신의를 지켰다. 재조지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근현대 한국인들의 필요에 의해 생겨난 것일 뿐, 재조지은이 거론되던 시대의 인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광해군에 대한 재평가나 사대에 대한 부정적 인식 등은 [[구한말]] 및 [[일제강점기]] 이래 한국의 민족주의적 역사가들에게서 많이 거론되었는데, 여기에는 식민지 상태로서 자주독립을 강조하던 한국의 근대 민족주의가 큰 영향을 미쳤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일제강점기 일본의 공도 컸다. 일본은 조선의 [[사대]]를 조롱하면서 자국의 식민 체제를 옹호했고, 더불어 일본은 만주를 지배하면서 만주와 당시 일본이 지배하던 한반도의 역사를 하나로 묶어 설명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과거 '청나라와 친하고 명나라에 대한 사대가 부족했다'고 여겨진 광해군을 높게 평가했다. 만주를 기반으로 했던 청나라와 조선의 '밀착 관계'(라고 여겨진 것)가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하듯 만주를 지배하는 정당성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광해군/평가]]나 [[병자호란]] 문서로.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